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화. 아는 사람
요씨가 계산대 뒤에 서서 감청락과 계연을 향해 공손히 인사하자, 두 사람도 그를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그 순간, 계연은 자신이 들어온 곳과 다른 쪽 길에 마침 작지 않은 행렬이 지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행렬에는 마차는 물론이고 수많은 시녀와 하인이 따르고 있었고, 커다란 말에 올라탄 호위들도 있었다. 게다가 그중에는 계연이 아는 사람도 있었다.
이때 감청락도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더니, 돌연 계연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계 선생님, 여기서 술을 고르고 계십시오. 감모는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저 행렬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러자 감청락은 고개를 돌려 행렬이 이미 지난 곳을 한번 바라본 뒤 다시 계연을 보았다. 그는 계연이 남다른 인물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숨김없이 대답했다.
“조금 전에 지나간 행렬 중에 말에 탄 여관(女官)이 하나 있었는데, 연량국 출신의 육천언이라는 자입니다. 그녀가 저 행렬에 있는 걸 보니, 저 마차에는 필시 대단한 자가 타고 있을 겁니다. 제가 따라가서 조금 지켜본 뒤, 만약 무슨 재미있는 걸 발견하면 돌아와 선생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은 계연도 이미 육천언을 알아본 후였다. 게다가 그는 연량국의 장공주인 초여언과 혜동대사도 저 행렬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연은 굳이 그것을 말하지 않고 그저 감청락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보세요. 저는 여기서 술을 사고 있을게요.”
“예, 멀찍이서 조금만 따라갔다가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감청락은 가게를 나서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행렬이 떠난 방향으로 향했다.
“떠들썩한 걸 좋아하시나 보군…….”
계연이 웃으며 중얼거리자 한쪽에 있던 주인장도 그 말을 듣고 동의하며 웃었다.
“감 대협은 항상 그랬습지요. 참, 술을 얼마나 사 가시렵니까? 담을 용기는 있으신지요? 감 대협께서 들고 온 술통은 제가 이미 꽉 채웠습니다.”
계연은 계산대 뒤에 선 노인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소매 안에서 천두호를 꺼냈다.
“이걸…… 음, 그냥 한 단지 주세요.”
계연은 원래 천두호에 가득 담아 달라고 하려다가, 가게에 놓인 크고 작은 항아리를 살펴보고는 그걸 전부 합쳐도 천두호에 차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게다가 냄새로 보아 그중에는 아직 충분히 묵지 않은 것도 있었다. 계연은 술을 마실 때 그리 깐깐하게 굴지 않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가장 좋은 것을 골랐다.
“예이! 대교주 한 항아리 말씀이시지요. 정말 물건 볼 줄 아시는군요. 저희 술은 마개만 열면 향기가 사방을 뒤덮을 정도로 향긋합니다요. 보십시오, 여기 이 항아리에는 술이 4근(*斤: 1근은 600g) 들어있는데, 10년 이상 된 것입니다…….”
“그런 거 말고 저걸로요.”
계연은 노인의 말을 끊고, 그가 계산대 위에 들어 올린 작은 항아리를 보다가 손을 뻗어 점포 뒤쪽을 가리켰다. 그 뒤에는 사람 허벅지 높이만큼 커다란 술 항아리가 두 줄로 늘어서 있었다.
“예?”
“왜 그러시죠? 저건 안 파는 건가요?”
“파, 팔지요, 팝니다! 당연히 팔죠! 근데 이 항아리가 좀 커서 말입니다. 저, 선생은 어디에 묵으시는지요? 제가 수레를 끌고 가서 배달해 드릴까요?”
“일단 계산부터 해주세요. 술은 제가 들고 갈 수 있어요.”
계연이 미소 지으며 이렇게 대답하자, 노인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더욱 공손히 말했다.
“저 항아리에는 술 60근이 들어있습니다. 그것보다 많을 순 있어도 절대 그보다 적진 않습니다, 저는 양심적으로 장사하거든요. 그러니 60근으로 계산하면…… 1, 200문(文) 주시면 되겠습니다요. 은자도 받고 동전도 받습니다.”
그럼 한 근에 20문인 셈이었다. 이 정도 품질의 술치고는 아주 합리적인 가격이었다.
잠시 후, 계산대 위에는 무게를 재고 난 쇄은자(碎銀子)가 가득 쌓여 있었고 노인은 멍한 얼굴로 골목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 전 그 커다란 술 항아리를 낑낑대며 측문 근처로 옮겼는데, 값을 치른 계연이 곧바로 한 손으로 그것을 잡더니 성큼성큼 걸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이를 본 노인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로 말문이 막혔다. 저건 항아리 무게까지 더하면 백 근은 거뜬히 넘었다. 자기가 옮겨도 그리 힘이 드는 것을 저런 허여멀건한 서생이 번쩍 들다니, 과연 감 대협이 데려온 사람다웠다.
그러다 주인장은 무언가를 깨닫고는 계연의 모습이 사라진 골목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선생, 감 대협께서는 여기서 기다리시라고 했었는데요!”
그러자 잠시 후 어디선가 계연의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찾아갈 수 있으니까요.”
커다란 항아리를 든 채로는 일단 길을 걷기도 불편한 데다가 지나는 이들의 이목을 끌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항아리를 수레에 올려놓고 옮기는 것도 아닌 데다가, 이런 옷차림에 커다란 술 항아리를 들고 가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단 장안법을 펼쳐, 누구의 이목도 끌지 않고 골목을 나와 바깥쪽 거리에 이르렀다.
그는 술 항아리를 밀봉한 봉니(*封泥: 문서나 술을 밀봉할 때 사용한 진흙 덩어리)를 살짝 쳐서 떼어낸 후, 한 손으로는 천두호를 다른 한 손으로는 커다란 술 항아리를 들었다. 그러자 술 항아리 안에 있던 술이 저절로 한 줄기 수룡(水龍)처럼 솟구쳐 천두호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잠시 후, 커다란 술 항아리 안이 텅 비었다.
“이건 어쩌지…….”
계연은 이렇게 중얼거리다가 결국은 항아리를 버리지 않고 소매 안으로 빨아들였다. 주인장이 사실 이 항아리값만 50문(文)인데, 그냥 드리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 것이다. 설령 항아리값을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이걸 갖다주면 그도 분명 좋아할 것이다.
그렇게 거리를 따라 반각(半刻) 정도 걸으니 계연은 감청락이 서둘러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곧장 계연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가 계연을 보았을 때는 고작 7, 8 걸음 남겨둔 거리였다.
“계 선생님? 가게 안에서 기다리지 않으시고요?”
“술도 샀고 구경이나 하려고 나와 봤어요. 그래서, 조금 전에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었나요?”
계연이 이렇게 묻자, 감청락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와 주위를 경계하듯 살짝 둘러본 뒤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정말 공교롭지 뭡니까. 그 여인은 대열을 따라 혜씨 저택으로 들어가더군요.”
감청락은 이렇게 말하는 동시에, 계연에게서 무언가 알아내려는 듯이 그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는 그가 계연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공교로운 일이 일어나자 강호인으로서 보이는 조건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아, 그랬군요. 하지만 그 정도 행렬을 이끌고 온 걸 보니 분명 보통 신분이 아닐 거예요. 혜씨 일가는 이 성에서 가장 권세 높은 자들이니, 그런 이들이 혜씨 저택에 방문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그럼, 저도 지금 가는 게 좋겠어요. 어쩌면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자 감청락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함께 혜씨 가문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 술통을 찾아가야 해서요.”
감청락은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을 굳게 믿고 있었다. 첫인상을 보고 잠깐의 대화를 나누면 어느 정도 마음에 결론이 서는 편이었다. 특히나 함께 술을 마신 경우엔 그 판단이 좀 더 정확했다. 오늘 계연과 함께 얼마간 시간을 보낸 결과, 그는 계연이 결코 음험한 속셈을 지닌 소인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러니 함께 혜씨 저택에 가면 혹시 모를 구경을 할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이 계연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가져왔거든요.”
계연이 가죽으로 된 술통을 감청락에게 건네자 그가 깜짝 놀랐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계연이 이걸 들고 있는 걸 보지 못했는데, 보아하니 자신이 다른 생각에 빠져 잘못 본 모양이었다.
혜씨 일가는 연월부에서는 뿌리 깊은 대갓집이었고, 혜 노야(老爺)는 이곳 연월부의 지부(知府)였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인 노태야는 이전에 도성의 조정에서 일했던 대신이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 사직하고 돌아와 있었다. 그에 더해 혜씨 집안의 딸 하나는 황궁의 비빈이 되어, 그들은 이제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기까지 했다.
어쨌든 두 사람은 곧 혜씨 집안의 저택이 위치한 거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연은 묻지도 않았는데 감청락이 먼저 나서서 조금 전 본 그 여인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지녔으며, 강호의 실력자라고 불릴 만한지에 대해 늘어놓았다. 하지만 계연은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예의 있게 맞장구만 쳤다.
혜씨 집안의 대문은 아주 위세 등등해 보였으며 척 봐도 새것인 등롱이 높이 걸려 있었다. 그 앞에는 여덟 명의 호위가 문을 지키고 서 있었고, 아래에는 사자 모습의 석상 두 개가 세워져 있었다. 이 저택이 있는 거리는 꽤 번화한 곳이라 할 수 있었는데도, 이 저택을 둘러싼 어느 범위 안에는 노점도 행상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재상이 사는 곳보다도 더 위엄이 넘치네요.”
대문 앞의 위엄 넘치는 광경을 본 계연은 자신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왔으니 어쩌면 대문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감청락은 계연의 말을 듣고 웃으며 맞장구쳤다.
“사실 계 선생님 말씀이 틀린 건 아닙니다. 지금은 도성에 있는 재상도 혜씨 일가의 체면은 세워줘야 하거든요. 이 집안에서 혜비(惠妃)가 났으니까요…….”
감청락의 말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누군가 그들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뭐 하는 분들이오? 대체 왜 혜씨 가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것이오?”
“아, 대신 말씀 좀 전해주세요. 감청락, 감 대협이 혜 노야를 뵈러 왔습니다.”
계연의 말에 한쪽에 가만히 서 있던 감청락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계연을 향해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대문 앞에 서 있던 가정(*家丁: 집에서 부리던 남자 하인)이 먼저 이렇게 물었다.
“의호(*義豪: 의로운 호걸) 철권(*鐵拳: 쇳덩이처럼 단단한 주먹) 감청락? 저분이 감 대협이십니까?”
문을 지키던 여덟 명의 호위들이 계연을 보더니, 다시 그의 옆에 선 감청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수염만 봐도 감청락이 분명해 보였다. 조금 전에는 딱 봐도 풍채가 심상치 않아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갔었는데, 감청락이란 이름을 들으니 눈앞의 남자와 소문으로 전해지는 감청락의 생김새가 일치했다.
감청락은 입꼬리를 파르르 떨더니, 웃는 듯 마는 듯한 계연을 슬쩍 보고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호위를 향해 포권한 뒤 대답했다.
“예, 제가 바로 감청락입니다. 안에 말씀 좀 전해 주십시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감 대협. 지금 바로 아뢰겠습니다!”
문을 지키던 호위 하나가 다급히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설령 저자의 감청락이라는 신분이 가짜라고 해도, 이는 그가 판별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은 감히 조무래기나 사기꾼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계 선생님, 대체 무슨 속셈이십니까…….”
“저는 권세도 지위도 없고, 이름난 명사도 아니니 감 대협의 이름을 빌려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걱정하지 마세요, 대협께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도 정 못 믿으시겠다면 먼저 가셔도 되고요.”
감청락이 낮은 소리로 속삭이듯 물었으므로 계연도 작게 대답했다. 감청락은 자신이 혹 무슨 일에 연루될까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자 조금 얼떨떨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