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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622화 (622/892)

622화. 이런 벗을 얻다니

계연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육산군은 내내 연비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실, 예전의 아홉 사람 중에서 내가 제일 인정하는 이는 왕극이고, 그다음이 두형이오. 연 대협은 심지어 육승풍보다도 뒤쪽에 있지. 하지만 단순히 무공만 놓고 보자면 아마 연 대협이 가장 위일 것이오. 보아하니 몇 년간 <검의첩>을 그냥 갖고 있기만 한 건 아니었군. 우패천 그자도 도왔을 것이고.”

육산군은 연비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기가 비할 데 없이 짙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심지어 살기(煞氣)와 융합해 무척 특수한 상태를 유지했다. 물론 계연의 눈에는 그 변화가 더욱 또렷이 보였다.

“연 대협, 제가 보아하니 이미 무도(武道)에 있어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은 듯한데, 자세히 한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계연은 비록 무공에 조예가 깊었지만, 맨 처음에 수련을 닦기 시작할 때 주로 영기를 받아들였기에, 보통의 무인들처럼 오랫동안 진기를 수련하다가 마침내 선천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계연의 내공은 일찍이 그 길이 끊긴 상태였다. 그러다 오늘 계연이 연비의 변화를 보니 무도의 어떤 길이 보이는 듯했다.

이에 대해서는 설령 육산군이나 계연이 묻지 않았더라도, 연비는 그들과 진작 이야기를 나누려 했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털어놨다.

“예전에 선생님께서는 제가 쭉 무도의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셨지요. 그래서 저도 여러 해 동안 줄곧 제 앞길을 고심해 왔었습니다. 좌리의 검의(劍意)는 분명 범속을 초월했지만, 그 뜻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우 형님께서는 언젠가 제게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고 말했었습니다. 하지만 일개 평범한 사람은 여전히 대단한 요괴 앞에서는 무척 나약합니다. 그래서 저는 선천의 경지에 이른 후에도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우 형님께서 제 시야를 넓혀주셨습니다. 우 형님은 좌리의 검의가 선생께서 인정하실 정도로 대단하긴 하지만, 무인의 한계는 그 연약한 신체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새로운 방법으로 눈을 돌려, 요괴의 수행법을 시도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지요. 물론 절대 삿된 방식은 아닙니다. 선천의 진기와 무인이 가진 살기(武煞), 기백을 결합하여 자기 자신을 단련하는 겁니다…….”

연비가 기억을 돌이켜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계연과 육산군은 그의 말을 경청하다가 연비의 말이 끝나자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에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며 연신 감탄을 표했다.

탁, 탁……!

“대단하네요, 정말 대단해요. 천지만물, 감정이 있는 모든 중생은 천도(*天道: 하늘의 도리)를 따라 살아가지요. 사람이 비록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긴 하나, 어떻게 보면 그저 영지를 빨리 얻는 동물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죠. 게다가 어릴 때부터 온갖 복잡한 일을 접하니, 마음과 혼백이 나날이 혼탁해지고요.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요괴의 시각에서 다른 길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예요. 무공이란 것이 원래 이런 의미가 있죠.”

“예,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 형님께서도 그때 선생님과 비슷한 말을 하며 요괴의 법체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었습니다. 무인의 기혈과 원기, 양기가 강성하다면 자신의 기백과 살기를 기른 후, 이를 선천의 경지에 이른 진기와 융합하면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무도의 길을 개척할 수도 있을 거라고 했었습니다.”

그러자 계연은 크게 흥미가 일어 표정에마저 그 흥분이 드러났다. 계연은 다시 소매를 한번 휘둘러 대추를 또 한 더미 쏟아냈다.

“대추 좀 드세요, 자,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봅시다. 참, 산군, 너는 가서 우 대협을 잡아 오거라. 지금 당장 가라는 것도 아니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육산군이 활짝 웃으며 “예.”하고 대답한 뒤 성큼성큼 장원을 나서 낙경성으로 향했다.

연비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무척 대단한 사람이었으나, 이때 계연은 우패천의 비범함에 더욱 감탄하고 있었다. 무인의 한계는 그 연약한 신체에 있다니. 이는 단번에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가 가진 시야는 계연보다 훨씬 넓었다.

계연은 늘 무인에게 잠재력이 있다고 믿어왔고, <검의첩>을 읽은 후로는 더욱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계연은 문제를 제대로 꿰뚫어 보지 못했고, 그에 대한 감각도 모호했다. 이는 아마도 계연이 순수한 무인이 아니라 ‘선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패천은 연비와 오랜 시간 함께 지내왔으니 그를 더 잘 알 테고, 그 스스로도 수행을 닦는 요괴로서 특별한 시각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계연은 이 점에 있어 우패천보다 확실히 못했다.

게다가 우패천의 강점은 연비 대신 핵심을 짚어낸 것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가 요괴의 수행법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것에 있었다. 우패천의 도움은 자라는 풀을 억지로 잡아당겨 늘이는 것이 아니라, 무인으로서 닦은 수행의 기초 위에 자신의 지식을 쌓는 것이었다. 그리되면 무인의 수행에 어떤 이물질도 섞여 있지 않을 테니 더욱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사실 계연에게는 무인의 체력과 기백을 더욱 빨리 증강할 방법이 있었다. 아마 우패천에게도 비슷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을 쓴다면 그것은 무인 자신의 힘을 기른 것이라 할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무인의 옷을 입은’ 반쪽짜리 계연이 될 테니, 무인으로서의 앞날은 끊기는 것이었다.

우패천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계연은 계속 연비의 설명을 들었다. 계연은 속으로 얼마간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무도의 길이 머릿속에 보일 듯 말 듯 떠올랐다. 만약 무도에 다시 발을 들여놓을 시간이 없거나, 이미 무인으로서의 길이 끊긴 게 아니라면 스스로 시도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연 대협, 이런 벗을 얻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값지다고 할 수 있겠군요!”

계연이 우패천에 대해 이렇게 감탄하자 연비도 그의 말에 깊이 동의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자신의 인생에 벗이라 부를 수 있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젊었던 인생의 전반부 동안에는 오만과 자부심이 지나쳤고, 나이가 든 인생의 후반부는 물론 아직 끝까지 가보진 않았지만, 아마 자신의 이런 성정으로는 진심으로 교우할 수 있는 벗을 사귀기가 어려울 터였다. 그러니 우패천을 만난 것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 큰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딱 제가 생각과 같습니다. 우 형님은 제게 스승이자 벗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 당시 저는 자부심이 지나쳐 거만하다고 여겨졌을 법한데, 우 형님께서 그런 저를 벗으로 받아들여 주다니 제게는 정말 행운이지요.”

“하하, 너무 그렇게 자기를 낮추지 마세요. 대협께서도 우 대협을 잘 아시겠지만, 그는 겉으로 그저 순박하기만 해 보이지만 실은 무척 똑똑한 분이시지요. 만약 연 대협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소양이 없었다면, 그가 대협을 벗으로 사귀었겠어요? 자자, 여기서 손가락을 검으로 삼아 무도(武道)의 방식대로 한번 맞붙어보죠. 저도 대협의 깨달음을 한번 엿볼 수 있게요.”

그 말에 연비의 눈이 반짝였다. 비록 눈앞에 있는 것이 계 선생님이긴 하지만, 무도의 방식으로 맞붙는다면 그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이길 수도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대답했다.

“예, 그럼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연비는 계연에게 살짝 양손을 맞잡아 인사한 뒤 습격에 가까운 방식으로 검지를 계연을 향해 찔렀다. 그러자 계연은 긴 소매를 휘두르며, 푸른 장포로 연비의 시야를 어지럽힌 뒤 번개처럼 검지를 내찔렀다. 이토록 협소한 공간에서 검을 겨루면서도, 두 사람의 초식은 무척 빠른 속도로 변했다.

약간 떨어진 주방에서 바삐 일하던 부부는 그 장면을 보고는 멍하니 서서 구경했다.

“계 선생님처럼 점잖게만 보이시는 분이 저런 고수일 줄이야. 강호는 그야말로 와호장룡(*臥虎藏龍: 누워있는 호랑이와 숨은 용. 고수들이 몸을 숨기고 있음을 뜻함)이군!”

남편이 이렇게 감탄하자 부인이 가볍게 그를 때리며 말했다.

“우 대협과 연 대협께서 모두 존경하시는 분이시니, 무공을 좀 할 줄 아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죠. 자, 멍하니 서 있지 말고요! 연 대협께서도 돌아오셨으니 저녁 식사는 반드시 차질 없이 준비해야 해요. 저 거위 좀 대신 손질해주세요.”

“조금만 더 보고 하겠소. 저런 대결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오! 무인으로서 평생에 몇 번 볼까 말까 한 수준이오!”

남편을 재촉하려는 생각은 굴뚝 같았지만, 부인도 그의 마음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가 눈썹을 잔뜩 모은 채 넋 놓고 손가락 싸움을 구경하는 걸 보자 체념했다.

“알았어요, 다 보고 나면 거위 손질을 잊지 마세요. 저는 키우는 우렁이를 손질하러 갈 테니까요.”

* * *

한편, 육산군은 장원을 나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낙경성으로 가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일, 이 각(刻) 정도 걸릴 거리였지만, 그는 몇 분 되지도 않아 성에 들어왔다.

낙경성은 과연 조월국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였다. 혼란스러운 세태 속에서 조월국의 다른 지방에서는 모두가 빈곤한 삶을 이어가고 있건만, 이러한 지역들에서 빨아온 고혈은 모두 낙경성에 모이는 것 같았다.

성안 거리 곳곳은 인파가 가득해 떠들썩했는데, 등짐장수들은 연신 소리치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고 점포나 노점에는 문구(文具)부터 사치품까지 온갖 물건을 내놓고 있었다.

육산군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이 광경을 몇 번 둘러보다가 가장 번화한 큰길을 따라 걸었다. 그 길은 기루가 밀집한 거리와 곧바로 이어졌다.

아직 해가 뜬 오후 시각이었기 때문에, 낙경성 다른 곳은 모두 떠들썩했지만, 기루가 모인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다. 하지만 거리의 행인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다. 육산군이 이 거리에 들어서자, 거리를 따라 늘어선 기루 앞에 서 있던 기녀들의 눈에 번쩍 이채가 돌았다.

육산군은 옅은 황색 장삼을 입고서, 머리카락 반은 비녀와 작은 관(冠)으로 틀어 올리고 남은 머리는 등 뒤로 자연스레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생김새가 준수한 건 말할 필요도 없었고, 체격이며 걷는 모습이 비할 데 없이 기품이 넘쳤다. 게다가 척 보기만 해도 돈이 있어 보였다. 이런 사람이 이런 거리에 나타났으니, 기녀들의 춘심이 동하지 않기가 더 어려웠다. 그래서 그를 본 여인들은 저마다 그에게 말을 건네며 그를 자신들에게로 데려오려 했다.

“손님, 안에 들어와서 앉았다 가세요!”

“손님, 저희 암향루(暗香樓)에 쉬러 오세요. 아주 편안히 모실게요!”

“아앗, 가지 마세요, 손님!”

기녀들이 다가와 육산군을 끌어당기려 하자, 육산군은 예의 있는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서둘러 그들이 자신에게 닿지 못하게 피해버렸다. 그녀들에게서 나는 각기 다른 연지와 분 냄새가 너무 역했기 때문이다.

길을 따라 걷던 육산군은 마침내 우패천이 말했던 춘행루를 찾아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자 춘행루 안팎의 낭자들은 모두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얼굴로 그에게 우르르 모여들었다.

“손님, 제가 모시도록 해주세요.”

“손님, 부디 제가 모시도록 해주시겠어요?”

“아니면 저희가 함께 모셔도 되고요, 호호호…….”

그러자 포주가 부채를 가볍게 부치면서 허리를 흔들며 걸어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에고, 어찌 이리 준수한 손님께서 오셨을까! 손님께선 정말 보는 눈이 있으세요, 저희 춘행루는 낙경성 전체에서 가장 예쁜 아이들만 있답니다. 낙경성 명기(名妓)들은 모두 저희 기루에 있지요. 지금 마침 그 아이들이 모두 한가하답니다.”

포주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육산군은 금 알갱이를 한 움큼 꺼내 그녀에게 턱 건넸다. 그러자 포주는 두 손을 펼쳐 그것을 받아들고는 온 얼굴에 꽃이 활짝 핀 듯이 웃었다.

“제가 손님께 알아서 안배해드릴까요?”

“됐소, 나는 우씨 성을 가진 자를 데리러 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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