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화. 예상 밖의 전개 (2)
여인은 웃으며 왕원명을 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왕 공자, 조금 전에 책을 쓰신다고 하셨죠? 혹시 제게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예, 하지만 어디 내놓을 만큼 대단한 실력은 아닌지라, 보고 비웃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왕원명은 책궤를 뒤적이다가 책자를 하나 꺼내더니 여인에게 건넸다.
“낭자, 여기 있습니다.”
“네.”
여인은 서책을 뒤적이며 살펴보다가 왕원명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이렇게 말했다.
“공자, 여기 이 말이 무슨 뜻인가요, 아무리 읽어도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읽기만 해도 정말 무섭네요…….”
여인이 가까이 붙어 앉자 왕원명은 무의식적으로 엉덩이를 움직여 거리를 벌린 뒤 어색한 태도로 대답했다.
“아, 그건 지괴소설(*志怪小說: 위진남북조 시대에 흔했던 기괴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집)이라 확, 확실히 읽으면 좀 무섭기는 하지요. 여기 이 말은 사투리인데, 주로 제 고향에서 쓰는…….”
양호는 영문 모르는 얼굴로 멍하니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분위기가 괜찮았는데 어쩌다 자신이 이렇게 소외됐단 말인가?
계연은 양호에게서 멀지 않은 건초 위에 누워있었다. 그는 시종일관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실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계연은 살짝 실눈을 뜨고서 여인과 왕원명을 바라보았다.
이는 <야호수>라는 이야기가 스스로 수정 능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 양호가 실수한 것이었다. 계연이 보기에 저 월서라는 여인은 비록 ‘색(色)’을 목적으로 오긴 했지만, 그런데도 어떤 특별한 동경과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니 오직 ‘색’을 목적으로 온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직접 보니 계연은 저 여인이 <야호수> 속에 나오는 여우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이 법력을 이용해 만들어낸 세계라서가 아니라, 아마 원래 책 속의 이야기에도 넌지시 이 점을 드러냈을 것이다.
양호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자신에게 냉담해진 것을 보니 그 연유를 짐작하면서도 뻔뻔하게 다시 들이댈 생각은 하지 못했다. 또한 그렇게 했다가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날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양호는 억울한 심정을 누르며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뒤적였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아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남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어린놈이 운도 좋군!’
양호는 가슴이 답답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가서 바람을 쐴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리에 앉아 때때로 두 사람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거나 끼어들며 평온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렇게 해서 양호는 여인의 자신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식은 것을 확인하고는 마침내 운명을 받아들였다.
“하암, 후우……. 왕형, 월 낭자, 밤이 늦었으니 이제 조금 졸립군요. 두 분은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왕원명은 열이 오르기도 하고 긴장도 되었지만, 그보다는 흥분이 더 컸다. 그러니 어찌 잠이 오겠는가?
“양형, 먼저 자는 게 어떻겠소? 나는 아직 피곤하지 않아서 말이오. 월 낭자도 피곤하거든 어서 쉬시지요. 왕모는 아직 잠이 오지 않아서…….”
“저도 아직 잠이 오지 않네요, 양 공자 먼저 주무세요.”
여인은 양호를 향해 예의상 웃어 보였다. 그 웃음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먼저 쉬겠습니다. 두 분은 편한 대로 하시지요!”
양호는 이렇게 말한 뒤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던져 넣은 뒤, 한쪽에 놓인 건초 위에 누웠다.
양호가 자리에 누운 뒤, 여인은 내내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호의 호흡이 고르게 변하더니 얼굴이 편안히 풀어졌다. 정말로 잠이 든 것이었다.
‘정말 잠이 들었다고?’
그녀는 요괴였기 때문에 누가 진짜로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잠든 척하는 건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니 저 양 공자라는 자는 정말로 피곤했거나 느긋한 성격임이 분명했다.
‘뭐, 이렇게 되면 더 좋지!’
여인은 이렇게 생각하며 더욱 짙은 웃음을 지었다.
한편 자리에 누워있던 양호는 당연히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 그가 아무리 피곤하다고 해도, 이리 흥분된 상태에서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잠이 오겠는가. 이는 계연이 여인이 양호가 깨어있는 걸 알지 못하도록 손 쓴 결과였다.
음, 사실대로 말하자면 자리에 누운 세 사람 중 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떨결에 방귀를 뀌게 된 이정춘을 포함해서 말이다.
“삼 공자, 보아하니 여기까지가 끝일 듯하네요. 저희는 이만 가도 되겠네요. 오늘 밤 공자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계연의 목소리가 양호의 귓가에 전해지자 그는 심장이 덜컹하며 깜짝 놀랐다. 어찌 이렇게 끝이란 말인가? 설마 보지도 못한단 말인가?
계연은 양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이렇게 덧붙였다.
“여기 더 머무른다 해도, 듣는 게 다일 거예요.”
그러자 마치 계연의 말을 들은 것처럼, 저쪽에 앉아 있던 여인은 왕원명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하품하기 시작했다.
“공자, 저도 이제 좀 피곤한 것 같아요…….”
여인이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왕원명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몸을 피했다.
“아, 그, 저, 저기에 건초를 깔아두었습니다. 낭, 낭자께서 쉬고 싶으시거든 저기로 가시면 됩니다…….”
“그럼 공자는요? 자리가 딱 하나뿐이잖아요!”
왕원명은 여인을 직시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아직 잠이 오지 않아서요. 책을 좀 읽다가, 모닥불도 좀 더 지켜본 후에 졸리면 저쪽에 있는 건초를 깔면 됩니다. 여기 신상이 있었던 받침대가 사이에 있으니, 안심하고 주무십시오! 예, 예, 받침대가 사이에 있으니까요!”
모닥불은 받침대에서 반 장(丈) 떨어진 곳에 있었고, 계연, 이정춘, 양호 세 사람은 문을 마주 보는 위치의 오른쪽에 누워 자고 있었다. 여인이 누울 자리는 그들과 받침대를 사이에 두고 왼쪽에 있었다.
“알겠어요, 공자도 너무 늦지 않게 쉬세요. 저는 그럼 먼저 자리에 들도록 할게요!”
여인은 고분고분 대답하고는 한쪽에 놓인 건초 위로 올라 신을 벗은 뒤 천천히 자리에 누웠다. 그녀가 자리에 눕자 왕원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이를 본 양호는 미심쩍게 여기며 생각했다.
‘저러고도 기루에서 수업을 했었다는 말인가? 조금 전에 늘어놓은 이야기가 혹 거짓말이 아닐까?’
“왕 공자…….”
그 목소리에 왕원명은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여인이 입을 가린 채 수줍게 웃고 있었다.
“공자……. 혼자 자려니 좀 무섭네요…….”
실제 <야호수>에는 이런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양호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이제 와 후회스럽기도 하여 제 허벅지를 찰싹 때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양호의 실책이니 계연도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날 밤은 양호에게 있어 더욱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는 별소리도 듣지 못했고, 기껏해야 숨소리를 조금 들은 게 다였다. 왕 서생은 결국에는 인내심이 그리 강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정춘은 천자를 지척에서 모시는 대태감인 만큼, 남녀가 함께 침상에서 구르는 소리를 천자를 모실 때 수도 없이 들었었다. 이에 그는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없었다. 물론, 그에 반응할 능력이 없기도 했다.
반면 계연도 이 일이 무척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는 지난 생 올바른 삼관(*三觀: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식색성야(*食色性也: 식욕과 성욕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닌 고유한 본성이라는 뜻으로, <맹자(孟子)>의 한 구절)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는 성인용 잡지나 영화를 본 적도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 그의 뛰어난 감각으로 그 모든 선정적인 화면을 생생히 겪고도 아무런 잡념도 일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마음에 어떤 뚜렷한 파란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는 그의 몸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심신(心神)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간에 사소한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다. 계연의 품 안에 있던 비단 주머니가 꿈틀거리더니 그 안에서 종이학이 쏙 몸을 빼낸 것이다. 그러나 종이학이 막 날아오르려던 순간, 계연의 손바닥에 의해 바닥에서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긴 밤이 지나고, 신당 안은 어느새 완전히 고요해졌다. 왕원명, 양호, 이정춘 세 사람은 일찍이 잠이 든 상태였다.
계연도 이정춘을 등지고 누운 채 깊은 잠에 빠진 듯 보였다. 그때 헐벗은 다리 한 쌍이 계연 가까이 걸어와 멈춰 서더니, 여인이 무릎을 안은 채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아마 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듯했다.
한참 망설이던 여인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계연을 만지려 했다. 바로 그때, 밖으로 꺼내놓은 계연의 손목에서 금빛이 번쩍 빛났다.
솨앗-!
“아앗……!”
여인은 깜짝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하지만 그 외에 따로 해를 입지는 않았다. 계연의 손목에는 기다란 금사(金絲)가 여러 번 감겨 있었는데, 그 위에는 무슨 글자가 조각된 옥패가 하나 달려 있었다. 아마 어디선가 얻어온 호신부인 듯했다.
“휴…….”
여인이 가볍게 탄식하며 한쪽을 향해 손짓하자 그녀의 옷이 날아왔다. 순식간에 옷을 갖춰 입고 예전의 맑고 아리따운 자태로 돌아온 여인은 가볍게 문을 밀어 열었다. 그러자 어쩐 일인지 신당의 대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왕원명이 맨발을 드러내고 누운 곳을 슬쩍 보더니, 다시 계연에게 한번 시선을 던진 뒤 신당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문이 가볍게 닫히며 마찬가지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해가 밝아오자 네 사람은 모두 잠에서 깼다. 왕원명이 나체로 옷을 이불 삼아 자는 것을 본 양호가 그를 놀려댔고, 왕원명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계연에게는 양호의 웃음에 얼마간 질투가 묻어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곧이어 왕원명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친근하게 굴었다.
계연은 원래 술법을 완전히 물려 버릴 수도 있었으나, 그들은 이미 왕원명에게 한 끼 대접하기로 약속했던 터라 성안에서 3일을 더 머물렀다. 그들은 객잔의 상방에 머무르며 성안의 주루에서 풍성한 만찬을 즐겼고, 헤어지기 전 왕원명에게 노잣돈을 조금 주었다.
넷째 날 아침, 네 사람은 성밖에 서서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왕원명은 어느새 오랜 지기처럼 깊은 교분을 쌓게 된 양호와 아쉬워하며 인사했다.
“왕형, 오늘 헤어지면 언제 또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소. 부디 몸조심하시오.”
“양형도 마찬가지요. 천하가 비록 크다고는 하나 연이 닿으면 언젠가 또 만나게 되어 있다오. 다행히 이제 조정에는 정양(*正陽: 해가 높이 떠 따뜻한 기운이 가득한 때를 이름)의 기운을 지닌 새 황제께서 정무를 맡고 있어, 다시 과거제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하오. 어쩌면 후에 과거 시험장에서 만날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럼, 이 관사, 그리고 계 선생님, 두 분도 모두 몸조심하십시오.”
왕원명은 세 사람이 함께 길을 떠나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일일이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정춘은 그에게 양손을 맞잡으며 화답했고, 계연도 마찬가지 그에게 양손을 맞잡고 예를 취한 뒤 대답했다.
“몸조심하세요.”
양호를 포함한 세 사람은 성 밖 어느 방향으로 향했고, 왕원명은 책궤를 등에 지고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그렇게 걷다가 양호와 이정춘은 주위 사물의 색깔이 점차 퇴색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빛이 눈을 찌를 정도로 점점 환해지자 두 사람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