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5화. 무애귀성
발우를 다시 잘 갈무리한 혜동 대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계 선생님, 저자는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그러자 계연이 혜동 대사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옥호동천의 구미호 중 하나예요.”
대사는 속으로 내심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계연에게서 직접 그 정체를 듣게 되자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출가한 승려는 불법으로 마음을 다스리지만, 그래도 두려움은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도일은 우산을 들고서 천보국 도성의 거리를 걸으며, 백성들이 혜동 대사가 황궁에서 요괴를 사로잡은 일에 대해 떠드는 것을 들었다. 도일이 걸어가는 방향에 만약 행인이 있으면, 그들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길을 터주었다.
역관에서 몇 리 정도 멀어진 도일은 그제야 왼손을 펼쳐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는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었고, 여전히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계연이라? 잘 알아봐야겠군. 언제 또 이런 대단한 선인이 튀어나왔지?’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역관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살짝 달싹이며 전음(傳音)을 보냈다.
“계 선생, 감사를 표하기 위해, 천보국에서 도운과 얽혔던 모든 요사한 것들을 제가 대신 처리해드리겠습니다.”
그 목소리가 계연의 귓가에 전해졌을 때, 도일은 이미 흐릿한 여우의 형태가 되어 하얀빛을 뿜으며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계연이 그에게 무슨 대답을 할 새도 없었다. 이에 계연은 마음속으로 시구가 이미 이곳을 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시구는 억울하게 죽고 말 것이니 말이다. 천천히 점괘를 쳐 본 계연은 그제야 마음을 내려놓았다.
사실 계연이 조금 전 곤선승을 쓸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쓰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도일의 첫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천계맹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구미호처럼 보이지는 않았던 탓이다. 그로서는 굳이 계연을 알면서도 모른 척할 이유가 없었다.
두 번째는 계연은 위력이 대단한 수단을 몇 가지 갖추고 있지만, 수행한 세월이 기나긴 구미호도 자신만의 필살기가 없으리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구미호의 특별한 털 하나만으로도 도사연은 순식간에 꼬리 하나가 자라났으니 절대 낮잡아 볼 수 없었다.
도일과 계연은 그들이 가진 능력을 모두 쓰지 않고, 짧은 탐색전을 펼쳤을 뿐이므로 그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도일이 곧바로 혜동 대사를 공격하려고 한 것만 봐도 그는 예측 불허의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아직 선택권이 있는 상황이라면 계연은 절대 그와 직접적으로 맞붙지 않을 것이었다.
“선생님, 선생님?”
혜동 대사는 계연이 멀리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말이 없자 그를 불렀다. 그러자 계연이 혜동 대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사께서는 어젯밤에 힘을 과도하게 쓰신 데다, 오늘은 아침 일찍 입궁하기까지 하셨으니 어서 돌아가 쉬는 게 좋겠어요.”
“선재 대명왕불. 그럼 소승은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혜동 대사는 더 묻지 않고, 정중히 인사한 뒤 먼저 역관으로 들어가 쉬었다.
계연은 기다란 은빛 여우 털을 손에 쥐고서 점을 쳐보았으나, 이 털이 도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즉, 이 털은 도일의 것이 아니었다.
다만 도일이 이렇게 갑작스레 나타난 것을 보니, 무언가를 감지한 그가 도운이 사건에 휘말리길 원치 않아서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도일의 도행을 고려해보면 그가 도운의 상황에 대해 감응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했다. 게다가 사실 도운을 되살릴 수 있다는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면, 그가 나타난 시기가 늦었다고 볼 수도 없었다.
이를 떠올린 계연은 어떤 추측을 세울 수 있었다. 도일의 언행이 아무리 괴팍하더라도 그는 구미호였다. 그는 멀리 서역 남주의 옥호동천에서부터 도운을 구하기 위해 산 넘고 물 건너 먼 길을 달려왔다. 그가 도운이 목숨을 잃을 것을 미리 점쳤을 리는 없었다. 최소한 자신이 도운에게 손을 쓰리라는 걸 미리 알 수는 없었을 것이 확실했다. 계연은 이 점에 무척 확신을 품고 있었다.
계연이 시구에게서 도운의 일을 알게 되고, 도운을 죽이리라 결심한 후 목숨을 거두기까지 채 며칠 걸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도일은 처음부터 무언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것, 최소한 도운이 무척 위험한 일에 발을 들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직접 운주까지 와서 중요하게 여기는 후배를 데리고 가려 한 것이다.
여기까지 떠올린 계연은 도일이 천계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계연은 곧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저 도일에게서 어떤 유용한 정보도 얻지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대신 이번 일로 그는 옥호동천의 구미호와 알고 지내게 된 셈이었다.
대략 반각(半刻) 뒤, 계연은 역관으로 들어갔으나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곧바로 혜동 대사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자 혜동 대사를 비롯한 일행은 감히 그를 만류하지 못하고 그저 계연이 역관에서 떠나는 것을 서서 배웅했다.
* * *
계연은 바람을 몰며 날다가 아래에 펼쳐진 도시와 산천, 강물과 호수 등을 굽어보았다. 그의 의식은 수행과 생각의 사이에서 떠돌았고, 그의 발길은 대정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계연은 그렇게 조월국을 지날 때, 고공에서 혼란스러운 핏빛 기운과 맹렬한 불길이 솟구치는 형상을 보았다. 하지만 이는 요괴의 농간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으킨 전화(*戰禍: 전쟁으로 말미암은 재화)였다. 게다가 저곳은 조월국의 중심이었으므로 내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계연은 고개를 저으며 깊이 탄식을 내뱉었을 뿐, 아래로 내려가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연은 계속 앞을 향해 날다가, 해가 질 무렵 마침내 검은 구름이 잔뜩 모여든 곳을 발견해 그 아래로 구름을 몰았다.
그 아래로는 천둥도 번개도 치지 않았고 비가 내리지도 않았다. 그저 기이하게도 등불이 대낮처럼 환히 밝혀 있고 떠들썩한 도시가 나타났을 뿐이었다. 이 도시의 주위에는 수풀과 황량한 산맥만 있을 뿐, 도시 밖으로 통하는 작은길이나 마차가 지나는 큰길이 나 있지도 않았다. 바로 전에 왔던 무애귀성이었다.
귀성을 발견한 계연은 점차 아래로 고도를 내렸고, 귀성에 가까워짐에 따라 온갖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도시 주위로는 바람이 음산하게 불고 있었다. 계연은 마침내 귀성 어느 길 위에 내려섰다.
이곳은 온통 귀신뿐이었으나, 계연의 등장은 그중 누구의 주의도 끌지 않았다. 그는 귀신들이 바글바글 오가는 길가와 주위로 활발히 장사를 이어가는 상점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면 속세의 번화한 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계연은 내려선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성 곳곳을 돌아다녔다. 일반적인 귀신들은 수도 없이 많았고, 산 세월이 오래된 늙은 귀신도 꽤 있었다. 그들 중에는 살기를 지닌 자들도 있었는데,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귀신도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는 귀신이 어디 있겠는가? 이는 계연이 용인할 수 있는 범위 안의 수준이었다.
그렇게 성안을 돌아다니던 계연은 곧 중심에 자리한 성주(城主)의 저택에 이르렀다. 문루(門樓) 앞 거대한 편액에는 예전 그대로 ‘유명귀부(幽冥鬼府)’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문루 앞에는 갑옷을 차려입은 귀병(鬼兵)들이 지키고 서 있었는데, 계연이 앞에 서서 편액을 올려다보는 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무언가 물어볼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에 계연이 곧장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귀병 하나가 그제야 병기를 들어 올려 앞을 가로막은 뒤 계연을 향해 말했다.
“이곳은 유명귀부다!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자 계연이 그를 향해 대답했다.
“신 성주께 계연이 방문했다고 말씀 좀 전해주세요.”
그 말에 병사가 계연을 위아래로 샅샅이 살폈다. 조금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렇게 살펴보니 눈앞의 남자는 귀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괴인지 신령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안에 들어가서 성주께 알리고 오겠습니다!”
병사는 곧 동료에게 무어라 말을 남긴 뒤, 문루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무애가 귀장(鬼將) 두 명과 계연의 말을 전한 귀졸(鬼卒)을 이끌고 다급히 안에서 달려 나왔다. 검은 평상복 차림의 그는 귀장들과 채 문루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양손을 맞잡고 계연을 향해 예를 올렸다. 그런 뒤 얼른 계연 앞으로 다가왔다.
“신무애가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계연도 그들을 향해 짧게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신 성주,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지요.”
신무애는 당연히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 계연이 떠난 후로, 그는 대체 언제 다시 계 선생님을 뵐 수 있을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다 오늘 계 선생님이 방문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달려 나온 것이다.
귀부 안은 속세 여느 도시의 대갓집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단지 안에 자라는 식물들이 음기를 품고 있고, 음침목(*陰沉木: 매목(埋木)이라고도 하며, 홍수나 지진 등으로 오랜 시간 땅 밑에 묻혔던 나무를 뜻함)처럼 변해버렸다는 것만이 달랐다. 어느새 시간은 밤이 되어, 귀성 위를 덮은 구름은 대부분 흩어진 뒤였고 고개를 올려보면 밤하늘에 뜬 별을 볼 수 있었다.
계연과 신무애를 비롯한 귀장 두 명은 함께 귀부 안을 잠시 구경하다가, 뜰 안에 놓인 한 탁자 앞에 앉았다. 신무애와 계연만이 자리에 앉고, 귀장 두 명은 양쪽에 차례로 섰다. 탁자 위에는 귀성의 음차(陰茶)가 놓여 있었는데 차에서는 뜨거운 김이 나진 않았지만, 차향은 느낄 수 있었다.
“계 선생님, 이번에 무애귀성을 찾아주신 것은, 혹 제게 분부하실 중요한 일이 있으셔서입니까?”
신무애가 직설적으로 묻자, 계연은 밤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신무애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월국의 신도(神道)는 나날이 세가 약해져, 지금 속세에는 사악한 것들이 들끓고 질서가 혼란해진 상태예요. 저는 성주께서 무애귀성의 힘을 빌려, 관할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범위 안에서 저승의 일을 맡아주셨으면 해요.”
이를 들은 신무애는 너무 놀랍고 기쁜 마음에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다. 한쪽에 서 있던 귀장들은 놀라 서로 눈빛을 교환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무애는 기쁨을 억눌러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킨 뒤,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 선생님, 제가 무애귀성을 다스리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그저 떠도는 넋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월권행위라는 혐의를 피할 수가…….”
“됐어요, 애써 숨기실 필요 없어요.”
계연이 손을 휘두르며 신무애의 말을 끊자, 신무애는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짓더니 곧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역시 선생님을 속일 수는 없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