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3화. 흰 장삼을 입은 남자
가만히 빗소리를 듣던 계연은 누군가가 주저하듯이 주위를 배회하며 내는 발소리를 들었다.
“감 대협, 깨어있으니 들어오세요.”
그러자 감청락은 기뻐하며 문을 열고 들어와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계연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선생님.”
“네, 감 대협께서도 잘 쉬셨죠? 어서 앉으세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편히 하세요.”
그동안 계연과 많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감청락은 그다지 어색해하지 않고 방 안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는 팔에 입은 상처를 감싼 붕대를 만지작거리다가 곧 궁금한 것을 직설적으로 물었다.
“선생님, 어젯밤에 제가 요괴와 비등하게 겨룰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선생께서 법력을 펼쳐 도와주신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에 더해 제 피가 특이한 덕도 있었겠지요. 그래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제 피가 대체…….”
감청락은 여기까지 말하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 본인도 대체 무엇을 물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연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곧바로 그의 물음에 답을 하지는 않고 다른 각도에서 설명해 주었다.
“보통 사람의 피에는 양기가 가득한데, 이는 보통 아주 온화한 성질을 띠고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아요. 강시나 악귀처럼 극도의 음기를 띠는 삿된 것들은 음기와 사기(邪氣)를 지닌 곳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의 피를 좋아하죠. 그것으로 원기를 흡입하고 음양의 조화를 맞추는 거예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감청락의 불그스름한 수염과 몸 곳곳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이후로 감청락의 수염과 머리카락 색은 아직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보통 사람과 달리, 감 대협이 지닌 피 안의 양기는 밖으로 드러나요. 게다가 대협은 오래도록 강호를 유람하며 무인으로서의 살기를 몸에 지니게 되었고, 그에 더해 독한 술까지 즐기니 격렬한 순간에 적염(赤炎)처럼 불타오르는 것이죠. 이를 수행계에서는 양살적염(陽煞赤炎)이라고 불러요. 요사한 존재들은 물론이고, 보통의 수행자들도 대협의 피에 닿으면 괴로워할 거예요.”
“그럼…… 제가 수행의 길에 들 수 있을까요?”
감청락이 조금 망설이다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계연도 웃으며 감 대협의 본의가 여기에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건 혜동 대사께 가서 한번 물어보시지요.”
계연의 말에 감청락이 순간 멍해졌다.
“예에? 선생님, 제게 승려가 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하하, 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더는 육근(六根: 불교 용어로, 눈·귀·코·혀·몸·의(意)를 뜻함)이 청정하지도 않고, 게다가 고기를 먹지 말라니 그건 죽으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승려가 되라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불문(佛門)에는 사실 반드시 출가해야 한다는 법도 없어요. 머리를 깎고 계율을 따르는 승려도 본질적으로 따져 보면 마음을 다스려 불성(佛性)을 함양하는 것이죠. 제가 불문의 고인과 함께 도를 논해보니, 불문의 법도 실은 수행의 법과 다를 바가 없어요. 불문에 뜻이 있고 바른 의지를 지니고 있다면 모두 수행할 수 있죠.”
감청락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술이나 고기를 멀리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부처를 믿는 불자들을 보세요. 그중에 누가 술과 고기를 멀리하던가요? 게다가 이런 말도 있죠, ‘술과 고기는 뱃속을 지나갈 뿐, 불법은 마음에 남는다’.”
계연이 웃으며 이런 말을 하는 순간, 혜동 대사는 마침 계연이 머무는 뜰에 와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계연이 한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은 후였다. 혜동 대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계 선생님, 감 대협, 좋은 아침입니다.”
“혜동 대사 오셨군요.”
“안녕하십니까, 대사.”
감청락은 조금 전까지 승려에 관한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 어색해했다. 게다가 혜동 대사가 계 선생님을 찾아왔으니, 분명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먼저 인사를 하고 떠났다.
감청락이 떠나자 혜동 대사가 난처하다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대단한 신통력을 지니셨으니, 불도(佛道)에 선생님만의 고견이 있으시다고 해도 소승,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 대협께서는 선생님의 경지에 이른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어찌 그렇게 허물없이 이야기하십니까.”
“하하, 저는 대사를 도와드린 겁니다. 감 대협께서 말하기를, 고기와 술을 끊으라는 건 죽으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더군요. 게다가 제가 보니 대협이 육 시관(侍官)에게 꽤 호감이 있는 듯하던데, 대사께서 어찌하시려고요?”
“선재 대명왕불!”
혜동 대사는 그저 불호(佛號)를 외칠 뿐 계연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거의 백 년 가까이 불도를 닦아 왔으나 여태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 감청락을 보고 무척 마음이 끌렸다. 감청락은 겉보기에는 불문과 아무런 연도 없어 보였지만, 혜동 대사는 그가 불성(佛性: 중생이 부처가 될 성질)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선생님의 호의는 소승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실은 선생님 말씀대로, 마음이 깨끗하고 삿된 욕망이 없는 게 더 중요하지요. 또한 아무리 계율로 사람을 구속한다 해도 마음이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계연은 이 말도 안 되게 준수한 승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두호를 꺼내 들고 물었다.
“대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자, 그럼 저와 한잔하시겠습니까?”
“계 선생님…….”
혜동 대사가 난처한 듯 말하자 계연이 피식 웃었다. 그는 이 승려가 사실 아주 재미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가끔은 그를 이렇게 놀려먹는 것도 참 좋았다. 계연은 대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 참 궁금했다.
“알았어요, 농담이었어요. 참, 황제가 무슨 상을 내린다고 하던가요?”
혜동 대사는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황제께서는 저를 호국대법사(護國大法師)로 책봉해, 법연사의 방장을 맡아주었으면 하시더군요. 그에 더해 황금 천 냥과 적지 않은 비단 등을 내리셨습니다.”
이는 공개적으로 인재를 뺏어오는 짓이었다.
“장공주께서 무척 화가 나셨겠군요?”
“그리 많이 화를 내시진 않으셨습니다. 소승이 천보국의 호국대법사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계시니까요.”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장공주도 무척 영명하신 분이시죠…….”
계연은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리다가 웃었다.
“계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하하, 재밌게 되었네요. 어찌 된 일인지도 알 수도 없고 도운의 생사도 불분명한 이런 때에 감히 도성에 들어온 사람이 있다니요.”
계연의 말을 들은 혜동 대사는 계 선생님이 말하는 ‘사람’이 어떤 이들인지 즉시 알아차렸다.
“나가서 만나보죠.”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 * *
오늘 내린 비로 인해 거리를 오가는 행인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장사를 하러 나온 이들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어쩐 일인지 어젯밤 황궁에서 벌어진 일이 이른 아침부터 시정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창은 없다지만, 소식이 퍼져나간 속도가 아무래도 너무 빨랐다.
하지만 이런 일에 계연과 혜동 대사는 별 관심이 없었다. 척 봐도 이 일은 후궁 혹은 권세 있는 이들의 계략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손님이 적었기 때문에, 거리에 노점을 차린 상인들은 하릴없이 한데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이, 자네 들었나? 어젯밤 일?”
“무슨 일?”
“혜동대법사 이야기 아닌가?”
“연량국에서 온 유명한 고승이라지. 며칠 전에 어명을 받고 도성에 들었잖나.”
그러자 화두를 던진 상인이 흥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 자네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황상께서 왜 혜동 대사를 불러들이셨을까? 황궁에 요괴가 나타났거든! 황상께서는 후궁이 평안하지 못하고, 조정이 어지러워 혜동 대사를 청해 요괴를 잡아달라 한 것일세! 향기로운 미인으로 유명하던 혜비 아는가? 혜비가 바로 여우 요괴였다는군!”
“어이쿠!”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정말인가?”
그때 준수한 용모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남자가 노점을 지나다가 이들의 대화를 듣고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상인들이 열띠게 토론하는 걸 보고는 다시 걸음을 뗐다.
“휴, 한발 늦었군…….”
남자는 우산을 들고서 흰 장삼을 입고서 아무런 패물도 착용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척 준수한 생김새를 지닌 그의 모습은 ‘무언가’에 의해 한 겹 가려진 듯이 몽환적으로 보였다. 다른 이들이 이렇게 긴 머리를 그저 늘어뜨리고 다녔다면 예에 어긋난 지저분한 모습이라 여겼겠지만, 이 남자가 하니 무척 우아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거리의 누구도 그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흰 장삼을 입은 남자는 빗속을 걸으며 황궁 쪽으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역관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는 곧 역관이 있는 거리에 이르렀다.
이곳은 백성들의 노점을 허용하지 않는 거리였고, 비까지 내렸기 때문에 행인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심지어 역관 밖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할 병사들도 근처 건물로 들어가 비를 피하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남자는 우산을 들고서 차분한 눈길로 역관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흰 승복을 입은 승려가 역관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오더니 남자에게서 6, 7장(丈) 떨어진 거리에 가만히 멈춰 섰다.
“선재 대명왕불. 선행을 쌓으면 좋은 결과가 돌아오고, 악업을 쌓으면 나쁜 결과를 돌려받는 법이지요. 시주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우산을 든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담담한 눈빛으로 혜동 대사를 바라보았다. 이 승려의 몸에는 불문의 신령한 빛이 그다지 강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대신 불성이 아주 강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도운을 제압한 것을 보니, 자신의 불법을 숨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스님, 도운이 살아날 가능성이 있겠소?”
혜동 대사는 이때 사실 무척 긴장한 상태였다. 눈앞의 남자에게서는 법력의 빛이나 요기(妖氣)도 보이지 않았고, 보리수 혜안으로 보아도 한 줄기 흰빛만이 보일 따름이었다. 마치 입고 있는 흰 장삼에서 굴절된 빛처럼 말이다.
‘선재 대명왕불. 계 선생님께서 아직 떠나지 않으셔서 정말 다행이군!’
잔뜩 긴장한 혜동 대사는 겉으로는 불문에 몸담은 승려 특유의 장엄하고 평온한 얼굴을 한 채, 마찬가지로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도 시주는 꼬리가 여섯 달린 여우 요괴였기 때문에, 소승도 살려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금발인(金鉢印)에 봉인되었으니 벗어나긴 어려울 겁니다.”
그러자 우산을 든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혜동 대사를 향해 다가왔다.
“나와 불문(佛門)은 어느 정도 교분이 있다고도 할 수 있으니, 그 발우만 내게 넘기면 당신을 죽이지 않겠소.”
그러자 이 거침없는 말에 혜동 대사는 속으로 몹시 놀랐다. 그는 불안해하는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 합장한 자세 그대로 서서 평온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넓은 소매의 푸른 장삼을 입은 남자가 우산을 받쳐 들고서 역관에서부터 걸어 나왔다. 그는 흰 장삼을 입은 남자 앞에 걸음을 멈추고 혜동 대사의 곁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