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9화. 조용하고도 떠들썩한
계연이 길을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영안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는 이번에 오래 집에 머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대문의 자물쇠를 열지 않고 곧바로 맑은 바람을 몰고 구름을 밟은 채로 거안소각의 뜰에 내려섰다.
휘이이-!
계연을 따라온 바람이 뜰 안을 배회하더니 대추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솨아아아…… 솨아아아……!
그러자 대추나무 가지 전체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대추나무도 계연이 돌아온 것을 보고 무척 기뻐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파리 사이로 대추가 가득 열린 것이 보였다.
81개의 특수한 화조(*火棗: 불타는 듯 붉은 대추. 전설 속의 선과(仙果)로 특별한 효능이 있다고 함)를 제외하고, 다른 대추는 모두 올해 새로 맺힌 열매였다. 마치 대추나무가 올해 계연이 돌아올 것을 미리 알고, 일찍이 열매를 맺은 듯했다.
계연은 뜰 안의 돌 탁자에 앉아 한가로이 바람을 즐겼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가지를 흔드는 대추나무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새로 열린 대추를 반만 내주렴.”
그 말과 동시에, 대추나무 가지가 이리저리 요동치더니 푸른 대추 열매가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대추는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그러다 맑은 바람이 불어와 그중 반이 계연의 소매 안으로 들어갔고, 남은 반은 돌 탁자 위에 작은 산처럼 쌓였다.
계연은 커다란 대추를 한 알 집어 입에 넣었다.
신선하고 즙 많은 과육을 씹자 아삭, 경쾌한 소리가 났다. 맛있는 것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거안소각의 대추는 언제나 계연의 마음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계연은 대추 한 알을 먹고는 연달아 일고여덟 개를 더 집어 먹었다. 그런 뒤 탁자 위에 남은 것을 소매 안에 넣고는, 방문에 걸린 자물쇠를 열어 잠을 청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계연이 방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작은 글자들이 소리 없이 문과 창문 틈새로 빠져나왔다. 글자들은 뜰 안에서 진(陣)을 결성하기 시작했고, 종이학도 그들을 따라 문틈으로 빠져나왔다. 종이학은 대추나무의 가지 위에 자리 잡았는데, 이 나뭇가지는 종이학이 애용하는 관전석이었다.
어르신이 주무시고 계시기 때문에, 평소 입을 가만히 놀리지 않던 글자들은 모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만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그들은 글자였기 때문에 각자의 생각을 죄 털어놓고 싶은 욕망이 본래부터 강했다. 하지만 어르신께서 방 안에서 주무시니, 그들은 그 강렬한 욕구를 진을 결성하는 데 쏟아부었다.
글자들은 자기들끼리 무수한 훈련을 해왔고, 글자들이 오랫동안 계연을 따르며 듣고 본 것도 있었다. 계연만의 독특한 연서법(*衍書法: 글로 써서 술법을 추론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일반적인 수행의 경지로 글자들의 실력을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글자들의 도행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발전해 있었다.
그렇게 총 세 가지 진이 결성되었다.
한쪽에 있던 수십 개의 글자들은 순식간에 ‘어(御)’ 자를 형성했다.
솨아-!
뒤이어 거안소각 뜰 안의 공기가 회오리치더니, 흙먼지와 돌가루가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라 각기 칼, 창, 검, 극(*戟: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창)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한쪽에 있던 수십 개의 글자도 각자 뭉치며 금(禁), 중(重), 극(克), 수(守) 등의 글자를 이루었다. 동시에 주위의 공기가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낙엽과 나뭇가지가 공중으로 떠올라 병풍처럼 이들을 보호했다. 그러자 맞은편에 무기의 형상을 한 것들이 우수수 땅에 떨어져 흩어지거나 스스로 공격을 철회했다.
다른 한 무리의 글자들은 대추나무의 한쪽 가지 근처에 모여, 싸움이 벌어지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다 함께 정(*靜: 고요하다)자를 만들어냈다. 글자가 떠오르자 공기 중에 수면처럼 파문이 이는 듯하더니 얇은 막이 대추나무와 ‘전쟁’이 벌어지는 거안소각의 뜰을 감쌌다.
막이 덧씌워지자, 작은 글자들이 애써 참고 있었던 ‘전쟁의 불길’이 치솟았다.
“죽여라!”
“죽여!”
“전부 없애버려!”
“다들 힘내, 이번엔 반드시 이겨야 해!”
“덤벼라!”
“너흰 이제 졌어. 지난번에 썼던 방법은 이제 통하지 않아!”
“너희가 지겠지, 우린 새로운 전술을 떠올렸거든!”
“와아아아!”
“으아아아!”
곧이어 글자들이 만들어낸 형상들이 모두 한 데 뒤엉켰다. 그것들은 모두 흙먼지나 나뭇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정말로 금속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계연은 겉옷을 벗고 편히 누워있었지만, 뜰 안에서 작은 글자들이 분명 소동을 벌이고 있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수단을 써서 이 소란이 바깥에 들리지 않게 만든 것을 보니, 점점 더 실력이 늘고 있는 듯했다. 싸우고 소란을 떨수록 더욱 빨리 실력이 늘 테니, 계연도 가만히 놔두기로 했다.
계연은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자는 보통의 늦잠이 아니라, 한 달이 지난 후에도 잠에 빠져 있었다. 영안현의 백성들은 여전히 생계를 꾸리느라 바삐 움직였고, 손기 노점은 언제나처럼 일찍 열고 늦게 문을 닫았다. 가끔은 천우방에 사는 아이들이 저들끼리 뛰어놀다 거안소각 가까이 오기도 했는데, 그들은 멀찍이서 가지 한가득 열린 대추 열매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갔다.
계연이 잠들어 있는 동안 거안소각 자체는 고요했지만, 뜰 안은 그렇지 않았다. 작은 글자들은 휴식을 취할 생각도 없는 듯이 매일같이 서로 온 힘을 다해 힘을 겨뤘다. 그 모습은 불꽃이 튀고 기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떠들썩했다.
* * *
완연한 가을이 된 거안소각에서는 계연이 마침내 3개월에 이르는 깊은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는 눈을 뜨고 몸을 세우고 앉아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뚜둑- 뚜둑-!
몸을 움직이며 관절이 요란한 소리를 내자 계연도 마침내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그가 침상 근처에 놓인 넝쿨검을 보고는 다시 뜰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글자들은 아직도 소란을 떨고 있었다.
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뜰 안의 글자들은 모두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르신이 깨셨다!”
“잠시 전투 중지!”
“모두 멈춰! 어르신께서 깨어나셨어!”
그러자 순식간에 뜰 안에서 벌어지던 ‘전투’가 완전히 잠잠해졌다. 글자들은 편을 갈라 만들던 진법도 깨뜨려 버렸다. 계연이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오자, 뜰 안은 어느새 완전히 평화로운 모습을 회복한 상태였다.
뜰 안의 나뭇가지는 바람을 따라 가볍게 움직였고, 한창 싸움에 몰두하던 글자들은 대추나무 주위에 떠 있었다. 그들은 계연이 나오자 큰소리로 인사했다.
“어르신, 좋은 아침이에요!”
“어르신, 안녕하셨어요!”
“어르신, 잘 주무셨나요?”
…….
“그래, 다들 착하구나!”
계연은 웃으며 칭찬한 뒤 사방을 둘러보았다. 비록 글자들이 법력을 쓰고 남긴 기운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계연의 법안에는 땅바닥에 옅게 남은 문자의 흔적이 보였다. ‘어(御)’ 자도 있었고 ‘수(守)’ 자도 보였다.
뜰 한쪽을 독점하고 있는 글자도 있었지만, 겹겹이 뭉쳐 있는 글자도 있었다. 그것은 마치 조금 전의 전투가 남긴 그림자처럼 흙바닥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저희 모두 착하죠!”
“맞아요, 저희는 모두 말을 잘 듣는다고요!”
“저흰 시끄럽게 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어르신도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으셨잖아.”
“그러고 보니 정말이네!”
“어쨌든 우리 모두 착하게 굴었어!”
한바탕 소란이 지나고 나자 계연은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검의첩>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떠들썩하게 놀았으니 피곤하겠구나. 모두 들어가 쉬렴.”
비록 명확하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글자들의 먹 색깔이 빛을 잃고 어두워진 걸 보니 그간 아주 떠들썩하게 논 것 같았다. 그들은 각자 알아서 수련을 닦고 있었지만, 서로 싸우고 노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계연이 나서서 통제하지 않으면, 그들이 흡수한 영기와 해와 달의 힘이 충분히 쌓이기도 전에 노느라 전부 소모될 것이다. 게다가 그간 먹물을 흡수하지도 못했으니 분명 피곤할 터였다.
계연의 말이 떨어지자 글자들은 모두 고분고분 <검의첩>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순서에 따라 착착 본인의 자리에 자리 잡자 뜰 안이 마침내 조용해졌다. 그러자 <검의첩>은 마치 보통의 서첩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서첩은 글자들의 집이자, 그들이 쉬고 잠들 수 있는 휴식 공간이었다.
한편 대추나무 위에 앉아있던 종이학은 구경거리가 사라지자, 쪼르르 날아와 계연의 어깨 위에 앉았다. 종이학은 그렇게 가만히 앉아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뜰 안에 잠시 앉아 있던 계연은 주방을 흘끗 보더니, 물을 끓이려는 생각을 포기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성황당이 있는 방향을 보며 말했다.
“성황신을 만나러 가자.”
* * *
반 시진 뒤, 영안현 저승에서는 계연과 송 성황신이 함께 성황대전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의자가 하나뿐이었는데, 계연이 왔다는 말에 저승에서 특별히 의자를 하나 더 갖다 놓은 것이었다. 대전 안에는 성황신과 계연 말고도 저승의 각 기관장이 모두 모여 있었다.
계연은 그들에게 자신이 백약을 데리러 가서 보았던 것과 몰래 손을 쓴 일을 얘기해 주었다.
“계 선생님의 뜻은, 이번 생에 무언가 얽매인 것이 있으면, 그 귀신의 혼백이 천지로 흩어지더라도 내세가 있을 수 있단 말씀입니까?”
영안현 성황신의 도행은 큰 도시의 대성황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그는 계연도 인정할 정도로 무척 지혜롭고 총명한 인물이었다. 이때도 계연의 말을 듣고서 그가 제일 먼저 계연이 말하고자 하는 관건을 짚어냈다. 다른 저승의 귀신들은 인간과 요괴의 신기한 인연에 대해 경탄하고 있었다.
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 성황신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비록 다른 요소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는 분명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일 것이라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혼백이 흩어지는 순간에는 천혼(天魂)과 지혼(地魂) 두 가지 모두 즉시 사라져야 하죠. 하지만 주염생의 지혼이 흩어진 후에도 천혼은 십여 초간 공중을 배회했습니다. 무척 신기한 일이지요.”
그러자 한쪽에 앉은 무판관이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그럼 선생께서 백 부인의 눈물방울을 천혼을 향해 던진 것도 바로 그 가능성을 보고자 함이시군요.”
벌악사 기관장도 그의 말을 받아 이렇게 말했다.
“인간 본성의 악함은 중대한 위기에 닥치면 가감 없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런 때에도 선함이 드러난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선(*至善: 공자의 가르침을 담은 경서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로, 최상의 선, 선악을 초월한 본연의 선을 이름)이라 할 수 있지요.
본관이 벌악사에서 쌓은 경험으로 볼 때, 사람 사이의 연정(戀情) 또한 일종의 선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눈물방울을 이용하면 확실히 이 추측을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인간의 악은 중대한 몸부림과 마주할 때 의심할 여지 없이 나타나지만, 이때 더 많은 선을 보인다면 그것은 반드시 지선일 것이며, 본관이 여러 해 동안 악을 벌한 경험으로 볼 때, 연정도 선이며, 그 눈물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