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화. 신선을 마주하다
‘식색성야(*食色性也: 식욕과 성욕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닌 고유한 본성이라는 뜻으로, <맹자(孟子)>의 한 구절)라더니!’
계연은 피식 웃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조정은 안정을 되찾았고, 윤재성은 건강을 회복했으며, 태자도 용재(*庸才: 평범하고 졸렬한 재주를 가진 사람)가 아니었다. 이에 양호는 최근 마음이 가볍고 편안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죽음에 임박한 황제가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다니, 이는 무척 보기 드문 것이었다.
양호는 책장을 다 읽고 넘긴 후에도 다시 돌아와 조금 전의 삽화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점차 그림 위에서 관심이 떠난 그는, 어서방 안에서 어떤 새롭고 맑은 기운을 감지했다. 원래 어서방의 기운은 지금과 비교하자면 무겁고 혼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양호는 이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지금에 와서야 그 차이를 뚜렷하게 느꼈다.
양호는 왼쪽을 쳐다봤다가 계연이 있는 오른쪽을 쳐다보았다. 계연은 양호가 자신을 보지 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 전에는 시선이 공교롭게 마주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누, 누구 있느냐?!”
양호는 무언가를 느끼고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바깥에 서 있던 이정춘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폐하, 분부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양호는 늙은 태감을 흘끗 보더니, 서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서방 곳곳을 살펴보고 등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는 곧 자신이 받은 그 느낌이 점점 강렬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구 있소?”
나이 든 태감은 입을 달싹이다가 황제가 자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황제의 이런 모습에 늙은 태감은 슬슬 걱정이 들어, 몰래 어의를 부르러 가려던 찰나였다. 어느 평온한 목소리가 어서방에 울렸다.
“있습니다.”
그러자 나이 든 태감은 온몸에 번개가 훑고 지나간 것처럼 단박에 반응하더니 황제 가까이 다가가 긴장한 얼굴로 방 곳곳을 살폈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여봐라, 여봐라!”
바로 그때, 계연이 어안(*御案: 황제가 쓰는 책상) 한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듯했다.
“여봐라! 어가를 호위해라! 어서……!”
태감이 급히 소리치자 양호가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그러자 태감도 그제야 자신이 이렇게까지 소리쳤는데도 시위들이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당, 당신은…….”
양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계연을 가리키더니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내, 어디선가 당신을 본 듯한데……. 분명 어디선가……?”
그러자 계연은 굳이 뜸 들이지 않고 웃으며 그를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제 이름은 계연이라 합니다. 오래전, 폐하를 한번 뵌 적이 있었지요. 오늘 폐하께서 한가하여 흥이 나신 모습을 보고 이렇게 나타나 보았습니다.”
“계연…… 계연……? 그, 그 선생이십니까? 윤 재상부에서……?”
“기억하시는군요.”
계연의 이 말은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신은, 그…….”
양호는 당황하여 머리가 혼란스러웠으나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
“계 선생께서는 선인이십니까?”
이는 아주 기묘한 감각이었다. 두장생을 만났을 때는 그가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상대가 선인이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계연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양호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지금 신선을 마주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양호가 물은 질문은 계연도 수많은 이들에게서 들어보았다. 하지만 이때 황제는 굳이 계연의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게 대체 언제였지? 최소한 10년은 되었는데. 고(*孤: 예전에, 임금이나 제후가 스스로를 겸손히 일컫던 말)가 선인을 만나게 될 줄이야! 보아하니 고가 선생과 인연이 있는 모양입니다…….”
양호는 이렇게 잔뜩 말을 늘어놓더니, 별안간 무언가를 의식한 듯이 얼른 맞은편에 놓인 연탑(*軟榻: 길고 좁은 휴식용 평상)으로 계연을 이끌었다.
“고(孤)가 너무 혼잣말만 중얼거렸군요. 이리 앉으시지요, 선생. 자, 어서 차와 다과를 내와라.”
“예!”
이정춘은 이렇게 대답한 뒤 주저하는 얼굴로 걸음을 뗐다. 그는 가면서도 걸음마다 한 번씩 고개를 돌려 황제와 계연을 쳐다보았다. 그는 몇 달 전 자신이 이 선인을 윤 재상댁에서 본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계연은 연탑으로 가서 앉지 않고, 어서방 곳곳을 둘러보았다. 내부를 구경한 뒤 마침내 계연의 시선이 황제의 어안(御案)에 다다랐다.
“마저 읽으셔도 돼요.”
양호는 책상 위에 놓인 서책을 바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굳이 숨기지 않고 책을 들어 서표를 꽂은 뒤 다시 덮었다.
“선생께 우스운 꼴을 보였습니다. 이 책은 시간이 나면 후에 다시 보도록 하지요.”
양호는 이렇게 말하며 책상을 떠나 먼저 맞은편 연탑으로 걸어가 앉았다. 그러더니 곁에 놓인 작은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선생, 어서 이리 앉으시지요. 선생께서는 조정 대신도 아니시고 일개 서민도 아니신데, 어찌 선인을 서 있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계연도 웃으며 사양치 않고 연탑으로 걸어가 앉았다. 보기에 좀 더 화려하다는 것 말고는 보통의 의자와 크게 다를 바가 없게 느껴졌다.
“실은 저도 모습을 드러내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는 듯하고, 소리 내어 묻기까지 하시니 저도 모습을 보이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그러니 만약 무언가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아는 대로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양호는 황제로서 견식이 넓었고 원래도 신선을 찾는 데에 그리 집착하지 않았던지라, 처음의 놀라움이 가시고 나자 천천히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선을 만났다는 흥분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고가 알고 싶은 것은 아주 많습니다. 이왕 선생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럼 고도 몇 가지 여쭤보도록 하지요…….”
양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옆에 앉은 계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선생께서는 선인이시지만, 범인의 생사에는 관여하지 않으시겠지요?”
“음? 폐하께서는 어찌 그리 단언하십니까?”
계연은 호기심을 느껴 이렇게 물었다. 그는 원래 아무리 양호라고 하더라도 자기에게 선단 같은 것을 구해달라 요청할 줄 알았다. 어쨌든 눈앞에 신선이 있는데 한번 물어는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러자 양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선생께서는 윤 재상과 알고 지낸 지 분명 오래되셨을 테니, 자연히 교분도 깊을 겁니다. 하지만 윤 재상이 오래 병을 앓았는데도, 선생께서는 선술(仙術) 같은 것으로 그를 구하려 하지 않으셨지요…….”
여기까지 말한 양호는 돌연 표정이 엄숙해지더니,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 재상이 나은 것은, 국사의 공입니까, 아니면 선생께서 나서신 겁니까?”
“윤 훈장님은 원래도 아직 떠나실 때가 아니셨어요. 두 국사의 말대로, 그분의 호연정기는 주변 3리를 덮을 정도이니, 수명대로 살다 떠나지 않는 이상, 만약 병으로 작고하게 된다면 이는 하늘의 뜻이지요. 그러니 국사의 출현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셈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 또한 또 다른 하늘의 뜻이라 할 수 있겠지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양호를 본 뒤 진지하게 대답했다.
“계모(*某: ‘모’는 이름 대신 쓰여 자기를 낮추어 부르는 말)는, 윤 훈장님의 병을 치료하는 데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양호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안도하는 동시에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럼 선생께서는 분명 고를 도와주지 않으시겠군요. 고가 황제이긴 하나, 선생 같은 선인께는 오히려 윤 재상에 비할 수도 없겠지요. 부귀영화라고 해봐야…… 하하하…….”
양호는 생각만 해도 헛웃음이 나왔다. 그 어떤 부귀영화도 그에게 아무런 즐거움이나 흥미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참, 선생과 윤 재상은 서로를 친우로 여기고, 깊은 교분을 나누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럼 윤 재상도 선생께서 선인인 것을 아는 모양이군요? 어쩐지 본인도 그렇게 비범하더라니. 선인을 벗으로 두고, 정말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노태감은 이때 차와 다과가 담긴 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원래는 궁녀가 할 일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이들이 어서방에 드는 것이 좋지 않을 거라 여겨 스스로 들고 온 것이었다.
“폐하, 선장(仙長), 차와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연탑의 작은 탁자 위에 정교한 다과 네 접시와 밀전이 놓였다. 노태감이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르려던 순간, 양호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양호는 직접 주전자를 들어 계연과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드시지요, 계 선생님.”
“하하, 그럼 저도 예를 따르느니 명을 받들겠습니다.”
계연은 차를 한입 머금어 음미해 보았다. 안타깝게도 제왕이 따라준 차라고 하여 무슨 특별한 맛이 나지는 않았다. 그는 양호가 아무리 제왕이라지만 지금 자신 앞에서 약간 긴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양호에게 있어 아주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차는 선생의 입맛에 맞으십니까?”
“맛이 괜찮네요.”
“이 다과도 좀 드셔 보십시오, 수백 개 다과 중에서 정성껏 골라 온 것입니다.”
계연이 탁자 위에 놓인 접시 네 개를 바라보았다. 그중 하나에는 밀전이 담겨 있었고, 다른 세 접시는 각기 색상이 다른 정교하게 만들어낸 다과였다. 그건 마치 장인이 정성껏 만들어낸 예술품과 비슷해서, 집어먹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계연이 다과를 집어 입에 넣자 양호가 또 다시 물었다.
“맛이 좀 어떻습니까?”
계연은 느낀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주 맛있군요.”
“아, 정말 다행입니다. 선인들은 노을을 먹고 이슬을 마신다고 하여, 평범한 사람이 먹는 것들은 입에 맞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하하, 지나친 걱정이시네요. 선인도 전부 사람이에요. 저 어안 위에 놓인 <야호수> 같은 책도 범인들만 흥미를 느끼는 건 아니에요.”
그러자 양호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선생께서도 보고 싶으십니까? 고가 가져다드리지요.”
“황상, 소인이 가져오겠습니다!”
한쪽에 서 있던 노태감은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포착하고는, 얼른 어안으로 다가가 소설을 집어 양호에게 건넸다.
“선생, 여기 있습니다.”
“예!”
계연이 소설책을 받더니 몇 번 뒤적였다. 이 책에는 좀 외설적인 묘사가 들어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읽는 사람의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재미있었다. 게다가 책 속에 나오는 여우는 보통의 여인들보다 훨씬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인력을 지녔다. 특히나 행간 사이에서도 여우 요괴의 유혹적인 자태가 느껴질 정도였다. 이는 노골적이고 색정적인 묘사만 일삼는 다른 책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이에 계연은 책을 샅샅이 살피며 작가가 누군지 알아보려 했지만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어디 내놓지 못할 종류의 소설이었기에, 작가의 이름이 없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계연이 서책을 뒤적이던 때, 양호는 내내 이 눈앞의 선인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전혀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책 속의 묘사를 읽으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다만 그에게서는 아무런 경박한 기색도 느껴지지 않아, 겉모습만 보면 무슨 경전이나 대단한 책을 읽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