소설리스트

난가기연-600화 (600/892)

600화. 구하다

소도를 비롯한 집안 권속들은 야영지 한구석에 웅크렸다. 그들 중에는 넋이 나가 있는 이도 있었고 덜덜 떨고 있는 이도 있었다. 소릉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남은 호위들과 함께 미친 듯이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새 몸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바로 그때, 또 다른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들렸다. 이를 들은 소씨 일가가 절망에 빠졌을 때, 누군가 소릉의 어깨를 붙잡았다. 온몸이 피 칠갑이 된 그의 호위였다.

“공자, 어르신과 부인을 데리고 어서 가십시오, 여기는 저희가 막겠습니다!”

휘익!

호위가 막 말을 마쳤을 때, 그의 머리통은 이미 몸에서 떨어진 상태였다. 아까 기병들에게 명을 내렸던 우두머리가 스쳐 지나가며 큰 소리로 웃었다.

“한 놈도 도망칠 수 없다!”

소릉은 수하의 피를 얼굴에 뒤집어쓴 채로 난도질을 하며 후퇴했다. 얼굴을 가린 피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고 곧 저절로 두려워졌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은 후의 상황이 두려운 것이었다.

소릉의 수하를 베어버린 우두머리는 다시 커다란 칼을 들고 소릉을 향해 말을 달려 다가왔다.

“하하하하…… 소릉, 죽어라!”

칼은 하늘 높이 들어 올려졌고 말은 이미 소릉의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그 순간, 소릉이 서 있는 근처의 어둠 속에서 희미한 파공성이 들렸다.

휘익……!

퍽!

돌연 주먹 하나가 나타나 우두머리가 탄 군마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 위에 탄 우두머리는 엄청난 힘에 의해 제 몸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쿠웅!

사람과 말이 함께 땅으로 고꾸라졌다. 말이 옆으로 쓰러져 수 장(丈)의 거리까지 미끄러지며 우두머리는 말 아래에 깔려 끌려갔기 때문에 도중에 절명하고 말았다.

“살려둘 필요 없다!”

“예!”

뒤이어 윤중이 거친 목소리로 명을 내리자, 윤씨 집안의 고수들은 각기 세 방향에서 싸움터로 뛰어들었다. 윤중은 손에 아무런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빼앗은 검이나 장창을 이용해 공격했다. 심지어는 떨어진 투창을 적을 향해 던지기도 했다. 마치 지상에 강림한 전신(戰神)처럼, 그가 지나간 곳에는 사람이 스러지고 말이 고꾸라졌다.

소씨 집안 호위들은 이미 힘이 빠진 지 오래였기 때문에 후방에서 집안사람들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마에 쓰이기라도 한 것처럼 윤중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어느 쪽이 우세를 점하고 있는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일각(15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윤중은 왼손에는 단도를, 오른손에는 머리통이 꿰인 장창을 든 채, 산을 이룬 시체들 곁에서 먹구름을 뚫고 나타난 달빛을 받고 섰다. 그의 온몸은 붉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대장, 우리 형제 둘이 죽고 일곱이 다쳤습니다.”

“음, 죽거나 다친 형제들은 모두 업어라. 이만 가자.”

거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한 윤중은 소씨 집안 이들이 머무는 야영지를 잠시 바라본 뒤 성큼성큼 몸을 돌려 떠났다.

“장사(壯士)! 부디 성함이라도 남겨 주십시오! 대체 어느 분께서 우릴 도왔는지라도 알려 주십시오!”

소도가 뒤에서 이렇게 소리쳤으나 윤중 일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렇게 어두운 그림자 아래 또렷이 빛나던 두 눈만이 소씨 집안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남게 되었다.

* * *

윤중이 도성에 다시 돌아왔을 때, 도성은 이미 초여름에 접어들고 있었다. 맨 처음 맞붙었을 때 두 사람을 잃은 것 말고는 윤중이 데리고 떠났던 이들도 모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최근 몇 달은 계속 바람과 찬이슬을 맞으며 노숙을 하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윤중조차 피로함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번 일을 고강도의 훈련이라 여기며 내내 긴장을 내려놓지 않았다.

윤중은 하인들에게 물어 윤재성과 윤청은 아직 관아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며, 계 선생님도 아직 떠나지 않으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먼저 객사로 가서 계연을 만났다.

윤중이 객사의 뜰에 들어서니 계연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에 그는 걸음을 늦추고 가까이 다가가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글씨도 수려했고 글도 분명 좋은 내용 같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닌 듯했다. 어쨌든 그는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돌아왔구나? 일은 잘 끝났고?”

계연은 여로에 지친 듯한 윤중을 힐끗 바라본 뒤, 다시 고개를 숙여 계속 글씨를 쓰며 물었다.

“괜찮았어요. 맨 처음만 빼고 뒤로 갈수록 나설 일은 별로 없었어요…….”

윤중은 몇 차례의 습격에 관해 이야기하며,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제일 처음의 습격이었다고 말했다. 가죽 갑옷을 차려입은 군사들은 모두 훈련을 제대로 받은 이들이었고 실력도 뛰어났으며 석궁 같은 무기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강호의 무인들이 그들을 상대하기는 몹시 어려웠다. 그 뒤로 이어진 몇 번의 습격에는 무공 고수들이 몇 있긴 했지만, 처음만큼 힘들진 않았고 비교적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몇 명 살려두고 물어보지 그랬니?”

윤중은 다리를 번쩍 들어 돌의자 위에 앉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살려두면 더 번거로우니 전부 죽였어요.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저도 대략 추측할 수 있었으니, 제 아버지와 형님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어떤 이는 저도 추측할 수 있지만, 어떤 이는 감히 말을 할 수가 없네요.”

그러자 계연이 붓을 들어 먹물을 묻히며 윤중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니 너는 가서 문관(文官) 노릇을 하더라도 크게 출세하겠구나!”

“아, 아닙니다. 그런 농담은 하지도 마세요. 문관이 되면 끝도 없는 공문을 처리해야 하고, 종일 온갖 속 시끄러운 일을 생각해야 하지 않습니까. 무관이 된다 해도 즐거운 일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문관보다는 훨씬 통쾌하지요!”

이렇게 말한 윤중은 좀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계연이 쓰는 글씨를 보며 물었다.

“계 선생님, 제가 전부터 여쭤보고 싶었는데요. 선생님께서 특이하신 건가요, 아니면 신선들은 모두 선생님처럼 온화하고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건가요?”

“나도 언제나 온화하기만 한 건 아니란다. 수선자들 대부분은 선(善)은 선으로, 악(惡)은 악으로 대하는 이들이지. 사실 보통 사람과 그리 다를 바는 없어.”

그러자 윤중이 입을 활짝 벌리며 웃었다.

“당연히 선인과 범인은 큰 차이가 있죠. 최소한 선인들은 불로장생하고 죽지 않잖아요. 선생님처럼 말이에요. 아마 제가 늙어도 선생님께서는 계속 이 모습이시겠죠.”

계연은 선지 위에 마지막 글자를 적은 뒤, 붓을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말대로 네가 나이가 들어도 나는 계속 이 모습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불로장생과 영생을 산다는 것은 서로 다른 개념이야. 나는 그저 상대적으로 오래 살 뿐이지,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단다. 왜, 수행을 닦아보고 싶으냐?”

계연이 이렇게 묻자 윤중도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확실히 저도 생각해본 적은 있어요. 누가 신선을 부러워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아주 재미있고 신기한 것을 보더라도 담담한 미소 한 번 짓는 게 고작이잖아요. 그래서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러니 지금이 낫죠. 게다가 아버지와 형님을 보니 너무 오래 사는 것도 피곤할 것 같아요. 즐겁게 일생을 살다가, 후에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 주면 그게 가장 좋을 것 같아요.”

그러자 계연의 흐릿한 눈에 신광(神光)이 번뜩이더니 그가 윤중을 바라보았다. 그는 윤중의 말에 깊이 동감하는 바였다.

“서책이 전해지는 것, 개인의 업적이 후세에 남는 것 모두 생의 연장이라 볼 수 있지. 수선자와 비교해도 이는 무척 가치 있는 삶이야.”

“저희 아버지처럼 말이죠?”

윤중이 이렇게 묻자 계연도 무척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아버지처럼 말이다!”

두 사람은 잠시 한가로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윤중이 화제를 전환하여 최근 조정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계연은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 듯 보였지만, 실은 그간의 변화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계연은 윤중에게 그의 부친과 형이 몇 달간 서로 철저히 분업하여, 반대편에 서 있던 대신들의 상황을 참작해주는 등의 수단으로 다시 정세를 장악하게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동안 양호의 황권은 전보다 더욱 강해졌으며, 조정의 법도는 더욱 삼엄하고 엄격해졌다.

계연의 짧은 몇 마디에서, 윤중조차 앞으로 몇 대 지나지 않아 황제라 해도 법도를 무시하기 어렵게 될 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황권을 보호하는 강력한 수단이기도 했다.

윤중이 돌아온 시점은 마침 조정의 세력 다툼이 막을 내린 때였다. 오후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윤재성과 윤청은, 윤중이 돌아온 것을 보고는 하인들에게 잔칫상을 준비하라 명했다.

계연을 알게 된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니, 윤재성과 윤청은 비록 자신들이 계연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 계연을 이해하고 있었다. 도성의 일이 일단락되었고 윤중도 돌아왔으니, 계연도 곧 떠나리라.

함께 술잔을 나눈 다음 날, 계연은 윤씨 일가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조정 세력 간의 다툼은 마침내 홍무제의 타협으로 드디어 끝을 맺게 되었다. 비록 몇몇 정책은 대정국 전체에 완전히 자리 잡기까지 얼마간 시간이 걸리겠지만, 개혁파들에게 위협이 되는 장애물은 더 이상 없다고 봐도 좋았다.

* * *

도성을 떠나기 전, 계연은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황궁으로 향했다. 오문(*午門: 궁궐의 남쪽에 있는 정문) 밖에 서 있는 시위들도, 황궁을 순찰하는 금군들도, 계연과 어깨를 스쳐 지나가면서도 누구도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계연은 황궁의 기운을 관찰하며 걷다가 마침내 어서방을 찾아냈다. 홍무제는 마침 어서방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황제의 앞에는 비답을 끝낸 상주문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이는 후에 모두 관련 부서로 보내져야 했다.

양호는 자신의 아버지인 양종에 비하면 무척 근면하고 성실하게 정무를 보는 군주였다. 대정국 역대 황제 중에서도 좋은 황제라 손꼽을 수 있었다. 양호는 이때 무언가 아주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는 듯했다. 그가 때때로 보이는 웃는 얼굴로 미루어 보아 계연은 이 점을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계연은 도성을 떠나기 전 그저 별 뜻 없이 명이 얼마 남지 않은 황제를 보러 왔을 뿐이었다. 어쩌면 간접적, 혹은 직접적으로 몇 마디 나눌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 양호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고 양호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태감 이정춘과 두 어의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은밀히 몇 번 불려간 두장생도 알았으며 계연도 알았다. 그 외에는 윤재성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양성, 궁중 비빈들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끝이 곧 임박했다는 걸 알지 못했더라면, 양호는 어쩌면 윤재성에게 다시 조정을 이끌어달라고 말하거나 개혁파에게 이토록 드러내놓고 협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호가 손에 든 책이 너무나 보통의 것이었기 때문에, 계연은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 이름을 흐릿하게 볼 수 있었다. 책의 이름은 <야호수(野狐羞)>라고 적혀 있었다. 이름만 봐도 이는 별 제대로 된 책이 아니었다.

“흐흐흐……. 흐흐…….”

양호가 낮은 소리로 웃음을 흘리는 걸 보니 온 정신을 책에 쏙 뺏긴 듯했다. 그가 손을 뻗어 접시 위에 있는 밀전(*蜜餞: 꿀이나 설탕에 절인 과일)을 하나 집어 입에 넣은 뒤 책장을 넘기자 삽화가 나타났다. 이에 계연은 그림을 자세히 보려 책상을 크게 돌아갔다. 그 그림은 계연의 눈에도 비교적 또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림 안에 얽힌 두 사람의 자태를 보니 화가가 적지 않은 정성을 들인 듯했다. 아마 그래서 계연도 이 그림을 또렷하게 볼 수 있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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