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2화. 깊은 고요
계연이 소매 속으로 손을 넣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 두루마리를 꺼내 활짝 펼쳤다. 그러자 잠시 후, 황궁 안팎에서 여러 개의 묵광(墨光)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바로 곳곳에 포진해있던 작은 글자들이었다. 글자들이 돌아오자, 계연의 주위에는 시끄럽진 않지만,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들이 맴돌았다.
“어르신, 저희 대단하죠?”
“저희가 어르신을 도와 요괴를 잡았어요!”
“어르신, 그 요괴를 튕겨 나가게 만든 게 바로 저예요!”
“저도요, 저도 도왔어요!”
“어르신, 저희가 그 금빛 요광(妖光)을 휘어지게 만든 것 보셨어요?”
계연은 모든 글자를 일일이 쳐다보며,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대단하구나, 대단해……. 큰 도움이 되었구나……. 그래, 나도 보았다…….”
잠시 후, 모든 글자가 <검의첩>으로 돌아가자, 계연의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글자들도 오늘 밤 능력을 발휘하느라 피곤했을 것이다. 정신적인 흥분도 신체의 피로를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인 듯, 글자들은 <검의첩>에 들어가자마자 수면 상태가 되어 수행을 닦았다.
종이학도 이때 날개를 팔락이며 돌아와 계연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계연은 종이학을 내려다보며 웃더니 곧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그렇게 궁금한 게 많고, 모든 걸 다 따라 하려 하면서 왜 말하는 건 배우려 하지 않느냐?”
그 말에 종이학이 계연을 보더니, 한쪽 날개로 제 부리를 툭툭 만졌다.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네가 말을 못 하는 게 입이 없어서라고 생각하느냐? 아직 수행이 부족하구나.”
지붕 위에 서 있던 계연은 웃으며 맑은 바람을 몰고서 황궁을 떠나갔다.
* * *
한편 피향궁 바깥에서는 요괴를 처리한 천보국 황제가 약간 실의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것을 마음속에 눌러두고서, 요괴를 잡는 데 큰 도움을 준 혜동 대사에게 무척 감사해하며 수천 명의 금군 병사들과 후궁의 궁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대례를 올렸다. 그에 더해 혜동 대사에게 황궁에서 묵고 가라고 제안했지만, 혜동 대사는 이를 거절하고 역관으로 돌아가 쉬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오늘 밤 도성 안의 백성 절반 정도는 조금 전에 들린 성 밖 두꺼비 소리에 깨어났었다. 이에 도성 안에 불이 밝혀지고 약간 소란스러워졌으나, 백성들은 결국 겨울밤 가끔 울리는 천둥소리라 여기고는 다시 마음 놓고 잠에 빠진 뒤였다. 게다가 큰 소동이 일어난 성 밖 풍경도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혜동 대사가 돌아왔을 때 성안은 여전히 고요에 잠겨 있었다.
황궁에 가까운 역관에서는 초여언과 육천언, 그리고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처음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회복한 감청락 모두 아직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 이들은 비록 계 선생께서 도성에 계신다는 걸 알았지만, 혜동 대사가 깊은 밤에 홀로 요괴를 처리하러 입궁하자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게다가 글자들이 진법을 펼친 덕분에, 이들에게는 황궁 쪽이 내내 조용해 보여서 황궁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들이 모두 초조해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 흰 승복에 붉은 가사를 걸친 혜동 대사는 이미 역관 밖에 도착해있었다. 그러다 그는 곧 역관 앞에 서 있는 계연을 발견하고는, 얼른 걸음을 서둘러 계연을 향해 불교식 인사를 올렸다.
“선재 대명왕불. 계 선생님, 소승이 다행히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요괴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대사가 이렇게 말하며 소매를 쭉 뻗자, 오른손에 금색 발우가 나타났다. 이때 발우에는 더 이상 불광(佛光)이 찬란히 빛나고 있지 않았고, 색도 조금 어두워 보였다.
그러자 계연도 혜동 대사를 향해 양손을 맞잡고 예를 취한 뒤 가까이 다가가 발우의 내부를 살폈다. 법안을 열어 보니 육미호(六尾狐)의 허상이 그 안에 희미하게 보였고, 그 위로 ‘만(卍)’ 자가 떠 있었다. 혜동 대사는 이런 방식으로 여우에게 남은 원기(元氣)와 요기, 악기(惡氣)를 모두 정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에 더해, 혜동 대사는 매일 발우를 향해 불경을 읽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도운을 제도해주는 거라 볼 수 있었으니, 그는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는 셈이었다.
“혜동 대사께서 펼친 금발인의 위력이 참 대단하더군요. 처음 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혜동 대사는 이미 출가한 사람이었는데도 마음의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과찬이십니다, 선생님. 만약 선생께서 주신 법전이 아니었다면, 소승 결코 금발인을 펼칠 수 없었을 겁니다. 선생님, 여기 남은 법전 다섯 닢입니다. 이번 기회로 이 귀중한 발우를 얻었으니 더욱 수행에 정진하려 합니다. 소승 이것만으로도 이미 큰 이득을 본 셈이니, 이 법전은 돌려드리는 게 맞습니다.”
혜동 대사의 손 위에 놓인 커다랗고 금빛 찬란한 법전을 보며 계연은 그중 세 닢만 거둬갔다.
“이 두 닢은 대사께서 갖고 계세요. 밤이 늦었으니 어서 들어가서 쉬죠. 내일 황제가 대사를 불러 상을 내릴 테니, 대량사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겠네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혜동 대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계연은 종루로 가서 쉬지 않고, 역관의 침상을 빌려 잤다. 종루에서 자면 어쨌든 새벽부터 누군가 올라와 종을 칠 테니 말이다. 한창 쉬는 와중에 돌연 종소리를 듣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 * *
천보국에는 사실 천계맹에 몸담거나 천계맹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요마(妖魔)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이미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몇몇은 아직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연월성 밖, 묘구산에서는 깊은 잠에 빠졌던 시구가 돌연 가슴이 덜컹하는 느낌에 눈을 떴다. 예전에 선도(仙道)을 닦았을 때 점괘를 배운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다급히 손가락을 구부려 점을 쳐보았다.
‘예상대로 결국 도운이 끝장났군…….’
이를 파악한 시구는 곧장 땅속 깊이 숨어들어 연월성에 자리한 혜씨 가문의 화원으로 향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혜씨 가문의 부인인 류생언이 서둘러 화원에 나타났다. 그녀는 두 눈에 괴이한 붉은빛을 번뜩이는 시구가 화원의 어둠 속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시구 어른,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시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쩐지 오늘 밤 불안한 마음이 들어, 점을 한번 쳐보니 도운에게 흉성(凶星: 불길한 징조를 뜻하는 별)이 비치고 있었소. 아무래도 무언가 큰일이 닥친 듯하오. 도운은 황궁에서 황제의 비호를 받고 있는데,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재앙을 불러왔을까? 류 부인께서는 혹 무슨 고견(高見: 남의 의견의 존칭)이 있는가?”
“예?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도운 언니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겼나요?”
류생언은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얼른 그것을 숨겼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도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류생언은 시구와 도운 등이 여기에 계연이 나타난 것도, 자신이 도운의 정체를 발설했다는 것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렇소. 내 비록 시도(尸道)를 닦지만, 점괘에도 능하다오. 아마 어떤 대단한 인물을 마주쳤는데 도운이 결국 몸을 빼내지 못한 듯하군. 대체 어디서 온 고인(高人)인지 모르나, 당신도 빨리 도망치는 게 좋을 것이오. 당신과 도운의 관계는 속세에도 널리 알려져 있으니, 그 고인도 곧 당신을 찾아올지도 모르지. 나는 오늘 경고해주러 온 것이오.”
류생언은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러다 그녀는 돌연 한기를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구의 붉은 빛을 띤 두 눈이 자신의 뒤에서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날카로운 송곳니 한 쌍은 이미 그녀의 하얗고 부드러운 목에 닿아 있었다.
“흐음……. 나는 왜 당신이 도운의 행적을 누설한 것 같지.”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도운 언니는 제게 항상 잘 대해줬어요. 저희 둘 다 여우이고 함께 큰일을 도모하는 사이인데 어떻게 언니를 해치어요!”
류생언은 그에게 팔이 잡힌 채로 온몸에 한기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강시가 자신의 목에 송곳니를 대자 느껴지는 감각에, 마치 자신이 작은 동물이 되어 맹수의 발톱 아래 눌린 것만 같았다.
“여우 피는 너무 비리단 말이지. 흠, 감히 날 속이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시구는 류생언을 놓아주고 천천히 깊은 어둠 속으로 섞여들었다. 류생언은 그가 정확히 어떻게 사라졌는지 보지 못했지만, 다시 그가 사라진 곳을 확인했을 때 시구는 어느새 자취를 감춘 후였다.
시구는 이번에는 묘구산의 무덤 아래로 돌아가지 않고, 법력을 이용해 천보국에 있는 천계맹 동료들에게 경고를 보낸 후 곧바로 천보국을 떠났다. 다른 이들이 떠나든 말든 이제 더는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천보국에서 결정권을 가졌던 이는 도운이었다.
* * *
그와 같은 시각, 계연과 함께 역관에 돌아온 혜동 대사는 마침내 계연과 이야기할 틈을 얻었다. 어쨌든 계 선생님께서도 궁에 함께 계셨으니, 그는 구태여 요괴를 잡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사가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은 감청락에 대해서였다. 해동 대사가 보아하니 계연은 감청락에게 무척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후에 계연 등은 모두 차례로 잠이 들었고, 도성 전체는 일찍이 깊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황궁마저도 그러했다.
계연은 꿈속에서도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멀리 민가에서 들리는 기침 소리, 말다툼 소리, 잠꼬대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섣달(음력 12월) 26일, 엄동설한인 날씨에 계연은 역관의 방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밖에서 빗소리가 솨아아 들리는 걸 보니, 오늘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날씨인 듯했다. 게다가 폭우도 가랑비도 아닌 딱 적당한 비였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계연의 귀에는 더없이 또렷하게 들렸다.
어젯밤 물을 다스리는 요괴가 죽었으니 그가 지닌 물의 정기(精氣)가 흩어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계연도 굳이 이에 간섭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이 비는 필연적으로 내릴 수밖에 없었고 그것도 아마 2, 3일은 지속될 터였다.
계연은 눈을 뜨고 침상이 놓인 벽에 기대어 앉았다. 창문을 열지 않고 가만히 빗소리를 들으니, 계연의 귀에는 빗방울 하나하나의 소리가 각기 다르게 들렸다. 계연은 그것만으로도 천보국 도성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계연은 역관 안의 단독으로 지어진 작은 원락에 따로 묵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계연의 생활 습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감히 아무 일 없이 계연을 방해하러 오지 않았다. 하지만 계연은 역관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듣고 있었다. 이에 당연히 사신단을 따라 도성에 올라온 혜씨 일가가 모두 금군에 의해 잡혀간 것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