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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643화 (643/892)

643화. 움직이지 마세요

잠시 후, 저택 안으로 들어갔던 호위가 경장 차림의 중년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그는 감청락을 자세히 보고는 그의 신분을 확신했다.

“정말로 감 대협이시군요. 어서 들어오시지요. 참, 이쪽 선생은 누구십니까?”

“저는 계씨이고, 감 대협과 함께 왔습니다.”

“아, 계 선생이시군요. 두 분 모두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계연과 감청락은 사양하지 않고 그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에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지은 정자와 누각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고 시녀와 하인이 무리를 이루어, 누가 봐도 권세 높은 귀족 가문의 저택이었다.

* * *

저택 안의 한 응접실 안에는 연량국 장공주인 초여언과 그녀를 수행하는 여관(女官) 육천언이 그곳에 앉아있었다. 그들 외에도 장공주를 모시는 두 명의 측근 시녀와 가사(*袈裟: 승려가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치는 법복(法服))를 걸친 승려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혜동대사였다.

세월이 적지 않게 흘렀음에도 초여언은 여전히 수려한 자태를 뽐냈다. 그녀에게는 세월이 남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운치가 더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처음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의 분위기와 달리, 그들을 데리고 온 혜씨 가문 사람이 밖으로 나가자 세 사람의 표정은 단번에 엄숙해졌다.

“혜동 대사, 여기서 정말로 요기(妖氣)가 느껴지십니까?”

육천언이 낮은 소리로 이렇게 물으며, 눈으로는 응접실 변두리에 선 저택의 계집종 몇몇을 바라보았다. 혜동 대사는 입술만 살짝 움직여 이렇게 대답했다.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옅긴 하지만, 그동안 대량사의 보리수 아래서 수행하며 심오한 도(道)와 부처의 비호를 받았으니 절대 제가 틀렸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요기는 하나가 아닙니다. 어떤 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옅고, 어떤 건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먼 것 같기도 하여 아주 모호합니다. 아마 이곳에 자주 오는 게 아니거나, 기척을 숨기는 데 아주 능한 것이겠지요. 둘 다일 수도 있고요, 정확히 판단하긴 어렵습니다.”

“장공주마마께서 위험해지시진 않겠습니까?”

“선재 대명왕불! 소승, 전심전력으로 장공주마마의 평안을 지킬 것입니다!”

그러자 초여언이 혜동 대사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혼인하지 않아서 적지 않은 이들이 뒤에서 험담을 늘어놓았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부실 정도의 미소에도 혜동 대사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럼 이 일을 혜 노야께 우선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육천언이 장공주에게 이렇게 묻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겠구나. 지금 가장 급한 일은 혜동 대사와 함께 천보국 도성으로 가서 이곳 황제를 알현하는 것이니까. 어쨌든 곧 혜 노야도 돌아올 테고 말이야.”

그 순간, 혜동 대사는 표정이 엄숙해지더니 두 사람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두 사람은 즉시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평온한 태도로 웃으며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 이분이 연량국의 장공주마마이시군요! 과연 아름다우십니다, 같은 여인인 제가 봐도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요!”

요염한 자태에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여인이 하인 몇 명을 거느리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초여언에게 잠시 시선을 던지며 이렇게 말한 뒤, 다시 육천언을 지나 혜동 대사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대량사의 고승인 혜동 대사이시지요? 천보국에서 오랫동안 대사의 명성을 흠모해왔습니다! 아, 제가 인사를 잊었군요. 저는 류생언(柳生嫣)이라 합니다. 장공주마마와 같은 ‘언’ 자를 쓰지요. 장공주마마와 혜동 대사를 뵙습니다!”

여인이 미소 띤 얼굴로 만복례를 올렸다. 초여언은 연량국의 장공주 신분이었으므로 당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할 필요가 없었고, 혜동 대사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며 인사했다.

“선재 대명왕불. 소승 인사드립니다!”

“하하하, 혜동 대사께서는 정말 생김새가 준수하시군요. 어쩐지 장공주마마께서 일편단심이시라더니…….”

여인이 다가와 미소 띤 얼굴로 혜동 대사에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지려 했다. 혜동 대사가 한 걸음 물러나 손길을 피하는 동시에, 그의 눈 깊은 곳에 불광(佛光)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희미했지만 눈앞의 여인에게서 요기가 보였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몸 밖으로는 새어 나오지 않았다. 만약 그가 보제(*菩提: 보리수) 명경(*明鏡: 명정지경(明淨之鏡)의 약자로, 불교에서 티끌 하나 없는 맑은 마음을 이름)을 수행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대단한 요괴로구나. 원래 모습이 무엇일지는 모르겠군!’

“흥, 류 부인 자중하시오!”

초여언이 이 경박한 여인이 감히 혜동 대사에 닿으려 하자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육천언은 앞으로 살짝 나와 류생언이 그들에게서 물러나도록 했다.

* * *

그때, 혜씨 가문의 앞뜰에서는 계연과 감청락이 집안의 관사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당연히 장공주와 혜동 대사가 있는 응접실로 안내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관사는 그들을 정성껏 맞이했다. 그때 계연이 돌연 걸음을 멈추더니 저택 안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계 선생님, 어찌 그러십니까?”

“하하, 여우굴이 다 되었구나, 내가 너무 높이 평가했나 보군! 감 대협, 이 세상에 요괴가 있다면 믿으시겠어요?”

계연은 원래 저택 안으로 들어오면 천천히 일을 진행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예?”

감청락이 대답하기도 전에 계연의 모습이 희미해지더니, 곧이어 연기처럼 변해 저택 내 어딘가로 떠나갔다. 뒤이어 감청락은 자신의 동작이 왜인지 무척 느려진 것을 발견했다. 손을 들어 올리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감청락이 번쩍 정신을 차렸을 때, 계연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감 대협, 이쪽입니다.”

관사가 정중한 태도로 웃으며 그를 안내했다. 그 모습은 마치 계연이 사라진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계연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기억도 못 하는 것 같았다.

‘허, 계 선생님은 과연 대단하신 분이었어…….’

* * *

감청락이 속으로 놀람을 가라앉히는 시각, 다른 한쪽의 응접실 안에서는 류생언의 눈에 차가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여전히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며, 웃는 얼굴로 육천언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저는 곧 입궁하신다는 유명한 고승과 오래 흠모해 온 장공주의 풍채를 직접 뵙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노야께서도 금방 돌아오실 테니, 제가…….”

그 순간, 고저 없이 평온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 여우는 어디에 있죠? 황궁에 있나요?”

류생언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넓은 소매의 푸른 장삼을 입은 계연이 아무런 표정 없이 그곳에 서 있었다.

“제 이름은 계연이라 합니다, 아마 들어본 적이 있겠죠?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혼백과 육신을 모두 소멸시켜 버릴 겁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했으나 왠지 모를 위력이 느껴져 류생언의 동공이 두려움에 잔뜩 수축했다. 그녀는 마치 온몸이 얼음 구덩이에 빠져 사지가 뻣뻣하게 굳은 것처럼 느껴졌다. 움직이긴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계연이 나타난 순간, 응접실 바깥쪽에 서 있던 계집종과 하인, 장공주 초여언을 모시는 측근 시녀 두 명은 모두 깊은 잠에 빠진 듯 가볍게 바닥에 쓰러졌다.

류생언은 필사적으로 말을 뱉으려 입술을 달싹였다. 계연은 언제나 온화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지금 그를 앞에 둔 류생언은 그것이 더욱 두렵게 느껴졌다. 질식할 듯한 강렬한 공포가 자신을 덮치자, 류생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세상 만물을 꿰뚫어 보는 듯한 계연의 두 눈과 마주했다. 그러자 요행을 바라는 마음마저 류생언에게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눈과 마주한 순간, 류생언은 이 사람이 정말로 계연임을 알 수 있었다.

계연은 류생언의 반응을 보고는 만족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보아하니 정말 날 아는 모양이군요.”

계연은 이제 비교적 유명한 존재가 되었으나, 사실 그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선도(仙道)를 닦는 이들 가운데서는 계연을 직접 만난 이들 말고는 사실 그의 이름을 들어본 자가 많지 않았다. 계연과 가까이 지내는 이들은 더욱이 밖으로 그 일을 떠벌리지 않았다.

대정국의 도를 닦는 이들 사이에서의 명성은 이 나라 안에서만 자자했다. 그리고 늙은 용의 일맥들을 제외하면, 요괴 가운데 계연에 대해 잘 알고 이토록 두려워하는 이들은 오직 천계맹뿐이었다.

“계 선생님이시군요!”

“계 선생님!”

초여언, 육천언 그리고 혜동 대사 세 사람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반가워하며 이렇게 소리쳤다. 계연은 그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류생언에게 시선을 돌렸다.

“움직이지 말라고만 했지, 말은 아직 할 수 있을 텐데요. 그 여우는 지금 황궁 안에 있나요?”

계연은 류생언이 지금 자신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 거라 확신했다.

“계, 계 선생께 아룁니다. 저는 도대체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랫동안 선생님의 위명을 들어왔는데, 살생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선도의 고인이시며 저와 같은 요괴에게도 편견이 없으시다고…….”

“환술을 부리는 능력이 대단하긴 한데, 제 눈에는 아직도 사악한 살기가 보이는군요. 이왕 제가 계연인 걸 알고 있다니, 그럼 제가 결코 당신 같은 요괴를 살려두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겠네요. 하지만 만약 질문에 성실히 대답만 하면 살길을 열어주도록 하죠.”

그러자 류생언은 눈을 반짝 빛내더니, 무의식적으로 치맛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계연은 류생언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신경도 쓰지 않고, 아예 시구를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이렇게 물었다.

“우연히 천보국을 지나다가 맛 좋은 술을 찾아 이곳에 들렀는데, 혜씨 가문의 저택에서 은밀히 숨겨진 요기가 느껴지더군요. 당신의 기운이 아니라, 어쩐지 익숙하고 희미한 요기였어요. 아마 제가 예전에 만났던 어느 여우겠죠. 저는 원래 속세를 그리 많이 돌아다니지 않는데, 그 여우는 절 한 번에 알아보더군요. 분명 도사연과 무슨 관계가 있는 여우일 거예요.”

계연은 옛 기억을 떠올리는 듯한 어조로 이렇게 설명한 뒤 다시 류생언을 바라보았다. 그는 곧 3할의 진실, 3할의 거짓, 그리고 4할은 유도신문의 목적을 담아 물었다.

“도대체 여우들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거죠? 도사연만 옥호동천에서 온 건가요, 아니면 나머지도 전부 옥호동천에서 온 건가요?”

류생언은 심장이 덜컹했지만, 겉으로는 잘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냈다.

“도사연이요? 저는 모르는 자입니다. 옥호동천은 저희 여우들의 성지인데, 멀리 서역의 남주에 있고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들어갈 자격은 없습니다. 만약 제게 옥호동천에서 수행할 자격이 있었다면, 뭐하러 한낱 평범한 사람에게 시집와서 이런 고생을 하겠습니까……. 선생님, 저는…….”

“시치미도 잘 떼는군요. 이왕 제가 함부로 살생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니, 그럼 제가 당신이 지금껏 쌓은 도행을 없애버리면 어떨까요? 다시 흐리멍덩한 상태의 야생 여우로 돌아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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