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647화 (647/892)

647화. 경계

혜동 대사는 여전히 평온한 태도로 대답했다.

“선재 대명왕불, 그동안 대량사에서 불법과 심오한 도를 지켜보며 깨우친 바를 써 내려간 진경(眞經: 종교의 경전을 일컫는 말)에, 보리수의 염주까지 찼었으니 분명 아무런 영향도 없진 않을 겁니다. 보기엔 괜찮아 보였지만 실상은 모르지요.”

그는 이렇게 말한 뒤 다시 초여언을 바라보았다.

“그 요괴는 분명 저희에게 손을 쓰려고 들 테지만, 계 선생님께서 이 성안에 계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제가 혜비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첫째로 그 요괴의 실력이 꺼려졌기 때문입니다. 정체를 들킨 마당에 오히려 걸릴 것 없이 날뛸 수도 있으니까요. 둘째로는 그 요괴의 신분 때문입니다. 그녀는 아마 직접 나서지 않고 다른 요마들을 보낼 테니까요. 장공주마마, 오늘 밤에는 절대 주무시면 안 됩니다.”

“네! 그럼 오늘 밤에는 대사와 함께 참선하도록 하죠.”

혜동 대사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했다. 그러자 초여언이 기쁜 듯 미소 지었다.

한편 마차 밖에서는 육천언이 거리를 오가는 이들을 유심히 살피며 경계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녀는 마차 안에 있는 이들보다 훨씬 긴장한 상태였다. 그동안 강호의 고수와는 많이 겨뤄보았지만, 요괴를 상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 *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다.

거리를 오가던 행인들은 일찍이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황성에는 야간 통행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관 바깥의 거리는 모두 텅 비어 무척 황량해 보였다.

그때, 먹처럼 검은빛이 한 줄기 한 줄기 어둠을 가르고 나갔다. 그 빛은 무척 작고 가늘어 거리를 덮은 어둠과 밤하늘 아래 거의 완전히 융화되어 있었다.

이 작고 가느다란 검은빛은 종루를 중심으로 활짝 핀 꽃 모양을 이루며 거리와 담벼락, 지면으로 퍼져나갔다. 그리하여 곧 황궁을 포함한 도성의 반을 덮어버렸다.

황궁 가까이 자리한 역관에서는 초여언과 혜동 대사가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불경을 외고 있었다. 방 안팎을 비롯한 곳곳에는 불문(佛門)의 법기가 놓여 있었다. 계 선생을 믿긴 하지만, 혜동 대사는 그래도 나름대로 방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그저 그런 요괴가 아니었고, 그들 중에는 심지어 마두(魔頭)가 있을 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경건한 태도로 불경을 읽어 내려갔다. 혜동 대사는 초여언의 불경 외는 소리에서 불음(佛音)이 울려 퍼지는 것을 느꼈다. 이는 무척 보기 드문 것이었다.

불경을 끝까지 읽은 두 사람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장공주께서는 금지옥엽이신데도 불경을 욀 때 불음이 느껴지는 걸 보니, 부처와 연이 있으신 게 분명합니다.”

그러자 초여언이 웃으며 물었다.

“설마 제가 출가하도록 권유하시는 건 아니지요?”

혜동 대사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출가하고 말고는 모두 개인의 뜻에 달린 일입니다. 마음만 부처를 향하고 있다면 굳이 출가할 필요는 없지요.”

그러자 초여언이 반짝 눈을 빛내더니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잘됐네요, 여언은 마음에 색욕이 있어, 출가하기 적합지 않거든요!”

혜동 대사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먹물처럼 검은빛이 실내로 차례차례 들어오기 시작했다. 3장(약 9m) 거리까지 가까워진 후에야 이를 눈치챈 혜동 대사가 즉시 경계하며 소리쳤다.

“누구냐?”

그는 이렇게 소리치는 동시에 합장하며 공격을 날렸다.

펑!

소리와 함께 불광(佛光)이 파도처럼 일었다. 하지만 검은빛들은 마치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처럼, 기우뚱하긴 했으나 그 힘에 물러나진 않았다.

“그 승려야, 공격하지 마!”

“우리 편이야!”

“같은 편이야!”

갑자기 곳곳에서 앳되고 맑은 목소리가 들리며, 검은빛이 차례로 형태를 드러냈다. 공중에 떠 있는 것은 놀랍게도 영기 섞인 빛이 반짝이는 글자들이었다.

“스님, 어르신께서 저희에게 포진(布陣: 전쟁·경기 따위를 치르기 위해 진을 치는 것을 이름)하라 명하셨어요!”

“맞아요, 저희 어르신은 계 선생이세요.”

“여기 주위를 포함한 일대는 모두 준비가 되었어요. 어르신께서 오늘 밤에 분명 그놈들이 공격해 올 거라 하셨어요. 저희 말고도 스님을 도우러 누가 올 거예요. 하지만 이건 그냥 맛보기일 뿐이고, 진짜 구경거리는 뒤에 있대요!”

그들의 말을 들은 혜동 대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글자들은 척 봐도 영험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계 선생께서 지닌 특유의 심오한 도의 기운이 느껴졌다. 이를 보니 글자들이 하는 말이 사실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잠시 이 살아 움직이는 글자에 대한 경탄을 억누르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뒤에 있을 구경거리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글자들이 각기 먹처럼 검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그러니까. 어르신 같은 고인의 속내는 우리도 짐작할 수 없어요. 나중에 알게 되겠죠.”

“스님이라는 사람이 그 정도 인내심도 없어서야!”

“조용히 해, 어서 포진하자.”

“응!”

“그래!”

“어서 가자.”

뒤이어 어두운 빛이 번쩍이더니 글자들은 삽시간에 흐릿한 궤적을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종적은 혜동 대사가 보리수 혜안을 열어봐도 알 수가 없었다.

초여언은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다가 신기한 마음에 물었다.

“대사, 저 글자들은 어떻게 말을 하는 건가요? 모두 요괴가 된 건가요?”

“예, 정괴의 일종입니다. 천하가 이렇게 크니 무슨 신기한 일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글자가 정괴가 되었다는 것은 저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어쨌거나 계 선생께서 다음 수를 준비해 두셨다니 다행입니다.”

* * *

한편, 종루에서는 계연과 감청락이 지붕 위에 서서 멀리 적막에 잠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청락은 이 순간 강렬한 긴장과 흥분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도 바늘처럼 굵고 뻣뻣하던 수염이 더욱 철심 같아 보였다. 그에 더해 그의 머리와 수염은 은은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선생님, 요괴가 나타났습니까? 저희가 여기 이렇게 서 있는데, 우리를 발견하면 어쩌지요?”

계연이 손을 뻗어 성안 어느 곳을 가리키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왔어요. 두 명이에요. 마두는 없고 둘 다 요물이네요. 여기는 진법의 진안(陣眼: 진법의 중심)이라, 저들은 우리를 볼 수 없어요.”

계연은 이렇게 설명한 뒤 다시 감청락을 바라보았다.

“감 대협, 이 진법이 요마의 힘을 약하게 만들겠지만 그래도 요마와 맞붙는 것은 일반 무인과 싸우는 것과는 달라요. 상대할 때 조심하는 게 좋아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감청락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심호흡을 한 뒤, 지붕에서 뛰어내려 경공을 이용해 역관까지 날 듯이 질주했다.

뒤이어 계연도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맑은 바람을 몰고는 단 몇 걸음 만에 저 멀리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가는 곳은 진법의 내부가 아니라, 성 바깥이었다.

사실 오늘 밤 이곳을 찾아온 것은 요괴 둘뿐만이 아니었다. 진법 안에 들어온 두 요괴는 그나마 가장 약한 이들이었다. 현재 도성 밖 관도(官道) 위 상공에서는 또 다른 요괴와 마두가 도성 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궁녀의 차림을 한 여인 두 명이 역관 바깥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역관을 지켜야 할 시위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뒤이어 그들은 혜동 대사가 역관의 뜰 중앙에 앉아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뒤 양옆에는 육천언과 감청락이 서 있었다.

“선재 대명왕불. 요괴가 제 발로 걸어들어오다니, 소승이 직접 제도해주겠다!”

콰앙!

혜동 대사가 두 손을 모아 합장하자, 불광(佛光)이 파도처럼 몰려와 거리와 건물을 덮었다. 그러자 모두는 도성이 아니라, 마치 파도가 넘실대는 망망대해에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

이에 요괴들은 무의식적으로 공중으로 날아올라 이를 피하려 했는데, 가볍게 뛰어오른 순간 어쩐 일인지 비거술을 펼칠 수 없게 된 것을 느꼈다.

그때 은색의 석장(錫杖: 승려가 짚고 다니는 지팡이)이 후원에서 날아와 혜동 대사의 손에 안착했다.

“이왕 스스로 독 안에 걸어들어왔으니, 받아라!”

혜동 대사는 가볍게 공중으로 뛰어오르더니 석장을 역관 바깥을 향해 휙 휘둘렀다.

쿠궁……!

두 요괴는 재빨리 공중으로 뛰어올랐으나 날아오는 불광을 피하지는 못했고, 곧이어 온몸이 그을린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자 쉴 틈 없이 육천언과 감청락이 좌우에서 협공해왔다. 강호 고수의 무공 초식은 단로 안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길 같았고, 이때 그들의 몸에는 명왕의 법주(法咒: 법력을 이용한 주문)가 걸려 있어, 평소보다 몇 배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혜동 대사가 쉬지 않고 불경을 외자, 불음이 맴돌며 두 요괴의 마음을 내내 어지럽혔고 그들은 곧 찌르는 듯한 두통을 느꼈다. 혜동 대사는 그런 와중에도 요괴들을 향해 석장을 휘둘렀다.

한편 감청락에게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요괴들과 공격을 주고받을 때마다, 그들이 지닌 요기가 그가 지닌 살기를 자극해 머리와 수염이 붉은색을 띠게 된 것이다. 그의 동작은 바람처럼 민첩했고, 내지르는 주먹은 벼락같은 기세를 지녔다. 이에 그는 마음속으로 이 요괴들이 별것 아니라 생각하게 되었다.

펑!

마침내 그의 주먹이 눈앞에 있는 요괴의 몸에 명중했다. 하지만 마치 뼈가 없는 상대를 때린 것처럼, 주먹에 무언가를 때렸을 때의 반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죽어라!”

요괴가 순간적으로 포악한 소리를 내지르며 반격하자 감청락은 채 피할 새가 없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감청락은 뒤쪽에서 누군가가 엄청난 힘으로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날카로운 발톱이 번뜩이며 지나갔고, 가슴께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곧 긁힌 상처에서 피가 솟구쳤다.

치이익……!

“으아악!”

그러자 감청락보다 요괴가 먼저 비명을 내질렀다. 감청락의 피가 요괴의 몸에 닿자, 마치 보통 사람이 끓어오르는 기름에 덴 것과 같은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휴, 위험했습니다! 감사…….”

감청락은 이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에 그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혜동 대사와 육천언이 손을 잡고 다른 요괴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혜동 대사는 전에는 불상처럼 장엄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석장을 휘두르는 모습이 얼마나 용맹한지 몰랐다. 석장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고, 대사의 공격으로 주위는 이미 엉망이 된 상태였다.

‘보아하니 계 선생님께서 도와주신 모양이군!’

“하하하, 내 일평생 처음으로 요괴와 싸워보는데, 요괴란 것도 실은 별게 아니군. 덤벼라!”

감청락은 속으로는 경계를 바짝 세웠지만, 겉으로는 요괴를 도발하며 한창 자신의 피를 털어내고 있는 요괴를 공격했다. 감청락은 요괴의 몸에 닿은 자신의 피가 끓는 걸 보고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주먹 위에 바른 후였다.

감청락의 피에 닿은 요괴는 고통을 참느라 얼굴을 온통 찡그린 채였다. 요괴는 곧 반격하려고 날카로운 송곳니와 기다란 손톱을 드러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내내 굼뜨게 느껴졌던 요력(妖力)이 지금은 아예 무언가에 부딪친 듯, 뾰족한 손톱이 저절로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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