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621화 (621/892)

621화. 연비가 찾아오다

그때, 낙경성에서 백 리 정도 떨어진 대동구(大同丘)에서는 연비가 검에 묻은 피를 탈탈 털어낸 뒤 다시 검집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50이 가까워진 나이가 되어, 그의 얼굴에는 그간의 세월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는 손바닥 길이 정도의 잘 관리된 수염을 기른 모습이었는데, 이때 그의 머리카락은 바람을 맞아 자유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의 앞뒤로 뻗어나간 산길 위로 적지 않은 시체들과 놀라 멍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보였다.

댕그랑-!

툭! 투둑!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손에 든 무기를 떨어뜨리고서 덜덜 떨었다. 그들은 너무나 겁에 질린 나머지 목숨을 구걸하는 말조차 내뱉을 수가 없었다.

반면 한쪽에 서 있던 몇 대의 우차와 마차에서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저마다 연비를 향해 감격한 얼굴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대협, 정말 감사합니다! 대협께서 저희를 살리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협, 왜 아직도 저놈들의 목을 붙여두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대협. 저 비적들은 온갖 나쁜 짓을 해왔던 놈들이니, 살려준다 해도 또 이런 일을 저지를 것이 분명합니다!”

곧이어 감사 인사보다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연비는 무기를 떨어뜨린 채 덜덜 떠는 여덟 명의 비적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직 모두 젊은 나이였고 심지어 아직 나이가 어려 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들이 느끼는 혼란과 공포는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 있었고, 그들은 긴장에 짓눌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곧이어 연비가 고개를 돌려 자신이 구한 사람들을 바라보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스물이 넘는 사람을 죽인 사람이었다. 이에 그의 시선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저 여덟 사람은 비적들과 함께 나타났지만, 당신들을 공격하지도 않았고 나와 맞서지도 않았소. 내내 망설이며 무기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 않았지. 몸에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한 번도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는 자들이오.”

그는 이렇게 말한 뒤 다시 여덟 명의 비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들 나이도 아직 어려 보이는 데다, 조금 전 강도질을 할 때 곁에 있던 이들을 두려워하는 걸 보았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말해 보시오.”

쿵, 쿵, 쿵……!

그러자 여덟 명의 사내는 마침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된 듯, 우르르 땅에 무릎을 꿇었다.

“대협, 부디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저희도 모두 살려고 한 짓입니다. 원래는 적당한 곳을 찾아 기술을 좀 배우거나, 배를 채울 밥 한 끼라도 준다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모집하던 그 관사가 우리를 비적 소굴로 데려갈 줄 저희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비적들은 강도 노릇을 하기 싫다고 한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만약 저희가 무기를 들지 않고 함께 따라오지 않았다면 바로 죽였을 것입니다. 저희는 사람을 죽인 적도 없고 그런 일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빌면서 계속해서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고 있었다.

연비가 목숨을 구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들은 먼저 가시오. 세태가 어지러우니 앞으로도 길을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오. 이자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소.”

그러자 사람들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볼 뿐 감히 그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그중 나이가 좀 있는 자가 조심스럽게 이렇게 물었다.

“저, 혹시 대협의 존함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연비라 하오.”

“대협께서 베푸신 은혜는 저희가 반드시 기억할 것입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세상이 뒤숭숭해 살기가 퍽퍽했으므로 그들로서는 당장 후하게 보답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연신 감사 인사를 올린 뒤 다시 소와 말을 끌고 떠나갔다. 그렇게 산길 위에는 연비와 땅에 꿇어앉은 여덟 사람만 남게 되었다. 이에 남은 이들은 왠지 모르게 더욱 두려움을 느꼈다.

연비는 아직 젖살도 다 빠지지 않은 듯한 젊은이들을 보며 말했다.

“한 명씩 이름과 주소를 대시오. 거짓을 고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연비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자 그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으므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그들은 한 명씩 이름과 주소를 댔다. 대부분은 집안에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고 말했으며,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아 얼른 처를 맞아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자신의 사정을 고하자 연비는 잠시 침묵하더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20년 전이었다면 나는 한 명도 살려주지 않았을 것이오. 지금이라고 해서 성격이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당신들의 이름과 사정은 내 모두 기억했으니, 만약 어느 날 삿된 길로 빠지면 내가 당신들을 찾아갈 것이오.”

그러자 꿇어앉은 이들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멍하니 연비를 바라보기만 했다.

“모두 일어나시오. 돌아가면 제대로 사람 노릇 하고 살고. 어서 가시오!”

“예, 예!”

“예에…….”

“네!”

“지금 갑니다, 갑니다!”

그들은 서로를 부축하며 연비를 향해 연신 허리 굽혀 인사한 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자 연비는 산길에 널린 시체와 점점 더 많아지는 까마귀를 비롯한 새 떼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검을 잘 갈무리하고 마차 대열이 떠난 방향으로 걸어갔다.

연비가 떠나자 새 떼가 까악, 까악 울며 날아와 비적들의 시체를 쪼아먹었다.

연비는 자신이 놓아준 이들을 뒤쫓아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그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 * *

며칠 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이동한 연비는 녹평성에 이르렀다. 이는 위씨 집안에 일어난 변고 때문은 아니었다. 시간상으로 볼 때, 그가 녹평성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그 일이 일어나지도 않은 때였다. 심지어 연비가 녹평성을 떠날 때도 계연은 아직 위씨 집안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연비가 녹평성을 찾은 것은 오로지 녹평성의 강씨 집안에서 서신을 받아오기 위해서였다.

조월국은 세태가 혼란스러워진 지 꽤 오래되었지만, 이렇게 구멍이 숭숭 뚫린 상황에서도 여전히 강대한 세력을 지닌 세가(世家)나 호족들은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태평성대일 때보다 더욱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이는 거리낌 없이 법을 위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관리할 만한 힘이 없었고, 녹평성 강씨 집안도 바로 이런 집안 중 하나였다. 이들은 상업으로 가세를 일으켰으므로 원래라면 다른 집안에서 이들을 얕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강씨 집안의 사업은 대정국까지 뻗어 있어, 절대 쉽게 볼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으므로 아무도 이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연비는 전에 강씨 집안을 통해 대정국으로 서신을 보냈었고, 강씨 집안에서는 대정국을 오가며 서신을 가져다주었었다. 그리고 며칠 전이 바로 그들이 약속한 날짜였다.

강씨 집안에서는 직접 연비에게 서신을 가져다주고 싶었으나 연비가 어디 사는지 알지 못했다. 연비는 바깥에 자신이 어디에 머무는지 알린 적이 없었고, 심지어 낙경성에 사는 이들 가운데서도 연비가 낙경성에 산다는 걸 아는 이가 몇 없었다. 일 년 전에야 선천의 경지에 들었다는 비검객 연비가 낙경성 바깥에 산다는 것이 강씨 집안에 의해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래서 연비는 매번 직접 서신을 찾으러 가야 했다.

이번에 서신을 가져온 것은 바로 대정국에서 돌아온 강통이었다. 연비가 서신을 받고 떠나자 강통은 곧바로 위씨 집안을 방문했고, 바로 그곳에서 강통은 계연을 만난 것이었다. 연비와 계연은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던 것이다.

연비의 걸음은 계연이 부리는 신통한 술법만큼 빠르지는 않았지만, 선천의 경지에 이른 무인답게 그 속도는 질주하는 말보다 빨랐으며, 말보다 더 오래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지형이 조금 복잡하긴 했지만, 거리가 백 리도 되지 않았기에 그는 한나절도 되지 않아 낙경성 밖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계연은 육산군에게 노염생이 연뿌리로 사람을 빚어낸 일을 이야기해주다가 연비가 도착한 것을 발견했다. 이에 계연이 곧바로 술법을 풀자, 연비도 뜰 안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푸른 장삼과 황색 장삼을 입은 계연과 육산군이 뜰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를 본 연비는 무척 기뻐하며 걸음을 나는 듯이 서둘렀다. 장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단 몇 걸음 만에 걸어온 그는 단번에 안으로 들어섰다.

“계 선생님! 육 선생님! 언제 오셨습니까? 우 형님은 집에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온 것을 아시나요?”

그는 이렇게 물으며 계연과 육산군을 향해 허리 굽혀 예를 올렸다.

“연비가 계 선생, 그리고 육 선생을 뵙습니다!”

“연 대협,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무공에 큰 발전이 있었네요. 저희는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계연이 이렇게 말하며 일어나 연비를 향해 인사했다. 그러자 육산군도 계연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다만 말없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두 분 선생님, 어서 앉으시지요. 미리 알았으면 더 서둘러 왔을 텐데요. 참, 온 지 얼마 안 되셨다면 우 형님이 두 분이 도착하신 것을 모르고 있겠군요. 아마 아직 낙경성에서 쉬고 있을 겁니다, 제가 가서…….”

“그럴 필요 없소, 그놈은 이미 계 선생님께 금덩이를 빌려 기루로 갔소. 아마 이틀은 돌아오지 않을 거요.”

육산군이 이렇게 대놓고 말하자 연비는 조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우 형님은 성정이 호쾌하시지요. 그 점만 빼면 나무랄 게 없는 분입니다. 절대 두 분께 실례를 범할 뜻은 없었을 겁니다.”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알아요, 연 대협도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 어서 앉으세요. 갈증도 풀 겸 이 대추 한 번 드셔보세요.”

연비는 그제야 탁자 위에 웬 대추 더미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커다란 매실인 줄 알았을 정도였다. 이 대추는 척 보기에도 대단한 것이 분명하여, 그는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한 입 베어 물었다. 대추는 아주 향기롭고 신선했는데, 그 특별한 맛이 입안을 통해 온몸 곳곳으로 전해졌다. 이에 그는 단 몇 입 만에 대추 한 알을 다 먹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다시 대추를 집어들진 않고, 계연과 육산군이 찾아온 이유를 궁금해하며물었다.

“두 분 선생께서는 절 만나기 위해 오셨습니까?”

“연 대협이 아니라 우 대협을 찾아온 거예요. 무슨 일인지는 연 대협께 알려드리기 어렵겠네요. 아마 그가 돌아오면 꽤 오랜 시간 이곳을 떠나있게 될 거예요.”

연비는 낙경성 방향을 흘끗 보더니 별안간 웃으며 대답했다.

“천하에 끝나지 않는 연회는 없다지 않습니까. 우 형님께서 바쁘실 거라니 잘 되었군요. 마침 저도 집을 떠난 지 오래라, 이제 돌아가 봐야 할 듯합니다.”

연비의 말에 계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연비가 품 안에서 서신 한 통을 꺼냈다.

“저는 집안에서 막내라, 부모님께서 별세하신 후로는 집에 돌아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큰형님께서 제게 돌아오라고 서신을 보내신 걸 보니, 아무래도 무슨 곤란한 일이 생긴 듯합니다. 그래서 어차피 저도 곧 떠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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