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0화. 차별 대우
꽈아악……!
육산군이 아무리 오래 수행을 닦았다 해도, 이쯤 되자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걸 자제할 수가 없었다. 만약 계연이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우패천과 한판 붙었을 것이다.
육산군과 우패천이 나누는 대화와 그들의 행동을 보며 계연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육산군의 평정을 이렇게 빨리 깨트릴 정도의 존재나 사건은 많지 않았다. 이토록 가볍게 이 일을 해낼 수 있는 자는 아마 우패천뿐이리라.
육산군이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하자, 우패천은 이쯤 돼서 그만두어야 한다는 걸 깨닫고는 대추를 전부 쓸어 담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계연에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귀한 대추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참. 그리고 황금 열 냥은…….”
그러자 계연이 눈썹을 한번 찡그리더니, 다시 담담한 표정으로 소매에서 황금 한 덩이를 더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렸다. 우패천은 헤헤 웃으며 그것을 가져가더니 힘껏 쥐어보기도 하고 다시 요력을 사용해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그러고는 계연과 육산군이 자신을 보는 걸 느끼고 얼른 해명했다.
“아하하, 저 뭐냐, 계 선생님. 이건 전부 제가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입니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변화술이나 장안법, 환술 같은 갖가지 골치 아픈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제가 일전에 한번 그것 때문에 큰 손해를 본 적이 있어, 습관이 된 것일 뿐입니다…….”
우패천이 이렇게 설명하자 계연도 즉시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예전에 여우 요괴에게 속아 당신의 법체(法體)가 상했던 일 말이지요?”
“예, 예. 기억하시는군요. 바로 그 일 때문입니다. 그때는 제가 환술에 당해 그 요괴의 정체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수행을 닦으면서 내내 그 점을 보완하려고 힘썼습니다.”
계연은 살짝 눈썹을 찡그린 채 생각했다. 그때 그 여우 요괴는 자신을 알고 있었으니, 아마 도사연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혹시 그 요괴가 우패천의 정체도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럼 그 여우 요괴가 다시 당신을 만나면 바로 알아보겠군요?”
그러자 우패천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혹 제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그 빌어먹을 여우와 연관이 있습니까?”
“음, 어쩌면 만날 수도 있어요. 여우 요괴도 한 마리가 아닐 거고요.”
계연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어차피 이런 일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의 대답에 우패천은 눈썹을 찡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계 선생님, 그 여우는 아마 저를 알지 못할 겁니다. 그 요괴는 그때 자신의 진신(眞身)이 아니라 화신(化身)을 썼고, 저도 괴이한 사술(邪術)에 걸려 요력의 태반을 잃은 데다 그로 인해 제 법체를 불러내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그 요괴는 한 번도 제 법체를 본 적이 없습니다. 화신의 영각(靈覺)에는 원래부터 한계가 있는 데다, 스스로의 의식을 빼낼 겨를도 없이 선생님께 당했으니까요. 게다가…… 기루처럼 돈이면 다 되는 곳에 갈 때 빼고, 누군가와 연이 닿아 따로 만나게 되면 저는 항상 좀 더 멋진 모습으로 변신한 후에 갔습니다. 그때도 그랬으니, 그 망할 요괴는 저를 알지 못할 겁니다.”
우패천이 이렇게 말하자 계연은 약간 안도했다.
“확실한가요?”
우패천은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보더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8, 9할은 모를 거라 확신합니다. 게다가 제 능력으로는, 설령 변수가 있다고 해도 얼마든지 대응할 수 있습니다.”
우패천은 자신이 이렇게 말하면 육산군에 옆에서 코웃음을 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에게서 한 마디 반박도 들려오지 않자, 그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이 육산군 앞에 놨던 대추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오, 산군 자네, 겉으로는 개의치 않는 척하면서 이렇게 쓱 가져가 버리다니. 참으로 점잖지 못하군!”
“우패천! 오늘 정말 죽고 싶은 게로구나!”
“크흠, 큼…….”
이대로 가다간 곧 싸움이 날 것 같아, 계연은 참다가 헛기침을 했다.
계연이 낸 소리에 육산군은 자신이 추태를 보였다는 걸 깨닫고, 심호흡하며 화를 억눌렀다. 우패천도 상황을 보고는 즉시 물러났다. 그러고는 조금 전에 나눴던 대화로 화제를 전환했다.
“계 선생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반드시 선생님을 도울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산군을 데려온 걸 보니 이 일은 그도 필요한 모양이군요. 저와 산군이 함께하면 더욱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이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 아닙니까? 선생님, 이제 솔직하게 말씀해주시지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우패천은 이렇게 물으며 계연의 곁에 앉아서 찻잔에 차를 따른 뒤, 술을 마시듯이 한입에 잔을 비워버렸다.
그러자 계연이 잠시 뜸을 들이다 물었다.
“천계맹이라고 들어본 적 있나요?”
그는 이미 같은 질문을 육산군에게 했었는데, 예상대로 육산군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었다. 어쨌든 육산군은 얼마 전까지 거의 ‘집돌이’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패천은 조금 다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패천은 그 이름을 듣고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로 곰곰이 생각하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이름이 꼭 선도(仙道)의 어떤 동맹처럼 들리는데요? 아니지, 선도의 단체였으면 선생님께서 저와 산군 같은 요괴에게 묻지 않으셨겠죠. 설마 요괴들의 동맹입니까?”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일부만 맞혔네요. 천계맹에는 요괴뿐만 아니라, 마도(魔道)를 비롯한 다른 삿된 존재들까지 포함되어 있어요. 흑몽영주와도 연관이 있고, 요왕(妖王)을 비롯하여 천요(天妖)까지 관련되어 있을 수 있어요.”
“어휴……. 천요도 있다고요?”
우패천이 놀라 숨을 들이쉬었다. 생각만 해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지만, 계 선생님이 방금 한 몇 마디만으로도 덜컥 겁이 났다. 과연 계 선생님께서도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요왕과 천요 사이에는 사실 절대적인 높고 낮음의 구분은 없었다. 혹은 천요는 수행에 중점을 둔 명칭이고, 요왕은 요괴 중에서 실력이 있는 자가 되기는 하나 지위를 나타내는 명칭이었다. 요족(妖族)들은 실력을 중시하기 때문에, 대부분 약육강식을 따랐다. 그러므로 요왕이라 불리는 이들은 자연히 한 무리의 요괴 중 실력이 대단한 이들이라 할 수 있었다.
천요는 도행이 높은 이를 일컫는 명칭이지만, 요족들 사이에서는 잘 쓰이지 않았다. 그저 정도(正道)를 닦는 수행자들이 그 요괴를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어 구미천호(九尾天狐)는 그가 펼치는 술법이 사술이 아니라면 천요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천요의 호칭을 받은 요괴들이 이를 특별히 신경 쓰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는 대단한 호칭이었으므로 싫어하는 자는 없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어요. 지난번에 당신을 공격한 여우는 옥호동천에서 온 게 분명해 보이거든요. 또 옥호동천에서 온 도사연이라는 팔미호가 있는데, 그 요괴는 천계맹과 관계가 있는 게 분명해요. 그렇다면 옥호동천의 구미천호가 이 일에 관련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죠.”
우패천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겸 다시 차를 한잔 따라 목을 축였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계연에게 물었다.
“그럼 그놈들이 대체 뭘 하려는 걸까요? 선생님은 저와 산군이 무얼 하길 원하십니까?”
그러자 계연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사실 그 천계맹이라는 곳에 대해 저도 잘 몰라요. 그놈들이 아주 꼭꼭 숨어있거든요. 최소한 그 연맹의 이름과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은 잘 숨긴 편이죠. 저는 두 사람이 저 대신 그들을 조사해주길 바랍니다. 가장 좋은 것은 친밀한 관계를 쌓아 그들의 목적을 알아내는 거죠. 특히 흑황에 관련해서요.”
우패천과 육산군은 그제야 계연도 천계맹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계연도 실은 이 기괴한 세력의 존재를 이제 막 주의하기 시작한 단계였다.
계연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자신이 그들을 맞닥뜨렸던 일을 하나씩 이야기해주었다. 도사연부터 시작해 정봉 나루터에서 만났던 복숭아 나뭇가지를 든 소년, 그리고 자신에게 ‘천계맹’이란 이름을 알려주었던 시요까지 말이다.
계연이 이야기를 마치자 우패천과 육산군은 각자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계연의 생각은 무척 간단했다. 시구가 다시 찾아와 무슨 정보를 주길 기다리느니, 주동적으로 우패천과 육산군을 여러 선도의 나루터로 보내어 각자 조사를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이들은 수행을 닦는 요괴이자 드물게도 마음이 깨끗한 이들이었으므로, 요족 중에서도 비교적 특별한 존재로 감각이 무척 예민했다. 물론 천계맹에 속한 것으로 의심되는 존재를 만나면 어찌 대응할지는 이들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한편 주방에서는 향긋한 요리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뒤이어 조금 전의 부인이 주방 쪽에서 나타나 이렇게 알려왔다.
“우 대협, 두 분 선생님, 식사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안에서 드시겠어요, 아니면 뜰에서 드시겠어요?”
우패천이 잠시 생각을 끊고 계연을 향해 물었다.
“선생님, 여기서 드실까요?”
“그러죠.”
계연이 응하자 우패천이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여기서 먹겠소.”
“예!”
부부가 준비한 식사는 무척 풍성했다. 신선한 채소 요리 세 접시에 닭 세 마리를 통째로 요리한 백참계(*白斬鷄: 닭을 통째로 물에 끓여 양념에 찍어 먹는 요리)를 두 접시에 나눠 담고, 주방의 물 항아리에서 기르던 생선으로 홍소어(*紅燒魚: 간장 등을 넣고 빨갛게 졸여 만든 생선 요리)를 만들어 올렸다. 이들은 걸상 하나를 가져왔고, 두 부부까지 포함해 총 다섯 명이 탁자에 둘러앉아서 한 솥 가득 지은 쌀밥과 술 한 주전자를 곁들여 모두 만족스럽게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부부는 계연과 육산군을 위해 각각 방 하나씩을 깨끗이 정리해 내어주었다. 식사를 하며 이 두 선생이 이곳에 얼마간 머무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연 대협이 돌아올 때까지는 여기 머물 듯했다.
계연과 육산군의 접대를 끝낸 우패천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곧바로 떠났다. 낙경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대추를 한 알 꺼내 손에 쥐었다.
‘한 알은 돈으로 바꿀까? 하지만 이 대추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하지만 이번에는 산군과 함께 길을 떠날 테니, 많은 낭자를 만나게 되겠지?’
“그것도 괜찮겠군…… 아, 물론 선생님께서 분부하신 일부터 해야지. 헤헤헤……. 유유(柔柔)야, 내가 간다!”
우패천은 품 안에 있는 금 두 덩이를 만지작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육산군은 우패천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다 다시 계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존, 우패천 저놈은 조금 전까지는 근심하던 기색이더니, 문을 나서자마자 저렇게 얼굴이 확 피는군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요.”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낙경성 기루 골목에서는 유명인이니까. 기루 주인이나 포주들은 모두 그를 귀빈으로 모시니, 무슨 좋은 소식이 있으면 가장 먼저 그에게 알리겠지. 우패천의 말에 따르자면, 그게 바로 사내로서의 복을 누리는 것일 테니 저렇게 기뻐하는 게 당연하지.”
계연은 이렇게 대답하며 육산군을 향해 물었다.
“대추는 다 먹었니? 좀 더 주마. 하나로 어디 맛이나 제대로 보겠느냐. 가자,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아까 여기 오는 길에 했던 이야기가 아직 안 끝났으니까.”
그러자 정신이 번쩍 든 육산군은 얼른 계연의 뒤를 따라 뜰의 돌탁자 앞에 앉았다. 어떤 일들은 장원에 머무는 부부가 들으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계연은 술법을 부려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다음 순간, 육산군은 탁자 위에 작은 산처럼 쌓인 대추 더미를 바라보았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백 개는 가볍게 넘을 듯했다. 만약 우패천이 이를 봤다면 분명 차별 대우라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