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657화 (657/892)

657화. 유명(幽冥)의 의지 (2)

한편 연무장에 집합한 수만 명의 귀졸은 연단 위에 장군과 성주 말고도, 온몸이 몽롱한 안개에 뒤덮인 듯 희미하게 빛나는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꼭 실체가 없는 환상처럼 보였는데, 아마 신령 아니면 신선인 듯했다.

“신 성주, 조금 전에 제게 한 말씀을, 이 귀졸들을 향해서도 한번 해주세요.”

신무애는 이때 더욱 감격에 차올라 고개를 끄덕인 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연단의 가장 앞에 서자, 다른 귀장들이 모두 그의 뒤를 따라 앞으로 향했고 계연만이 홀로 뒤에 남았다. 신무애는 온몸의 기운을 끌어올려, 천둥이 치는 듯한 크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중에는 떠돌던 넋도 있고, 치욕스럽게 죽은 혼도 있고, 천수를 다하고 죽은 귀신도 있으며, 악귀였던 자도 있다. 우리 모두 귀신이니, 귀신의 수행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를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생전에 우리는 모두 정정당당하고 떳떳한 길을 걷고 싶어 했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죽은 후에도 귀신으로서 생전의 의지를 잊지 않고, 사람의 도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무애의 목소리가 하늘을 울리는 천둥처럼 무애귀성에 퍼지자, 연무장에 모인 귀병들뿐만 아니라 귀성을 순찰하며 질서를 유지하던 귀졸, 귀성에 사는 수천수만의 귀신들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신무애는 들끓는 가슴을 억누르며 이렇게 소리쳤다. 연무장을 울리는 목소리에는 드높은 기세와 진실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 기회가 자신뿐만 아니라, 무애귀성에 있어 천재일우의 기회임을 알고 있었다. 이 순간 그가 하는 말은 거의 맹세에 가깝게 들렸다. 그 내용은 계연에게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말에 담긴 심경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 그의 굳센 맹세가 천둥처럼 귀성 안에 울려 퍼졌다.

쿠구구궁……!

신무애의 선서는 이미 끝났으나, 귀성 전체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연무장과 귀성 안, 수천수만의 귀신들은 이 순간 모두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연단 위의 귀신들과 사람이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래의 귀졸들이 연단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병사들의 음기와 살기가 소용돌이치며 치솟는 걸 보니, 그들의 마음에 불길이 일어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연단 위의 한 귀장이 병사들을 내려다보더니 허리춤에 찬 칼을 들어 올리며 높이 소리쳤다.

“저승의 의지를 떳떳이 밝혀, 성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당당하고 바른 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

그러자 수만 병졸들이 폭발하듯이 기세를 터트리며 큰 소리로 귀장의 말을 따라서 외쳤다.

“성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당당하고 바른 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

“목숨을 바치자!”

“저승의 의지를 떳떳이 밝혀…….”

처음 그들의 목소리는 질서가 없이 제각각이었으나, 점차 하나의 목소리로 합쳐지더니 산과 바다를 뒤흔들고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포효가 터져나갔다.

“저승의 의지를 떳떳이 밝혀, 성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당당하고 바른 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

신무애는 그 귀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임기응변에 무척 만족한다는 뜻을 내보였다. 그런 뒤 조심스레 뒤쪽의 계연을 바라보았다. 계 선생이 평온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걸 보자 그는 마침내 마음을 내려놓았다.

이때 연단 뒤쪽에 선 계연의 의식은 반은 이곳에 반은 의식 세계 안에 있었다. 의식 세계의 산과 하천 위로 이들을 뜻하는 바둑돌이 밝게 빛났다.

연무장의 포효성은 멈추지 않고, 귀성 곳곳의 귀졸들도 그들을 따라 함께 연달아 소리쳤다. 심지어는 병사가 아닌 귀신들도 그들을 따라 함께 소리치고 있었다. 이때 다른 귀신들의 마음에는 큰 파문이 일었는데, 그중에는 어찌할 바 모르는 이들부터 불안해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귀성은 원래 음산한 분위기로 덮여 있었는데, 수많은 귀신이 동시에 포효하자 그들의 드높은 기개와 끓어오르는 뜨거운 감정이 생생히 느껴졌다. 신무애는 기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병사들의 연호성이 잦아들자, 그는 계연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간단히 예를 취했다. 그러자 계연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으나, 따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신무애와 계연은 귀군(鬼軍)들의 훈련을 조금 지켜본 뒤 연무장을 떠났다.

무애귀성의 현재 상황은 계연의 예측을 살짝 벗어났으나, 이는 오히려 놀랍고도 즐거운 결과였다. 이에 그는 이 귀성에 대한 믿음이 더욱 커졌다. 최소한 이 방식을 실시하는 얼마간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수행계와 속세는 달라서, 관리자의 수명이 무척 긴 데다 그들의 심성과 기운이 직관적으로 밖으로 드러나니, 처음의 인선(人選)에 문제가 없다면 후에도 문제가 일어날 확률이 그리 높지 않았다.

* * *

한 시진(2시간) 반이 지난 뒤, 계연과 신무애는 신무애가 공무를 논의하는 장소로 자주 쓰는 유명귀부의 한 대청으로 들어왔다. 대청의 상석에는 커다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고, 아래쪽에는 양쪽으로 의자와 탁자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게다가 탁자 위에는 공무를 처리할 때 필요한 문방사우가 잘 갖춰져 있었고, 상석에는 영전통(*令箭筒: 옛날, 군중(軍中)에서 명령 전달의 증거로 사용한 화살 모양의 수기(手旗)인 영전을 보관하는 통)까지 갖춰져 있었다.

이때 대청 안에는 계연과 신무애를 제외하고, 귀성에서 신분이 비교적 높고 산 세월이 오래된 귀신들도 적지 않게 와 있었으며 귀장 이하의 계급도 있었다. 다만 상석에 앉은 이는 신무애가 아니라 계연이었다. 신무애가 한쪽에 서서 계연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귀신들도 자연히 자리에 앉지 못하고 상석 가까이 서 있었다.

귀신들에 둘러싸인 계연은 한 손으로 도장을 들고, 다른 손에 든 낭호필을 도장에 새겨진 각인 위에서 움직였다.

원래 도장 위에는 ‘무애귀성지주(無涯鬼城之主)’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때 계연의 붓끝이 그 위를 몇 번 움직이자, 도장 위에 새겨진 글자가 변하기 시작했다. 계연이 아직 뒤쪽에 이어질 글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유명(*幽冥: 저승의 다른 말)’이라는 두 글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계연이 글자를 쓰는 속도는 아주 느렸기 때문에, 주위의 귀신들은 계 선생님이 붓을 움직일 때마다 그 끝에서 어떤 저항력이 크게 일어나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에 더해 붓끝에는 흰빛과 노란빛이 뒤얽히고 있었다.

타다다다……!

어디선가 가벼운 소리가 들려 신무애와 귀장 하나가 그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옆에 놓인 탁자 위의 찻잔이 가볍게 진동하고 있는 게 보였다.

덜덜덜덜……!

덜컹덜컹……!

곧이어 대청 안의 찻잔, 붓걸이, 병기(兵器) 등이 모두 떨리기 시작했고 지면과 대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귀신들도 자기 몸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처럼 느꼈다.

그 진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강해지자 귀신들의 두려움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성주, 이게 대체…….”

나이를 많이 먹은 한 귀신이 참다못해 이렇게 입을 떼자, 신무애가 미간을 굳게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계연을 향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른 본 다른 귀신들은 눈치 빠르게 이것이 계 선생께서 일으킨 변화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 계 선생님께서 새기고 있는 도장 위의 글자와 관련이 있으리라.

물건들이 아무리 진동해도 계연이 쓰는 탁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그 위의 찻잔 등도 조금도 움직임이 없었다. 계연의 두 손은 더없이 평온했고, 움직이는 붓끝도 매우 안정적이었다.

전서체(*篆書體: 한자의 고대 서체 중 하나)로 이루어진 네 글자뿐이었는데도 이를 쓰는 데 거의 일각(15분)이 걸렸다. 계연이 마지막 글자를 새기자 도장의 표면에 하얀 금빛이 반짝이며 사라졌고, 대청의 진동도 완전히 잦아들었다.

신무애를 비롯한 귀신들은 진동이 멈추자,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 계연이 손에 든 도장 위로 시선을 집중했다. 계연이 도장에 새겨진 글자를 살피려고 들어 올리자, 다른 이들도 그 위의 ‘유명정당(幽冥正堂)’ 네 글자를 또렷이 볼 수 있었다.

계연은 손에 든 도장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무게를 한번 가늠한 뒤 한쪽에 서 있던 신무애에게 건넸다.

“자, 성주께 드릴게요. 후에 공문을 비준하거나 관리를 임명하려면, 문서나 영패 등의 물건 위에 찍으시면 돼요.”

신무애는 이 순간 끓어오르는 흥분을 누르지 못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몸이 덜덜 떨렸다. 그는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 도장을 받아들었다.

신무애가 도장을 손에 쥐자 확연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고작 몇 근(斤) 되는 도장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맷돌을 받아든 것 같았다. 이 정도 중량은 신무애에게 있어 그다지 무겁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이 순간의 격렬한 감정 때문에 엄청나게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처음 도장을 손에 쥐자 미약한 저항이 느껴졌으나, 잠시 후 도장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한 줄기씩 흘러나와 신무애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자 도장의 무게감은 그대로였지만, 자신과 완벽히 이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신무애, 선생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저희 귀신들도 선생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다른 귀신들도 계연을 향해 예를 취하며 신무애의 말을 복창했다. 계연은 옷자락을 몇 번 털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에도 힘이 없다는 말이 있죠. 이 도장은 유명귀부의 근본을 개혁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정당한 명분이 되어줄 거예요.”

이렇게 말한 계연은 곧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다 되었으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 뒷일은 여러분께 맡기겠습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신무애는 도장을 잘 갈무리하고는 계연을 따라 저택 밖으로 나왔다. 계연은 유명귀부의 문루 아래에 서서 신무애를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충고했다.

“그 도장이 힘을 발하려면 성주의 법력이 필요해요. 그러니 신중히 쓰셔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반드시 신중하게 사용하겠습니다!”

계연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자신의 말뜻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린아이를 가르치듯이 하나부터 열까지 알려줄 수도 없었고, 어차피 그도 곧 자신의 말뜻을 알게 될 터였다. 이에 그는 신무애와 다시 작별 인사를 나눈 뒤, 구름을 타고 떠나갔다.

신무애는 멀어지는 흰 구름을 바라보다 다시 저택 안으로 돌아왔는데, 그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웠다. 그가 대청에 돌아오자 귀신들이 모두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신무애는 더는 기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도장을 꺼내 들고는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하하하하……. 이제 이 도장과 계 선생님이라는 뒷배도 있으니 앞으로 우리는 저승의 정통(正統)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세세히 설명할 수 없으나, 곧 우리는 귀신들과 비교해도 절대 낮지 않은 신분이 될 것이다! 게다가 수행하는 데도 큰 득이 있겠지! 와서 보거라!”

신무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도장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귀장을 비롯한 귀신들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