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화. 도인
천수호를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계연이 연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연 대협, 가만히 서 주세요.”
그러자 발밑에 구름이 생기며 두 사람이 곧 공중으로 떠올랐다.
연비는 몸을 한번 떨더니 곧 균형을 단단히 잡고 서서 자기 몸이 상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뒤이어 연비의 발밑에 놓인 호수와 나무가 점점 작아지더니, 점차 광활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러자 바람 소리가 위잉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땅이 움직이는 것만 보면 마치 천천히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연비는 사실 자신들이 지금 바람 같은 속도로 날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늘을 나는 것은 물속에 있을 때의 감각과 완전히 달라 새로웠다. 연비는 그동안 살아오며 여러 가지 일을 겪었지만, 하늘을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구름 위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는 와중에도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게 바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군요?”
연비의 말을 들은 계연이 웃으며 물었다.
“왜요? 혹시 수선자가 되고 싶으세요?”
“당연하죠, 세상에 신선이 되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그게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게다가 저는 수행을 닦을 심성이 못 됩니다. 무도(武道)실력도 어중간한데 어찌 다른 것을 배우겠습니까.”
그러자 계연이 뒷짐을 진 채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무도의 길은 멀죠. 하지만 사람이 지닌 잠재력에는 한계가 없으니, 무엇이든 가능해요.”
그 말에 연비가 무의식적으로 계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옆얼굴에서는 어떤 것도 짚어낼 수 없었다.
계연은 둔술(遁術: 다른 물질의 도움을 빌려 숨거나 도망치는 술법. 주로 오행(*五行: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의 힘을 빌림)을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거술을 사용하는 것보다 속도가 훨씬 빨랐다. 계연은 곧바로 쌍화성에 내려서지 않고 그 위를 잠시 돌다가 지나쳤다. 쌍화성은 낙경성만큼 번화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규모가 꽤 컸고 치안도 안정적인 편이었다. 계연은 공중에서 손가락을 접어 점을 쳐보더니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눈으로는 계속 성 곳곳을 훑는 중이었다.
“계 선생님, 조금 전 그 도시가 쌍화성이죠?”
계연이 천수호를 떠날 때 구사 법사에 관하여 물었었기에, 연비도 이미 자신들이 쌍화성으로 가는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맞아요.”
“만약 그 구사 법사를 찾아가려 하신다면 얼마든지 가셔도 됩니다. 저는 집에 서둘러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으니까요. 아니면 여기서 내려 혼자 대정국으로 돌아가도 되고요. 어차피 천 리나 넘는 거리를 선생님께서 도와주셨으니까요.”
그러자 계연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제대로 알아보고 가는 게 좋겠어요. 연 대협도 저와 함께 가시죠. 혼자 돌아가시면 두 달은 더 걸릴 테니까요. 제가 이왕 데려다주겠다고 말했으니 약속은 지킬 거예요. 어서 가죠.”
그러자 그들의 발밑에서부터 구름 위로 희미한 안개가 올라오더니, 두 사람의 모습이 한 줄기 안개로 변해 성안 어느 곳으로 날아갔다. 뒤이어 안개가 걷히자 연비는 어느새 자신이 계 선생님과 함께 땅 위에 내려선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땅에 내렸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었다.
이때 두 사람은 마침 지나다니는 이가 없는 외진 골목에 서 있었다. 연비는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계연에게 물었다.
“선생님, 길을 알고 계십니까?”
“알아요, 이쪽이에요.”
계연은 소매 아래로 점을 쳐보더니 먼저 성큼성큼 큰길로 나섰다. 그는 비록 자신이 찾으려는 구사 법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석류 골목이 어딘지는 알 수 있었다.
계연과 연비가 쌍화성을 잠시 관찰해보니, 인파로 북적이는 와중에도 곳곳에 남루한 옷을 입고 일가족을 데리고 다니며 걷는 이들이 보였다. 그들이 점포마다 찾아가 혹 일손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묻는 것을 보니, 아마 혼란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이들인 듯했다. 애초에 성에 들어올 때도 어떻게든 병사들의 눈을 속이고 들어왔거나, 가진 돈을 거의 전부 내주고 들어왔을 것이다.
연비는 계연을 따라 걸으며 눈썹을 찡그린 채 세 번째 유랑민들이 지나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는 마침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계연에게 물었다.
“계 선생님, 조월국 곳곳이 이토록 혼란스러운데 어째서 이곳 조정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겁니까?”
조월국에서는 어느 한 지방이 그나마 태평하다고 알려지면, 그 주위의 혼란스러운 곳에 살던 이들이 전부 그곳으로 도망쳐오곤 했다. 그렇게 유랑민들이 부쩍 늘어나자 버려진 땅도 많아진 상태였다.
유랑민들은 비록 고향을 등지고 떠나왔지만, 성실히 일하기만 한다면 이 번화한 도시에서 얼마간 돈을 벌 수는 있었다. 그 돈으로 종자를 산 뒤 대지주에게 계약서를 써주어 거의 몸을 팔다시피 하면, 농사를 지을 땅 한 뙈기는 얻을 수 있으니 그렇게라도 살 수는 있었다.
이런 상황은 조월국 곳곳에 기현상을 만들어냈다. 번화한 소수의 지역을 둘러싼 지대는 중심도시를 위해 완전히 봉사하며, 기형적으로 부유한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곳의 관리, 혹은 호족 세력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는 데만 힘을 쓸 뿐, 다른 지방 사람들이 배를 곯든 얼마나 혼란스럽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부유한 지역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에만 신경을 쓸 뿐, 나머지 지역은 아예 방임한 상태였다. 만약 누군가 군사를 일으켜 칭왕(稱王)을 하거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곧바로 군사를 보내 진압했지만, 그 외에 산을 점거한 비적들 같은 무리는 관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방의 세가(世家)나 호족들이 개인들의 안전과 이익을 위하여 비적을 토벌하곤 했다. 이런 기이한 정세는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상태였는데, 이로 인해 가장 고된 나날을 보내는 이들은 최하층 백성들뿐이었다.
연비의 말에 계연은 그를 한번 보더니, 다시 성안을 거니는 유랑민들을 바라보고는 탄식을 금치 못하며 대답했다.
“대정국이 있기 때문이에요.”
“대정국 때문이라고요?”
연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의 무공은 범인(凡人)으로서는 정상에 오른 경지였지만, 나랏일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조월국 같은 곳은 진작에 반란이 일어나 아예 망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게 어째서 대정국 때문이라는 걸까?
“맞아요, 대정국 때문이에요!”
계연은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담담한 태도로 설명했다.
“이에 관해서는 청이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아, 청이는 제 동향(同鄕) 후배예요. 그는 대정국에서 출사(出仕)한 이로 시국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죠. 대정국의 국력이 나날이 강해지는 것은 식견 있는 이라면 다 알고 이는 조월국의 고위층들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은 대정국에 원한을 갖고 있지만, 지금은 두려움이 더 큰 상태예요. 양국의 깨어있는 이들은 두 나라 사이에 곧 전쟁이 일어날 거라 믿고 있고, 이는 아마도 그리 멀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지금은 누구도 조월국을 다스리는 송씨(宋氏)의 위치에 앉아 대정국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권세 있는 이들은 가만히 있고, 농민들이나 가끔 반란을 일으키니 당연히 조정을 뒤집기는 어렵죠.”
연비는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계연의 설명을 듣자 그제야 좀 이해할 수 있었다. 왕조는 바뀌어도 세가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도 있잖은가. 그가 혼자 깊이 생각에 잠겼을 때 돌연 계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어요, 저 앞에 있네요.”
거리는 무척 시끌벅적했지만, 계연은 그 무수한 소음 속에서도 살짝 떨어진 곳의 호객 소리를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곳에는 회색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도관(*道冠: 도사가 쓰는 건(巾))을 쓴 젊은이가 행인들을 향해 자신이 파는 물건을 목청껏 소개하고 있었다.
“자자, 길목은 지나쳐도 이건 지나치면 안 됩니다! 잠시만 멈춰서서 평안을 구하세요! 이 평안부(平安符)를 사시면 후에 흑황에 사악한 별이 나타나고, 하늘이 갈라지고, 대지가 무너지며, 십경(*十境: 열 가지 경계, 장소)에 황고(荒古: 아주 오래된 옛날, 태고)가 일어나며, 일륜(*日輪: 태양의 다른 말. 그 모습이 끊임없이 회전하는 바퀴 닮아 붙여진 이름)이 울부짖으며 천양(*天陽: 하늘의 양기. 즉 태양을 일컬음)이 사라져도 평안무사할 수 있습니다! 여기 함께 쓰면 좋은 향낭도 있습니다! 안에 평안부를 넣고 다닐 수도 있고, 보기도 좋은 데다 향기도 좋지요!”
젊은이는 한 손에는 삼각형 모양으로 접은 평안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향낭을 든 채 힘껏 소리쳤다. 그의 시선은 주로 여인들에게 머물렀다. 젊은 낭자들에게 자연스레 시선이 끌리는 것도 있었지만, 그의 물건을 주로 찾는 것이 대부분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젊은 도인, ‘흑황에 사악한 별이 나타나고’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무슨 깊은 뜻이 있나요?”
별안간 평온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들리자, 회색 도포를 입은 도인이 여인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한쪽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푸른 장삼을 입은 기품 있는 서생처럼 보이는 남자와 잘 다듬은 수염을 기르고 검을 찬 남자가 서 있었다. 두 사람 다 보아하니 풍모가 범상치 않았다.
“아, 그건 당연히 대단한 천재지변을 뜻하지요. 밤에 사이한 별이 뜨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엄청난 재난이 닥친다는 뜻입니다!”
“그럼 십경에 황고가 일어난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까? 큰 재난이 닥치면 도적이며 온갖 이매망량이 전부 사람을 해치려 드니, 곳곳이 황폐해지겠지요.”
그러자 계연이 회백색 눈을 좀 더 크게 뜨더니 빤히 젊은 도사를 바라보았다. 도사는 그제야 계연의 두 눈이 남다른 것을 발견하고는, 돌연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했다. 그는 계연의 시선에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 소매로 땀을 닦았다.
“그럼 일륜이 울부짖으며 천양이 사라진다는 말은요? 큰 재난이 닥친다 해도 해가 뜨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아하하, 고명하십니다, 선생님. 하지만 천하가 혼란하고 민생이 불안해지면 마치 해가 뜨지 않은 캄캄한 날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되지 않습니까? 아, 그렇지, 두 분 선생 혹시 평안부가 필요하십니까? 단돈 10문(文)입니다, 향낭도 하나 드리고요!”
그러자 단단히 굳었던 계연의 얼굴에 별안간 미소가 퍼졌다. 뒤이어 계연이 젊은 도인이 손에 든 호신부며 각종 부적을 살펴보자, 아주 희미한 영기가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 가련할 정도로 희미했지만 어쨌든 아예 무용지물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계연은 호신용 부적을 사지 않고 이렇게 물었다.
“도인께서는 이런 호신 부적만 파나요? 삿된 것을 쫓는 물건은 없으시고요? 제가 마침 법사를 찾고 있어서요.”
그러자 젊은 도사의 눈이 반짝이더니 그는 한층 열정적인 태도로 응대했다.
“팝니다, 당연히 팔지요! 그뿐만 아니라, 구사(*驅邪: 삿된 것을 쫓아낸다는 뜻)도 합니다! 삿된 것을 내쫓고 요괴를 잡는 것뿐만 아니라 묫자리도 봐 드립니다! 제가 해드리면 가격이 좀 더 싸고, 제 사부님을 찾으시면 좀 더 비싸긴 하나, 확실히 법력이 더 높으십니다!”
“아, 그런데 제가 들은 바로는 여기서 제일가는 법사가 석류 골목에 산다고…….”
계연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도인이 쾌활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하, 그렇다면 선생께서는 제대로 찾아오셨습니다. 석류 골목이 바로 제가 사는 곳입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말하는 법사는 분명 제 사부님이실 겁니다. 제가 지금 바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더니 얼른 노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벌써 장사를 접으시려고요? 석류 골목은 저희가 알아서 찾아가도 되는데요.”
“접어도 됩니다, 어차피 몇 개 팔지도 못합니다! 그럴 바에야 제가 두 분을 모셔다드리는 게 낫지요. 석류 골목은 좀 외져서 찾기가 쉽지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