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5화. 속세에 강림한 고선(古仙)
무량산은 무척 황량했으나 아무런 식물도 자라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잡초나 수목이 곳곳에 자라 있었지만, 대신 동물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고 벌레조차 없었다. 계연의 눈에 이곳에서 가장 흔한 색채는 각종 암석의 색깔이었으며, 주로 회색이나 황색이 대부분이었다. 척 보기만 해도 무척 견고해 보이는 데다, 따로 자리한 암석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진흙처럼 한데 뭉쳐져 있었다.
시선이 닿는 곳의 수목은 꼿꼿이 자라난 게 거의 없다시피 했고, 뿌리가 단단히 박혀 곳곳에 옹이가 진 모습이었다. 어느 나무 근처를 지날 때 계연이 손을 뻗어 이를 만진 뒤 두드려보니, 나무에서 나는 소리가 꼭 금속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고 촉감도 그와 비슷하게 단단했다.
중평휴가 머무는 산속의 거처는 마치 따로 존재하는 동천(洞天) 같아서, 동굴을 이용해 들어와야 했다. 그 안에는 조용히 수행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고, 잠을 잘 때 쓰는 침실도 있었다. 계연을 비롯한 세 사람이 이때 앉은 곳은 좀 더 특별해서, 공간이 널찍한 것은 물론이고 성인 키 정도의 높이에 7, 8장(약 21~24m) 길이의 틈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절벽에 난 틈이라 시야를 방해하는 것 없이 뻥 뚫린 커다란 창문과 같았다.
낮은 탁자에 방석 두 개가 나란히 놓여, 그 위에 계연과 중평휴가 앉았고 숭륜은 옆에 서 있겠다고 고집했다. 탁자 한쪽에는 찻물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 탁자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둑판이었다. 이는 중평휴가 오랜 세월 홀로 이곳에 머물다 보니, 무료할 때마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두는 것이었다.
“계 선생께서 가진 의혹이 무엇이든 제가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저도 계 선생님께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러자 계연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마침내 이렇게 물었다.
“그럼 중 도우께서는 이곳 무량산에 대해 먼저 설명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중평휴는 벽에 난 기다란 틈새로 시선을 던져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는 험준하진 않지만 크고 장엄한 무량산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량산은 끝없이 크고 넓다는 의미의 ‘무량(無量)’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 산은 두 세계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있으므로 이 산에는 양계산이라는 진짜 이름이 따로 있습니다. 무량산은 바깥에 말하기 위한 이름일 뿐입니다. 이 산맥은 엄청난 압력을 견디고 있는데, 높이 올라갈수록 내리누르는 힘이 더욱 강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만 장 높이의 상공에는 제가 지탱하고 있는 양의(*兩儀: 양(陽)과 음(陰), 또는 하늘과 땅) 현자(*懸磁: 공중에 뜬 자성, 자기) 진법이 있어, 선생께서 양계산으로 들어왔을 때 몸이 붕 뜨는 것처럼 느끼신 겁니다. 실은 산에서 높이 올라갈수록 더욱 압박을 느껴야 하는 게 맞습니다.”
중평휴는 바깥으로 보이는 산맥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사실 이 무량산도 옛날에는 높고 험준한 봉우리들이 즐비했었지요. 하하,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높은 봉우리들이 짓눌려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지금의 산세와 고도는 원래의 10분지 1, 2도 되지 않습니다.”
그 말에 계연은 멍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보았다. 공중에서 산으로 내려오면서 계연은 이 산이 비록 험준하진 않지만 그래도 규모가 절대 작지 않으며, 고도도 꽤 높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게 원래 높이의 1, 2할도 되지 않는다니!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돌이며 초목, 심지어는 흙을 포함한 산의 일체가 아주 단단해진 상태입니다. 아무리 도행이 높고 법력이 강하다 해도 양계산은 쉽게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영이 맑고 마음이 초탈한 자만이 이 산의 ‘무량’을 진정으로 초월할 수 있지요.”
중평휴가 양계산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자 계연은 이곳이 오랜 세월 동안 세간에 숨겨진 곳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중평휴는 아직 수행이 높은 경지에 이르지 않았던 때, 우연히 선도의 한 고인이 남긴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곳에는 고인이 언젠가 이곳에 들어올 이에게 남긴 당부 외에도 그가 남긴 신의(神意)가 있었다.
“그 신의는 동굴 속 거처에 흐르는 영기와 기류에 남겨져, 계속해서 반복되며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남긴 신의를 통해 보통 수행자들이 알지 못하는 온갖 신기한 이야기와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의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었지요…….”
그 고인은 아주 옛날에 살았던 천기각의 장수(*長鬚: 긴 수염을 일컬음) 장로였다. 하지만 이 장로의 도통(道統)은 천기각의 정통 전승에서 따로 떨어져나와 이곳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끊임없이 탐구를 이어 왔던 것이다. 이 도통의 수행자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수천 년 전 처음 양계산을 발견했다. 그때의 양계산은 높고 뾰족한 봉우리가 즐비한 곳이었고, 후에 천천히 변화가 시작되었다…….
계연은 그의 말을 듣다가 다시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중 도우의 뜻은, 그 일맥이 끊겼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중평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이곳에 남겨진 신의를 이어받아 어느 정도 사정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 일맥은 확실히 끊겼습니다. 그 장로는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오랜 세월 힘을 모아 천기를 엿보려다가, 결국 원신과 육신이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찢겨 버렸습니다. 장로는 죽기 전 겨우 신의를 하나 남길 수 있었는데, 그중 7할은 그의 진의(眞意)고 3할은 권고와 경계의 말이었습니다. 그 내용에는 다른 이들에게 쉬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말이 많았습니다……. 여기 제 제자라 해도, 하하, 그중 단 하나만 알 뿐 다른 것은 제가 감히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 모르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말한 중평휴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계연을 바라보았다.
“운주 남쪽의 속세에는 고선(*古仙: 옛 신선)이 깊은 잠에 빠져있는데, 매 갑자(*甲子: 60년)가 바뀔 때마다 승려, 도인, 백성, 권신, 귀족 등으로 태어났다 합니다……. 마치 천도(天道)를 피해 가는 것처럼, 죽은 후에도 혼백이 흩어지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쨌든 고선이 깨어나지 않으면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고, 고선이 깨어날지 말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만약 그 신선이 속세에 강림하면 다가올 겁수(*劫數: 액운, 재앙을 뜻하는 불교 용어)에 3할은 생기를 더할 수 있다더군요. 또한 이 양계산도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중평휴가 손가락을 접어 세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제가 여기서 양계산을 지탱한 지 어느덧 1,100년이 넘었군요. 양계산이 받는 압력은 나날이 커져 왔기 때문에, 만약 아무도 이곳을 지탱하지 않으면 산은 단단한 한 덩어리로 뭉쳐져 더욱 쉽게 부서질 겁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그 변화가 더 급격해져서 저도 이곳을 떠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휴우……. 이곳에서 천 백 년을 갇혀 있었으니, 양계산 바깥의 세상은 이제 꿈속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평휴가 이렇게 말하자 계연은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는 이 말에 담긴 뜻과 경지를 <운중유몽>에서 느껴본 적이 있었다. 다만 책에서는 소요(*逍遙: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로이 노니는 것)의 느낌이 강했고, 이때는 적막과 쓸쓸함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깊이 탄식한 중평휴는 한동안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계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왠지 모를 두려움이 담겨 있었고, 입술도 살짝 떨렸다. 그러다 마침내 낮은 소리로 내내 생각하던 질문을 내뱉었다.
“계 선생님, 저는 선생에 대해 점을 칠 수도 없고 선생의 깊이를 꿰뚫어 볼 수도 없습니다. 지금 선생께서 제 앞에 앉아 계시는 데도, 저는 선생이 수선자가 아닌 보통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저는 각종 방법을 동원해 수많은 사람을 찾아보았으나, 한 번도, 단 한 번도 오늘처럼 이런……. 선, 선생께서 바로 그 고선이시지요?”
그동안 숭륜은 사부를 대신해 속세를 유람하면서 영성(靈性)이 뛰어난 이들을 세심히 관찰해왔다. 연령과 성별을 불문하고 특별한 점이 발견되면, 때로는 그자의 일생을 관찰하기도 했고, 때로는 곧장 제자로 받아 자신의 능력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운주 남부가 바로 그가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곳이었다.
계연은 중평휴가 이렇게 많은 말을 쏟아내면서, 급히 답을 구하고자 하는 일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계연이 이곳에 오기 전에 했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양계산에 와서 중평휴를 만난 것은 어쨌건 간에 아주 잘된 일이었다.
중평휴의 물음에 계연은 사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사실대로 말해주고 싶었다. 마음속으로 여러 번 추측을 거듭해본 결과, 계연은 자신이 그가 말하는 소위 ‘고선(古仙)’일 거라는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확언을 하고 싶지는 않기에, 그는 잠시 침묵을 택했다.
계연은 눈을 감고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뒤, 천천히 눈을 떠 탁자 위의 바둑판을 내려다보았다. 그 위는 예상대로 채 끝맺지 못한 난국이 펼쳐져 있었다. 자기 자신을 상대로 두는 바둑 대부분은 대부분 이렇게 되기 마련이었다.
“처음 제가 깨어났을 때, 상전벽해(*田碧海: 뽕나무 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으로, 세상일이 덧없이 변천함이 심함을 비유하는 말)라는 말 그대로,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전에 제가 알던 곳이 아니었어요. 사실 그때의 저는 청력이 조금 남다른 것 빼고는 아무런 특기도, 법력도 없었고 원신도 안정적이지 못했어요. 심지어는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어, 하마터면 산속의 맹호에게 산채로 잡아먹힐 뻔했었죠. 만약 그때 운이 좋지 않았더라면, 제가 다시 깨어날 기회가 있었을지 모르겠군요. 그런데 어느새 이렇게 수십 년이 흘렀네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통에서 바둑알을 하나 꺼내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탁!
맑고 또렷한 소리가 내부에 메아리처럼 울리자, 계연의 마음속에 호탕함이 치솟았다. 뒤이어 계연이 미소 짓자, 한 줄기 맑은 기운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와 속세의 때를 씻어내리는 것 같았다.
“이왕 엉킨 판국이니, 제가 한번 깨보도록 하지요!”
계연이 말과 함께 바둑돌을 내려놓자, 중평휴와 숭륜이 모두 바둑판 위로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는 어느새 계연이 내려놓은 바둑알 단 하나에 의해 원래의 난국이 깨져 있었다. 한편 중평휴는 계연의 대답을 듣자 마음속의 근심과 우려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저, 계 선생님, 사실 방금은 백돌 차례였습니다…….”
이에 계연이 고개를 내려 보자, 자신이 방금 내려놓은 것은 흑돌이었다. 이에 그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했다.
“홀로 바둑을 두는 것도 무료하실 테니, 제가 중 도우와 한 판 두지요. 다른 일은 바둑을 두면서 천천히 얘기하도록 하고요. 이 바둑판을 빌리면 좀 더 쉽게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중평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소매로 한번 바둑판을 쓸었다. 그러자 그 위에 있던 바둑돌들이 흑과 백으로 나뉘어 바둑통으로 들어갔다.
“계 선생님의 말씀이신데 제가 따르지 않을 리가요. 먼저 시작하시지요.”
두 사람은 바둑돌을 손에 쥐자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한참 바둑돌만 내려놓던 그들은 마침내 다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