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6화. 예상 밖의 전개 (1)
사당의 창호지는 구멍이 숭숭 뚫린 지 오래라, 여인은 벽 한쪽에 몸을 숨기고 자그마한 구멍으로 실내의 상황을 관찰했다. 불빛 아래 실내의 모든 것이 또렷하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여인은 겸손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지닌 젊은 서생인 왕원명을 보고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준수한 얼굴의 왕원명과 열띤 대화를 나누는 양호를 보고는 더욱 기뻐했다. 그녀가 보는 각도에서는 이정춘이 바닥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신발 두 짝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이정춘을 무시하고, 다시 모닥불에 책을 비춰보는 계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에 파문이 일고 지나갔다. 그녀는 계연의 옆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한순간, 무어라 말로 할 수 없는 깨끗한 기운이 느껴졌다.
콰직……!
계연이 손에 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자, 양호와 왕원명의 주의가 그쪽으로 쏠렸다. 계연은 때맞춰 고개를 젖히며 하품했다.
“하암……. 이제 좀 피곤하네요. 삼 공자와 왕 공자는 계속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먼저 자겠습니다.”
“예, 편하신 대로 하세요!”
“예, 예. 먼저 주무세요. 건초는 이미 깔아두었습니다.”
계연은 일어나 살짝 양손을 맞잡고 예를 취한 뒤 서책을 왕원명에게 돌려주었다.
“잘 봤어요, 두 분은 계속 이야기 나누세요!”
계연은 양호의 뒤쪽으로 걸어가더니 겉옷을 벗지도 않고 이정춘의 곁에 누워 잠든 척했다.
바깥에 있던 여인의 시선은 내내 계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양호에 의해 계연의 모습이 가려지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창문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 와중에 실수로 손이 창틀에 닿아 탁, 소리가 났다.
“이게 무슨 소리지?”
“바깥에 누가 있나?”
“글쎄, 무슨 동물이 아니겠소?”
“바람일 수도 있겠지.”
양호와 왕원명은 고개를 들어 창문가를 바라보았다. 밖에서 안을 보면 불빛 때문에 환했지만, 안에서 밖을 보면 온통 새까맸다. 여인은 자신이 소리를 내자마자 벽에 등을 딱 붙인 상태였다.
한참 뒤, 더 이상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왕원명이 이렇게 말했다.
“아마 바람이었는가 보오.”
양호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고는 얼른 “그런가 보군요.”라고 대답했다.
밖에 있던 여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실내의 상황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사람이 넷이나 있었으니, 그리 쉽게 목표를 이룰 순 없을 듯했다. 하지만 이리 많은 서생을 한 번에 만나니, 그 한 명 한 명이 모두 탐이 났다.
그녀와 같은 요괴들이 서생을 좋아한다는 많은 이야기가 아무 근거도 없는 소리는 아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요괴들은 자질이 뛰어난 서생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일단 만물의 영장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질이 뛰어난 이들의 대표가 바로 높은 경지의 무공을 지니거나 실력이 출중한 문인이었다.
게다가 무인에 비해 서생들은 살기가 적고 문기(文氣)가 강했으며, 적지 않은 이들이 준수한 용모에 여인을 아끼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또한 대부분 인간의 도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위험성으로 보나 요괴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으로 보나, 서생들이 훨씬 환영받는 편이었다.
재차 망설이던 여인은 곧 그들을 만나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여인은 펄쩍 날아오르더니, 깃털처럼 가볍게 사당에서 몇 장(丈) 떨어진 곳에 내려섰다. 그러고는 막 도착한 듯한 몸짓으로 사당 방향을 향해 소리쳤다.
“안에 사람 있나요?”
이 목소리에서는 기쁨과 놀라움, 여인이 지닌 특유의 부드러움과 약간의 가련함이 느껴졌다. 이에 사당 안에 있는 양호와 왕원명은 모두 깜짝 놀랐다.
양호는 기다리던 이가 왔다는 걸 알고는 솟구치는 기쁨을 억눌렀다. 이 목소리만 들어봐도, 왕원명이 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 이해가 갔다.
왕원명은 놀란 얼굴로 양호를 보며 말했다.
“양형, 들어보니 여인인 듯하오.”
“그렇소, 확실히 여인이군.”
“여기가 무슨 황야는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외진 곳인데, 이런 한밤중에 여인 홀로 어찌…….”
왕원명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밖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 사람 있나요? 소녀가 혼자라 조금 무섭습니다…….”
여인의 목소리는 전보다 가까워져 있었다. 다시 묻는 목소리에는 기쁨보다는 망설이는 느낌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
“있어요, 있습니다!”
양호는 벌떡 일어나 다시 왕원명에게 말했다.
“아이고, 왕형. 여인 홀로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일단 제쳐두고, 아무래도 저 여인은 곤란한 상황에 놓인 듯한데 우리 같은 사내가 어찌 수수방관할 수 있겠소?”
“그렇군, 양형의 말이 맞소.”
두 사람은 함께 문가로 다가가 목판을 치우고는 살짝 문을 열어 바깥을 내다보았다. 달빛 아래,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월백색 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왼손은 옆에 늘어뜨리고 오른손으로는 왼팔을 안은 자세로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비록 달빛 아래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자태만 보더라도 아리땁고 가련한 느낌이 들었다.
“낭자, 일행은 없습니까? 밖이 추우니 어서 들어와 불을 좀 쬐시지요!”
“양형 말이 맞소. 낭자, 저희는 모두 성현의 말씀을 따르는 서생이니 마음 놓으십시오!”
“정말 고맙습니다, 두 분 공자님. 소녀가 달리 갈 곳이 없어…….”
여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두 사람을 향해 만복례를 올리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양호와 왕원명은 그녀가 들어올 수 있도록 양쪽으로 비켜섰다.
“아, 낭자, 만약 개의치 않으신다면 저희가 이 문을 좀 닫겠습니다. 추위도 막아야 하고 밤에 혹 들짐승이 들어올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여인은 이미 모닥불 곁에 가서 서 있었던 터라,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향해 대답했다.
“공자의 말씀이 맞습니다. 두 분 공자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여인은 이렇게 말한 뒤, 시선을 돌려 한쪽에 누운 계연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전에는 계연이 요괴들 앞에 나타난 방식이 적절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외양이 못났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요괴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상황이 복잡해지자 계연은 어쩔 수 없이 소매 속의 손가락을 이정춘을 향해 뻗었다.
푸시식-.
그 소리와 함께 계연의 옆에 누운 이정춘의 허리춤 아래가 살짝 부풀더니, 은은한 구린내가 풍겨왔다. 이에 여인은 눈썹을 찡그리더니, 이정춘에게서 거리를 벌렸고 자연히 계연에게서도 멀어졌다.
이때, 양호와 왕원명은 모닥불 근처로 돌아와 여인을 향해 무척 점잖은 태도로 말했다.
“낭자, 소인의 이름은 양호이고, 이쪽은 왕원명이라 합니다. 앉아서 몸을 좀 녹이시지요!”
“혹 배가 고프진 않으십니까? 제게 전병이 조금 있습니다, 물도 있고요.”
두 사람은 이렇게 말하며 여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모닥불 아래 여인의 용모가 또렷하게 드러났고, 그 맑고 아리따운 얼굴은 두 사람의 상상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본능적으로 두 사람의 그녀에 대한 태도는 더욱 친절해졌다.
그렇게 세 사람은 모닥불에 둘러앉았다. 여인이 중간에 앉고, 양호와 왕원명은 각자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그 양옆으로 앉았다.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만약 두 분 공자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소녀는 오늘 밤 밖에서 두려움에 떨었을 거예요.”
여인은 추위를 떨쳐내려는 듯이 양손으로 팔을 감싸고 비볐다. 그 동작으로 옷깃이 살짝 흘러내렸고, 가슴 부근은 더욱 풍만한 각도를 그려냈다.
‘오호……. 저 여우 좀 보게!’
양호는 이쯤 되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맞은편의 왕원명도 그와 비슷한 상태였다.
세 사람은 서로 이름을 밝힌 뒤 각자 어쩌다 강신의 사당에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우 요괴가 말한 모친과 싸워 홧김에 집을 나왔다는 이야기에는 구멍이 많았으나, 양호는 조금도 이를 들춰내지 않았다. 하지만 왕원명은 그 이야기에서 조금도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계연은 이 요괴의 수단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안으로 들어와 말을 몇 마디 나누기도 전에 이미 온갖 교태를 내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면서도 얼굴은 가련하기 짝이 없어, 이 분야의 고수가 확실해 보였다. 책 속의 왕원명이 이 여인과 단둘이 사당에 있으면서도 그토록 오래 버텨낸 것을 보면 오히려 자제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양호와 왕원명과 대화를 나누면서, 요괴는 ‘무심코’ 몇 번이나 아름다운 몸매를 뽐냈다. 그러다가 그녀는 계연과 이정춘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의혹에 찬 말투로 물었다.
“저기서 주무시는 두 분은 공자님들과 함께 오신 분이 아니신가요? 두 분 공자께서 소개해 주지 않으셔서요.”
이에 양호는 머리를 탁, 치더니 연신 사과했다.
“아, 제 탓이군요, 전부 제 실수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느라 월 낭자께 소개해드리는 걸 잊었습니다. 저쪽은 저희 집안의 하인인 이정춘이라 하고, 저쪽 분은 계 선생이십니다. 모두 잠이 든 듯하니 너무 크게 떠들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성이 계씨이고 성함이 선생인가요?”
이 여인의 이름은 월서(月徐)였다. 그녀는 양호의 설명이 너무 짧다고 느껴 다시 이렇게 캐물었다.
“아, 실은 저희도 계 선생님과 그리 잘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도중에 만난 분이라서요. 계 선생께서는 성만 알려주시고 성함은 밝히시지 않았습니다. 저희도 더 캐묻지 않았고요.”
“그렇습니다, 월 낭자. 양형이 비록 계 선생님과 함께 오긴 했으나, 도중에 만난 인연이라서요. 모두 날이 어두워진 뒤에도 머물 곳을 찾지 못해 이 강신 사당에 오게 된 것입니다.”
“아…….”
여인은 이렇게 대답한 뒤 더는 그 문제에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속으로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두 서생이 모두 마음에 들었고, 이들은 그리 힘들이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실내에는 그들 말고도 또 다른 두 사람이 있어 마음 편히 손쓸 수가 없었다.
‘술법을 써야 하나? 처음인데 꼭 이런 방법까지 써야 하나…….’
여인이 남몰래 고심하고 있을 때, 왕원명이 불에 노릇노릇 구워진 전병을 가져와 반 정도 뜯더니 그녀에게 건넸다.
“낭자, 좀 드시지요.”
“아, 감사합니다, 공자.”
왕원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웃더니, 모닥불 근처에 따로 깔린 건초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약 피곤하시거든 저쪽으로 가서 쉬시면 됩니다. 저를 비롯한 모두는 성현의 말씀을 따르는 군자로, 낭자가 홀로 있다고 하여, 해를 끼칠 이들이 아닙니다. 안심하고 쉬시지요.”
한쪽에서 먼저 목을 적신 뒤 물이 든 죽통을 여인에게 건네려던 양호는, 왕원명의 말을 듣더니 사레가 들려 물을 뿜었다.
“풉……! 켁켁…… 켁…….”
“양형, 어찌 그러시오? 괜찮으시오?”
“공자, 사레가 들린 모양이지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왕원명과 여인은 무척 관심 어린 태도로 이렇게 물었다. 그러더니 여인은 양호에게 다가와 그의 팔에 제 상체를 딱 붙이고 앉더니,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괜, 괜찮습니다, 켁켁…….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콜록, 콜록…….”
양호는 고마움을 표하며 연신 기침을 했다. 그러자 잠시 뒤 여인도 천천히 손을 거뒀다.
“보아하니 이제 좀 가라앉은 모양이네요. 계속 기침이 나온다면 목에 가래가 껴서 그럴 수도 있어요. 힘줘서 뱉어내면 괜찮아질 거예요.”
여인은 이렇게 말하며 양호의 곁을 떠나 원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양호는 그의 예민한 감각으로 여인의 태도가 변했음을 느꼈다. 떠나기 전의 동작이나 말에 담긴 조롱기로 보아 자신에게 냉담해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 낭자의 말씀대로 이제는 좀 가라앉았습니다. 켁켁…….”
기침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숨을 참다 보니 오히려 다시 기침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양호는 차마 여기서 가래를 뱉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