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8화. 선법이 이토록 오묘하니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두 사람은 어느새 어서방에 돌아와 있었다. 양호와 계연은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연탑에 앉아있었고, 이정춘은 그들과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이 얼떨떨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니, 떠나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계 선생님, 저희가 떠난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습니까?”
양호가 이렇게 묻자, 계연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반문했다.
“폐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양호는 책에 올려놓은 계연의 손을 잠시 보다가, 다시 탁자 위 찻잔 두 개를 바라보았다. 찻물에서는 아직도 김이 나고 있었다.
“설마, 저희는 애초에 떠난 적이 없었던 겁니까? 그 모두가 꿈이었단 말입니까? 하지만 모든 게 너무나 생생했는데…….”
이정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양호의 말에 열렬히 찬성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실제 일어났던 일인지, 아니면 꿈이었는지 전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계연은 <야호수>에서 손을 거두고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폐하, 일전에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진실입니까?”
말을 마친 계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양호는 내내 멍한 얼굴로 앉아있다가, 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이대로 떠나십니까, 선생님?”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돌려 양호를 바라보았다.
“폐하의 다른 두 가지 염원은 제가 도울 수 없는 것들이고, 세 번째는 방금 제가 그것을 이뤄드렸지요. 그러니 더는 여기 남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양호는 머리를 재빨리 굴리다가 곧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이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고(孤)는 선생님께 산해진미를 대접해드리겠다고 약속드렸습니다!”
그 말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이미 받은 걸로 칠게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계연은 소매를 떨치고 뒷짐을 진 채 어서방을 나섰다. 그러자 양호와 이정춘도 얼른 그를 뒤따라 나갔다.
“선생님, 선생님! <야호수> 안에서 식사를 대접한 것은 무효로 치셔야 합니다!”
양호가 소리치며 쫓아 나왔으나, 밖에는 어서방을 지키는 시위만 서 있을 뿐 계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너희들, 계 선생님이 나오는 걸 보았느냐?”
황제가 시위들을 향해 묻자, 그들은 서로 멀뚱멀뚱 눈짓을 교환하더니 그중 하나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이 안에서 누가 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양호는 문가에 서 있다가 태감 이정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정춘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휴우…….”
양호는 깊이 탄식한 뒤 어서방 안으로 돌아갔다.
* * *
한편, 황궁 밖에서는 계연이 유유자적 잘 정돈된 도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오른손을 펼쳐보니, 손바닥에는 금, 은덩이와 동전이 나타나 있었다.
금과 은덩이는 양호가 이정춘에게 명해 쓴 것이고, 동전은 계연이 찻값으로 낸 것이었다. 하지만 계연이 이 동전을 냈을 때는 분명 두 닢의 원덕 통보와 1문(文)짜리 동전 네 닢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동전은 총 14닢으로, 위에는 ‘정양(正陽) 통보’라고 찍혀 있었다.
계연이 펼친 묘법(妙法)은 심신과 법력의 소모가 크지만, 실제로는 손가락 한번 튕기는 순간일 뿐이었다. 그곳은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는 아니었지만, 계연의 법력에 의해 펼쳐졌을 때는 나름의 운행 법칙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하하, 정말 재미있군!”
계연은 손안의 재화를 소매 안으로 잘 갈무리한 후, 동전 하나를 남겨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웠다. 그런 뒤 자신이 걸어온 방향으로 동전을 날린 뒤,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원래 계연은 아무 말 없이 떠나려 했지만, 이 동전을 보니 어쩐 일인지 마음에 변화가 일어 동전을 남긴 것이었다. 그는 미소 지으며 성큼성큼 떠나갔는데, 이번에는 윤재성의 저택이나 어느 사당으로 향할 생각은 없었다.
한편 계연이 던진 동전은 흐르는 듯한 황동색의 빛으로 변해, 하늘을 날아 황궁으로 들어간 뒤 다시 소리 없이 어서방으로 향했다. 그것은 마침내 어서방 연탑의 탁자 위에 놓인 <야호수> 위에 내려앉았다.
양호는 약간 의기소침한 기색으로 어서방으로 돌아왔다. 원래 그는 연탑에 앉을 생각이었으나, 서책 위에 동전이 있는 것을 보고 덥석 집어 들었다.
“이정춘! 이정춘!”
“소인, 여기 있습니다!”
황제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이정춘은 헐레벌떡 안으로 들어왔다. 양호의 목소리에서는 그가 느낀 흥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는 동전을 꼭 쥔 채 이렇게 말했다.
“이건 정양 통보야, 정양 통보라고!”
“정양 통보라고요!”
황제의 말에 이정춘도 퍼뜩 생각이 났다. 지난 3일 중 언젠가, 왕원명이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원래는 사직이 엉망이 되고 민생이 파탄 났었는데, 다행히 정양(正陽)의 기운을 지닌 새 황제께서 온갖 더러운 것을 씻어냈다고 말이다. 그래서 황제의 제호(帝號)도 정양제였다.
이를 떠올린 이정춘은 얼른 자신의 돈주머니를 끌러서 안을 뒤졌다. 그 세계에서 돈을 꽤 썼으므로 당연히 거스름돈도 적지 않게 받았었다. 분명 그때 받은 동전이 많이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안에는 아무런 동전도 없었다.
“폐하, 돈은 거기서 쓴 금은의 양만큼 사라졌지만, 동전은 없습니다…….”
하지만 양호는 전혀 개의치 않고서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정양 통보라, 좋구나, 좋아.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실제인가? 이게 바로 꿈이고 실제이지! 왜 모든 이들이 신선이 되고 싶어 하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하하하하…….”
홍무제는 큰소리로 웃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야호수>를 손에 쥐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선법이 이토록 오묘한데, 황권이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가. 무슨 의미가…….”
양호는 이렇게 말하며 책을 열어 동전을 그 안에 끼웠다. 마침 삽화가 실린 그 장이었다. 이에 그는 저도 모르게 그림을 다시 눈에 담고는 책을 닫았다. 그림 안에는, 왕원명이 다리를 쭉 뻗은 채로 땅바닥에 앉아있었고, 여우 요괴인 월서는 서생의 몸 위에 걸터앉아 반나체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양호는 긴 한숨을 내쉰 뒤, 책을 가지고 돌아와 어안 앞에 앉았다. 그가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보고서 이정춘은 감히 방해하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는 아직도 마음속으로 놀라움을 느끼는 상태였는데, 보아하니 황상께서는 이미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이정춘은 어서방 바깥에 서서 문밖에 펼쳐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일이 사서에 기록이 될까? 어쩌면 야사(野史)에는 남을지도 모르지…….’
* * *
윤씨 일가의 재기와 조정 관원들의 변동, 황권의 교체와 같은 속세의 큰일은 이때 계연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이번 여정 중 가장 의미 있던 것은 그가 <유몽>을 완성했다는 점에 있었다.
<유몽>이 완성되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계연도 기량에 큰 진보를 이루게 되었다. 물론, 단순히 법력의 강함과 살상력에 있어서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계연이 보기에, 이는 그의 수행길에 있어서 정말로 큰 진전이었다.
유몽술 그 자체는 물론이고, 유몽술과 천지화생이 결합된 운용 방식, 심지어 이 두 가지를 바탕으로 하여 이끌어낸 계연만의 변화술은 그가 직접 검증했다시피 모두 독특한 현묘함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오직 그만이 이런 술법을 부릴 수 있을 것이고, 이는 선도(仙道) 전체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을 정도로 가치 있는 술법이었다. 이는 계연이 자아도취에 빠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감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계연에게는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서 자연히 기분이 좋아진 계연은 걸음걸이도 경쾌해졌다. 그러자 분명 아무런 술법도 펼치지 않았는데, 도성을 떠나 걷는 길에 맑은 바람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곧바로 통천강으로 향하더니 잠자리가 수면 위에 내려앉듯이 강물을 밟았다. 그러자 사방에 튄 물보라가 안개로 변했고, 계연은 그 운무(雲霧)를 밟고서 하늘 높이 솟구쳤다.
공중에 떠오른 계연은 두 눈을 감고서 얼굴을 훑고 지나는 맑은 바람을 느꼈다. 그러고는 검지를 뻗어 감각에 따라 검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넝쿨검이 계연의 눈앞으로 날아오더니, 검지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춤을 추기 시작했다. 넝쿨검의 칼자루는 때때로 그의 손가락에 닿기도 했다. 비록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계연과 선검은 정신적으로 연결된 듯 천천히 검세(劍勢)를 펼치며 초식을 밟아나갔다.
구름을 타고 날면서 계연은 둔술(*遁術: 다른 물질의 도움을 빌려 숨거나 도망치는 술법. 주로 오행(五行: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의 힘을 빌림)을 펼치지는 않았지만, 속도는 그에 비해도 결코 느리지 않았다. 다만 계연은 직선으로 비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검세의 변화에 따라 목적지가 없는 듯이 날고 있었다. 백 리(里)는 동쪽으로 갔다가, 다음 백 리(里)는 북쪽으로 갔다가 하는 식이었다. 때때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움직이기도 했다.
계연은 이미 아주 오랫동안 속세의 무인들이 쓰는 초식을 따라 검을 움직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그것을 잊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가 배운 검술의 핵심은 모두 용의 검세(游龍劍勢)에 담겨 있었고, 그것은 특별히 따라야 할 동작이 있지는 않았다. 그렇게 자유로이 움직이다 보니 계연의 검세에는 어느새 유몽(游夢)의 뜻이 담기기 시작했다. 이에 검세는 더욱 자유로워졌고 그 변화도 종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한참 뒤, 계연은 검세를 거두어들이고는 검무(劍舞)를 마치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넝쿨검은 다시 계연의 등 뒤로 돌아왔고, 계연은 크게 소매를 떨친 뒤 상공에 호쾌한 웃음소리를 남기며 동북쪽으로 날아갔다. 그가 고개를 돌려 경기부 방향을 바라보자, 설령 계연의 시력에 문제가 없다고 해도 이 거리에서는 도시의 윤곽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양호와 이정춘과 함께 <야호수> 속 세계를 유람했던 기억은 그에게도 잊을 수 없는 즐거움으로 남았다.
‘흠, 그 성질 나쁜 소는 요즘 무얼 하고 있으려나? 연비와는 헤어졌을까?’
우패천의 성미는 정말로 거칠다고 할 수 있었으나, 사실 계연은 그가 거칠면서도 섬세한 면을 지닌 대단한 요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계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요괴는 많았으나, 진정으로 그의 눈에 드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원래부터 대단한 실력을 지닌 요괴들을 제외하면, 남은 이들은 정말로 몇 없었다. 제자인 육 산군이 그중 하나였고, 우패천도 이에 속했으며, 오숭도 그럭저럭 쳐줄 수 있었다.
이왕 이런 생각이 떠올랐으니 계연도 가서 한번 만나고 싶어졌다. 게다가 예전에 고천명에게 천수호에 한번 방문하겠다고 약속한 적도 있었으니, 이참에 한 번 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만약 위씨 집안에 별다른 일이 없다면 다시 한번 <운중유몽>을 빌려 보고 싶었다.
계연은 이런 생각을 하며 그들을 차례로 방문할 계획을 세웠지만, 방향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는 일단 영안현으로 돌아가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깊은 잠을 자고 싶었다. 이를 이용해 그동안 자신이 깨달은 것들을 공고히 다지고, 깨어난 후에는 따로 영안현 성황신에게 전할 말도 있었다.
게다가 계연은 계속 그 아삭한 대추 맛이 떠올랐다. 물론 때는 아직 한여름이었으니, 아직 대추가 익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계연은 거안소각의 대추나무에는 이미 풍성한 대추가 달려, 자신이 따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