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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640화 (640/892)

640화. 취하지 못해 아쉽구나 (1)

마침내, 계연의 손이 가볍게 시구의 이마 위에 닿았다.

그 순간, 시구는 엄청난 공포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으며 시구의 모든 기운이 혼란스러워졌다. 시구는 곧 두피가 저릿하더니 몸이 저도 모르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계, 계 선생님……?”

“선생님?”

시구와 숭륜이 차례로 의문을 표하자, 담담한 계연의 얼굴에 마침내 미소가 퍼졌다.

“시구,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을 테니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도록 하죠. 하지만 그래도 경고는 할게요. 제가 방금 한 건, 결코 장난이 아니었어요. 그러니 앞으로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스스로 깊이 생각한 후에 하세요.”

말을 마친 계연은 다시 고개를 돌려 숭륜을 향해 말했다.

“숭 도우, 그가 떠날 수 있도록 이제 법기를 거두세요.”

“그래도…….”

숭륜은 망설였으나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결국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한 줄기 금빛이 시구의 몸에서 날아와 숭륜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시구는 자신의 원신이 다시 ‘살아’난 것을 느꼈다.

하지만 시구는 조금도 경거망동하거나 의식을 다른 시신으로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계연과 숭륜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 선생님. 이 제자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부님!”

시구는 이렇게 말하며 제 몸과 원신을 계속 살폈다. 하지만 조금의 이상한 점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전 그 손가락이 닿았을 때의 감각은 마치 하늘의 위엄이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공포였다. 절대로 착각이 아니었다.

계연과 숭륜은 결국 시구를 놓아주었다. 시구는 여전히 두려움을 느꼈지만, 구사일생한 기쁨이 좀 더 컸다. 비록 스승인 숭륜이 자신이 공들여 만든 묘구산의 포진을 파훼했지만, 오늘 이 일은 관점을 달리해보면, 자신에게 기댈 데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유일하게 시구를 불안하게 한 것은, 자신의 이마에 닿던 그 손가락이었다. 그는 그 안에 담긴 위력을 느꼈었다. 만약 그때 그가 하늘의 위엄에 짓눌려 죽었다면, 어쨌든 떳떳하게 죽었다고는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육신에서도 혼백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느껴지지 않으니 그게 더 두려웠다. 어느 날 그가 무슨 일을 잘못하면, 이를 느낀 계연이 곧장 그의 목숨을 가져갈지도 몰랐다. 최소한 시구의 원래 목적대로, 사부님이나 계 선생과 어떤 충돌도 일으키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라도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수밖에.

시구는 연신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며 예를 올린 뒤 떠나갔다.

계연과 숭륜은 그가 떠난 후에도 묘구산 깊은 곳, 어느 산 정상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다 멀리 지평선 위에 태양이 떠오르자, 숭륜이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계 선생님, 정말 저놈을 믿으십니까? 사실 이대로 저놈을 데리고 가서, 껍질을 벗기듯 천천히 원신(元神)을 제련한 뒤, 특별한 영물을 찾아내어 제 스승께 도와달라 청하면 다시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조금 아프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지금 상태보다는 나을 텐데요.”

이를 들은 계연이 눈썹을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그게 어떻게 ‘조금’ 아픈 정도인가? 자기는 설명을 듣기만 해도 간담이 떨릴 지경인데. 껍질 벗기듯 원신을 제련하다니 분명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 고통도 극형에 비견될 것이었다. 어쩌면 저승에서 잔혹하기로 유명한 형벌보다 더 고통스러울지도 몰랐다.

“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깊군요…….”

계연이 그런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시구는 이미 떠났기 때문에 숭륜도 더는 숨길 필요가 없었으므로,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어쨌든 한때 사제였고 저도 저 아이를 좋아했으니, 지금 저 꼴을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 오래 수행을 닦고도 아직도 이기심을 버리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도 만약 제가 가르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면, 저놈이 어찌 지금과 같은 상황에 놓였겠습니까.”

“선인도 사람이니 그런 감정이 드는 것도 당연한 거예요. 숭 도우도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사람은 모두 자기만의 뜻이 있고, 시구도 스스로 원해서 지금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 것이니 이는 숭 도우의 잘못이라 할 수 없어요. 참, 시구의 본명이 대체 뭔가요?”

계연은 자신이 아직도 시구의 본명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시구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자 숭륜은 눈에 회한이 가득 차더니 복잡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원래 이름은 숭자헌(嵩子軒)입니다. 제가 지어준 이름이지요. 하지만 모두 옛일입니다. 제 제자는 이미 죽었으니, 그냥 시구라고 부르십시오. 선생님, 이곳 천보국의 일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천계맹에서 나름대로 자격이 있고 신임을 받는 일원 대부분은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두 명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수가 함께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행동했다. 게다가 각기 다른 목표를 위해 움직이는 이들은 서로 간의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이렇게 모인 구성원들은 요괴, 마귀, 귀신 등 각기 다양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같은 공간에 머무르기도 어려운 이런 수행자들이 함께 통일된 규율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만으로도, 계연은 천계맹을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시구가 천보국에 있던 것도 당연히 우연이 아니었다. 그에게도 같은 명령을 받은 동료가 있었다. 다만 강시 같은 삿된 존재는 요마들 사이에서도 가장 멸시당하는 존재였다. 물론 시구는 뛰어난 실력을 지녀 누구도 감히 그를 얕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와 가까이 지내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원래도 그런 상황이었던 데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으니, 시구가 제 동료들을 깨끗이 팔아버린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본인이 당장 죽게 생겼는데 동료는 무슨 동료란 말인가?

그래서 계연과 숭륜은 천보국에 시구 말고도 천계맹의 일원이 몇 명 더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숭륜이 물은 것도 바로 이에 관해서였다.

계연도 곰곰이 생각하더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일단 제가 먼저 조사하도록 하죠. 숭 도우께서도 처리할 일이 있으실 테니, 먼저 돌아가 보세요. 천계맹에는 얕잡아 볼 수 없는 이들이 많이 있으니, 괜히 이곳에 머물렀다가 시구와 또 접촉하면 그땐 누군가 알아차릴지도 몰라요.”

그 말에 숭륜도 고개를 끄덕였다. 구미호 하나만 해도 이미 매우 꺼림칙했다.

“그럼 선생님은요?”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스스로 드러나길 원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저에 대해 점칠 수 없어요. 최소한 지금 상황에서는요.”

계연의 말에서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현재의 국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아니었다. 비밀스러운 일을 많이 알아갈수록, 그는 자신의 존재가 가지는 의의에 대해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자 숭륜이 미소 지으며 일어나 계연을 향해 장읍례를 올렸다.

“그렇다면 후에 무슨 분부가 있으시거든 언제든 알려주십시오. 후배는 이만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를 본 계연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하려 하자, 숭륜이 다급히 저지했다.

“앉아 계십시오, 선생님. 이만 가보겠습니다!”

숭륜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더니 한 발이 공중에 뜬 순간, 어풍술을 이용해 맑은 바람을 타고서 몸을 돌려 날아갔다.

숭륜이 떠난 후에도 계연은 산꼭대기 위에 앉아서 무릎을 접어 올려 그 위에 오른손을 올린 채로, 텅 빈 방석 두 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소매에서 백옥으로 된 천두호를 꺼내, 주둥이를 살짝 기울여 향긋한 술을 받아마셨다.

“꿀꺽, 꿀꺽, 꿀꺽…….”

그렇게 연달아 몇 입 마신 계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속 술을 마시며 산에서 내려갔다. 실은 가끔 계연도 취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는데, 예전에 도행이 얕았을 때 취하려고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지금은 취하려면 일단 제 몸이 술기운을 몰아내지 않아야 했고, 술의 양이나 질도 매우 중요해졌다.

천보국에 있는 천계맹에 속하는 요마들이 일으키는 문제는 절대로 작지 않았고 복잡하기도 했다. 그들은 보통의 요마처럼 생각나는 대로, 혹은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훨씬 은밀하고 계획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달성하려는 목적은 결국 단 하나로 귀결되었다. 천보국 속세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감정을 지닌 중생 가운데 가장 수가 많은 이들이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처럼, 인간은 날 때부터 영성과 지혜를 갖고 태어나 다른 존재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속세에서 인도(人道)의 세력이 약해지면 신도(神道)의 힘도 크게 약해진다. 게다가 속세가 혼란스러워지면,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원념과 삿된 기운으로 인해 사악한 존재들이 태어나고 모여든다.

천보국은 건국된 지 수백 년이 된 나라이고, 겉으로 보면 아주 흥성한 듯했지만 실은 한 무더기의 골칫거리를 안고 있었다. 심지어 어젯밤 계연과 숭륜이 점괘를 쳐본 결과, 어느 대단한 인물이 이 형세를 뒤집지 않는다면 천보국의 기운은 점차 쇠락할 게 분명했다.

다만 그것이 언제일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조월국처럼 진작에 무너졌어야 할 구멍이 숭숭 뚫린 나라도 지금까지 버티고 있지 않은가. 국가의 존망은 무척 복잡한 문제고, 정치와 사회는 여러 방면과 관련되어있어 이렇게 숨만 붙은 상태였다가도 금방 상황이 또 뒤집힐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속세의 일은 인간에게 달려있고, 그곳에 자생하게 된 요마가 있다면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계연에게도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은 모두 자신이 저지른 일의 결과를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천계맹은 예외였다.

계연은 자신이 운주에서, 최소한 운주 남부에서는 비교적 활발히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천보국의 반 정도는 어떻게 보면 운주 남부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니 계연이 ‘우연히’ 천계맹의 요마를 만나는 것도 전혀 의심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시구는 비록 이곳에서 도망쳤지만, 그렇다고 천계맹이 곧바로 그를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누가 봐도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정 안 되면 한 놈을 더 살려서 시구가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할 수도있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계연을 기쁘게 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우패천과 오랜 원한이 있는 여우 요괴도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계연이 하려는 일은 아주 단순했다.

첫째, ‘우연히’ 요사스러운 존재를 마주쳤는데, 그들의 내력이 심상치 않은 걸 보고 정도(正道)를 걷는 수선자들이 해야 할 일을 한다. 둘째, 다른 이들은 놓아줄 수도 있겠지만, 그 여우는 반드시 처리한다!

여기서 가까운 큰 성에는 계연이 꼭 가야 하는 곳이 있었다. 그 여우와 깊은 관련이 있는 한 대갓집이었다.

계연은 그렇게 술을 마시며 홀로 생각에 잠겨 빠른 속도로 묘구산 깊은 곳을 벗어났다. 그리고는 무덤이 가득한 외곽지대를 지나, 왔을 때 올라온 길을 따라 산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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