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화. 서로 다른 처지
연비의 큰형이 서신을 보내어 연비에게 돌아오라고 하긴 했지만, 연비가 오늘 갑작스레 집에 돌아오자 연씨 일가는 모두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나 연비가 이미 선천에 경지에 이르렀다는 걸 알게 된 후에는 가족들의 기쁨이 더욱 커졌다.
연씨 저택의 어느 곳에서는 어느새 나이 든 연승(燕勝)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생에게 최근 집안에 생긴 큰일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고 있었다. 사정을 전해 들은 연비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예? <좌리검전>을요? 좌씨 집안에서 이렇게 선뜻 내주다니요?”
연비가 경악한 얼굴로 자신의 큰형을 바라보자, 연승도 지팡이를 짚은 자세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나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선천의 경지에 이른 종사(*宗師: 모든 사람이 우러러 존경하는 사람, 대가(大家)) 두 분께서 검전의 일부를 직접 보시고는 진본이 맞다고 확인해 주셨어. 다른 사람들이 못 믿을 법도 하지. 우리 연씨 집안은 대대로 검술로 이름이 높았고, 강호에서의 명망도 줄곧 좋지 않았느냐. 서녕부는 또한 균천부와 가까이 있기도 하니, 좌씨 집안에서는 검전을 우리에게 넘기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이를 대가로 무림과 화해하고, 광명정대하게 좌씨 성을 쓸 수 있기를 원했지.”
“고작 좌씨 성을 쓰기 위해서 이렇게까지…….”
연비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그 오랜 세월 이름을 숨기고 살아왔으니, 앞으로 계속 그렇게 산다 해도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저 좌씨 성을 달고 살기 위해서 좌광도의 검전을 내주다니, 그럼 예전에 치른 죗값은 다 헛되게 된 것이 아닌가?
“휴우, 좌씨 집안도 굴곡이 많았지. 이번 결정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그들이 우둔하다며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그들의 결정에 탄복했다.”
연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형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이제 그것보다는 앞으로의 상황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큰형님, 좌씨 일가가 <좌리검전>을 보내왔으니, 이제 그 부담은 좌씨가 아니라 우리 연씨가 지게 생겼습니다!”
“하하하하, 네 말이 옳다. 하지만 이제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구나!”
연비보다 열 몇 살이나 더 많은 연승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가득했다. 그가 연비를 보는 눈빛에는 온통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는 수많은 무림 명사들을 초청해왔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내내 불안하던 터였다. 하지만 이제 연비가 돌아왔으니, 연씨 집안은 전에 없던 힘이 생긴 것이다. 선천의 경지에 이른 종사가 좌리 이후에 몇이나 나왔던가?
* * *
<좌리검전> 때문에 서녕부, 특히 귀래현은 강호인들이 떼를 지어 모여드는 곳이 되었다. 소식에 밝은 강호인들이 이곳으로 많이들 모였는데, 계연은 곧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두형, 육승풍, 왕극도 지금 귀래현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 더해 연비까지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불문(佛門)에 출가한 조룡을 빼고는 예전 아홉 명의 소협 중에서 나름대로 출세했다는 이들이 전부 모인 것이었다.
그날 밤, 뒤쪽 산의 한 정자에서는 연비, 육승풍, 왕극 그리고 두형이 아주 오랜만에 함께 모였다. 그들은 산 아래로 펼쳐진 귀래현을 내려다보며 감개무량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네 사람은 외모도 옷차림도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왕극은 아주 노련해 보이는 관리의 복식에 관아에서 쓰는 귀두도(*鬼頭刀: 칼자루에 도깨비의 얼굴이 조각된 칼)를 차고 있어 무척 위엄있어 보였다. 육승풍은 수염을 덥수룩이 기르고 거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조금도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양 손바닥에는 잔뜩 굳은살이 박여 있어, 그의 지나온 세월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두형은 장도(長刀)를 등에 지고 담담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텅 빈 그의 오른쪽 소맷자락이 바람에 가볍게 흩날렸다. 연비는 잘 관리된 수염을 기르고 장삼을 갖춰 입고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는데, 무척 풍모가 남달라 보였다.
“30년 세월이 하룻밤 꿈처럼 순식간에 지나버렸군. 이제 우리도 모두 늙었소!”
육승풍은 그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았으므로, 그가 이 순간 느끼는 감상이 말에도 묻어났다.
“하하, 육형(兄)은 늙었지만 나는 아니오! 다만 무공으로 따지자면 내가 제일 밑이니 그게 좀 아쉽군!”
왕극의 목소리는 커다란 종이 울리는 듯이 쩌렁쩌렁했다.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육승풍의 말에 반박하자, 두형과 연비가 모두 웃었다. 뒤이어 연비가 왕극을 향해 농담을 던졌다.
“연모(某)가 돌아오자마자 소문을 들어보니, 왕 신포(*神捕: 뛰어난 포두라는 뜻)라는 자가 낮에는 강도를 잡고 밤에는 악귀를 잡는다고 하더군. 게다가 그 명성이 무림의 선천 고수들을 뛰어넘는다고 하지! 왕 신포는 조정과 강호는 물론 민간에도 널리 이름을 떨치는 유명인인데, 감히 나 같은 일개 무인이 어찌 왕 대인과 함께 이름을 올릴 수가 있겠소!”
“하하하하하! 그 말은 내 칭찬으로 듣겠소!”
“당연히 왕 신포(神捕)를 칭찬하는 말이었소!”
연비가 웃으며 옛 동료들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다. 그는 계 선생님과 육산군 모두 이 세 사람을 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만약 10년 전이었다면, 그는 이 세 사람과 겨루면 자신이 이길 거라는 오만에 차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이들이 지닌 남다른 기백을 볼 수 있었다.
아홉 명의 소협 중에서는 연비가 가장 오만한 성격을 지녔었다. 반면 육승풍은 그들 중에서 남달리 겉모습과 풍모를 중시했었는데, 지금은 전혀 이런 것들을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웃으며 몇 마디 나눈 네 사람은 조용히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육승풍은 허리춤에 묶어둔 술이 든 표주박을 끌러 입에 대고 마셨다. 그러고는 그것을 두형에게 건넸고, 두형도 술을 몇 입 마신 뒤 다시 왕극에게 건넸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전달받은 연비가 안에 든 술을 다 마시고는 다시 육승풍에게 전달했다.
“좌광도<좌리검전>이 이런 식으로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어쩌면 강호에 다시 한번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선천 종사와 강호의 세력이 이를 보호하러 모였으니, 검전을 빼앗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진 않겠지.”
“게다가 왕형이 여기 있으니 어찌 보면 조정에서도 개입한 셈이오. 다만 왕형만 홀로 보낸 걸 보니, 조정에서도 성의를 보인 것이지.”
두형의 말에 왕극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그 말을 인정하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러고는 이렇게 한 마디 덧붙였다.
“왕모가 단순히 관아에만 몸담은 신분은 아니오, 무림에도 한발 걸치고 있으니. 하지만 이왕 두형이 조정 이야기를 꺼냈으니, 왕모도 숨김없이 말하겠소. 최근 우리 대정국은 나라가 부강하고 모든 백성이 여유롭진 않아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있소. 윤 공께서도 조정에 태산같이 굳건히 자리를 잡아 노익장을 뽐내고 계시고 말이오. 그러니 왕모가 여기에 온 것만으로도 온갖 꿍꿍이속을 품은 이들은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오.”
이렇게 말한 왕극은 다시 어조를 바꿔 연비에게 말했다.
“연형, 고향을 떠나있었다면 몰라도 이제는 선천의 경지에 올라 돌아왔으니, 연씨 집안은 이제 유리한 시기와 장소, 인재를 모두 점한 셈이오. 그러니 분명 그 비적(祕籍)을 손에 넣으려 하겠군?”
연비는 조금 떨어진 산길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잠시 침묵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했다.
“<좌리검전>은 필요 없소. 내 실력이 전성기의 좌리만 못할지 모르지만, 그리 뒤떨어지지는 않소!”
그의 이 말에 다른 세 사람은 연비에게서 호탕한 기개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연비의 말이 절대 허풍이나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그들은 연비를 좀 더 남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보다 연모가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은 좌씨 집안사람들이오. 그 집안 아이들 모두 타고난 근골이 좋더군.”
* * *
귀래현은 자그마한 산 하나를 등지고 있었는데, 그 산에는 위험한 맹수들이 살고 있진 않았다. 그래서 이때 몇몇 아이들은 비교적 완만한 산길에서 나뭇가지를 무기 삼아, 이쪽에서 저쪽에서 신나게 소리 지르며 뛰어놀고 있었다.
맨 앞에 있는 아이는 손에 대나무 장대를 들고서 뛰어갔고, 그 아이를 여러 명의 아이가 뒤쫓았다.
“어서 잡아!”
“모두 덤벼!”
“내 검 맛을 보라!”
“하앗!”
휘익-!
탁, 탁!
맨 앞에 선 아이는 장대로 날아오는 나뭇가지를 쳐낸 다음 크게 소리쳤다.
“이런 오합지졸들 같으니라고! 나 좌광도는 천하를 제패했으니, 네놈들이 모두 함께 덤벼도 내 적수가 되지 못한다! 윽, 아야! 손가락을 때리면 어떻게 해!”
패기롭게 소리치던 아이는 다른 아이가 나뭇가지를 이용해 실수로 그의 손을 내리치자 너무 아파 얼른 장대를 든 손을 놓았다. 그러자 공격한 아이도 얼른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물었다.
“아, 내가 잘못 때렸나 봐!”
“괜찮아?”
“이리 봐봐!”
“괜찮아, 괜찮아. 조금 빨개진 것뿐이야. 상처도 안 났어. 계속 놀자!”
“그럼 이번엔 내가 좌광도 할래!”
“안 돼, 나 아직 다 안 했잖아. 내 차례 끝나면 네가 해!”
아이들은 시끌벅적하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중 한 아이가 멀리 봉우리 위의 정자를 보며 다른 아이들에게 말했다.
“저 대협들은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네. 저 중에 누가 가장 셀까?”
“그거야 모르지, 하지만 모두 다 대단해 보이는걸.”
”응, 나 얼마 전에 다른 대협들이 모두 저분들에게 예를 갖추는 걸 봤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자 장대를 든 아이가 웃음을 하하하 터뜨렸다.
“당연히 검을 차고 있는 사람이 제일 세지! 그다음이 팔 하나뿐인 대협이고, 그다음이 아무런 무기도 없는 사람, 제일 마지막이 관리 나리야. 하지만 저분들 모두 대단한 고수지!”
아이의 말이 끝나자 돌연 온화한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음? 그걸 어떻게 아느냐?”
아이들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푸른 장삼을 입은 우아한 남자가 어느새 그곳에 서 있었다. 옷자락을 바람에 휘날리며 살짝 눈을 감은 채 웃는 것이 산자락에 비치는 햇볕처럼 따스했다. 첫눈에 봐도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깨끗하고 온화한 분위기는, 보는 이에게 믿음직스러움과 더 친밀해지고 싶은 기분을 선사했다.
“왜냐면, 왜냐면요……. 왼팔만 있는 대협은 분명 두형, 두 대협이실 거예요. 그럼 그분과 함께 있는 건 신포(神捕)라 불리는 왕극 대협이실 테고, 이 모든 분과 교분이 있는 데다 귀래현에서 그간 보지 못했던 검을 든 선생이 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연비, 연 대협이시겠죠. 다른 한 분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며칠 전에 저분이 왕 신포와 무공을 겨루는 걸 보았어요. 승부는 결정 나지 않았지만, 저분은 왕 포두의 칼에 맨손으로 싸웠으니 좀 더 대단하다고 보는 게 맞잖아요.”
아이의 말을 들은 계연의 웃음이 더욱 환해졌다. 그는 두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시종일관 손에 장대를 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계연의 눈에 아이는 유달리 또렷하게 보였다. 그러자 계연은 마치 예전의 윤청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계연의 의식 세계에 있는 바둑돌에서도 감응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