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8화. 쉽게 도장을 찍으면 안 되겠군
“이 도장은 비록 유명귀부에 속하나, 도장에는 바르고 깨끗한 기운이 흐른다. 이는 수행을 닦는 귀신들이 원신(元神)을 모으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도록 크게 도울 것이다! 이렇게 비범한 보물을 간단히 붓을 놀려 만들어 내다니, 계 선생님은 정말로 천인(*天人: 선인(仙人)과 같이 도(道)가 있는 사람)인 게 틀림없다!”
신무애는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흥분이 끓어올랐다. 그는 주위의 귀신들을 바라보다가, 조금 전에 직접 북을 치고 귀신들의 연호를 끌어낸 귀장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형증(刑曾).”
“말장(*末將: 옛날, 장군이 자신을 낮추어 일컫던 말) 여기 있습니다!”
“영패를 가져와라.”
귀장은 갑옷을 들어 올려 허리춤에 달린 새까만 영패를 꺼내 두 손으로 탁자 위에 올렸다. 신무애는 영패를 들어 그 위에 적힌 형증의 이름과 계급을 보더니, 손으로 한번 쓱 쓸었다. 그러자 그 위의 ‘장(將)’ 자가 ‘수(*帥: 군대의 최고 지휘관을 뜻함)’로 바뀌었다. 신무애는 자신의 법력을 운용해 오른손에 쥔 도장을 영패를 향해 내리찍었다.
“형증은 명을 받들라. 오늘부터 귀병음수(鬼兵陰帥)로 임명하겠다!”
도장이 영패에 닿자 불꽃이 폭발하는 듯한 금빛이 터져 나오더니, 영패 위에 도장이 찍혔다.
이를 확인한 신무애가 다시 영패를 귀장에게 건넸다. 이에 귀장이 자신의 영패를 받아 들자, 은은한 푸른 연기가 솟더니 귀장은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치지지직……!
하지만 형증은 고통을 참으며 결코 영패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자 잠시 후, 통증은 조금 남아있었으나 고통이 점차 약해지더니 기이하게도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성주……. 성주! 왜 그러십니까?”
“성주!”
“성주! 무슨 일이십니까!”
주위의 귀신들이 대경실색한 얼굴로 소리쳤다.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성주가 형증에게 영패를 건넨 후, 미약하게 경련을 일으키더니 도장을 쥔 채로 탁자에 쓰러진 것이다. 그의 기운은 어지러워져 있었으며, 안색이 파랬다 하얬다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때때로 소름 돋는 그의 진짜 모습이 얼굴 위로 겹치기도 했다.
“허…… 허억……. 아…….”
“어서 성주께 음령(陰靈)의 기운을 모아드리세!”
“모두 함께해야 하오!”
귀신들은 신무애의 주위에 둘러선 채로, 법력을 운용해 순수한 음기와 태음(太陰)의 힘을 이끌었다.
신무애의 이상은 나타날 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온 신무애는 약간의 두통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사실 주위에 아무런 귀신들이 없었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괜찮아졌을 터였다.
조금 전 이런 소동을 겪고 그것이 도장 때문인 것을 알았음에도, 신무애는 여전히 도장을 손에 꽉 쥐고 놓지 않았다.
“휴우……. 선생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이런 뜻이었군…….”
두서없이 이런 말을 중얼거리던 신무애의 얼굴에 곧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오히려 자신이 이런 격렬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이 도장의 위력을 더욱 믿게 되었다. 그는 다음에 도장으로 누군가를 임명할 때는, 시간을 천천히 들여 결정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최소한 형증처럼 높은 직위를 내릴 때는 더욱 신중히 임명해야 했다.
이때 계연은 무애귀성에서 아직 그리 멀어지지 않았으므로, 계연은 도장이 일으킨 반응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의식 안에서도 신무애를 뜻하는 바둑돌이 몇 번 깜빡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에 계연은 신무애가 자신이 떠나기가 무섭게 그 도장을 사용해봤음을 알 수 있었다.
* * *
하루가 지난 뒤, 계연은 대정국 통천강 상공에 이르렀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상공에서 곧바로 수면 아래를 향해 내려간 뒤, 통천강 용궁으로 향했다.
용궁 앞에 있던 야차들은 계연이 온 걸 보고는 얼른 달려 나가 그를 맞이했다.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계연은 용궁을 흘끗 쳐다보더니 물었다.
“용왕께선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나요?”
그러자 야차가 고개를 들어 그의 말에 대답했다.
“예,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강신마마께서는 안에 계시니, 어서 들어오시지요!”
계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손을 저으며 가볍게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그럼 되었어요. 강신마마께는 제가 왔었다고 인사만 전해주세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선생님!”
야차들이 얼른 허리를 숙여 예를 올린 뒤, 계연은 어수술을 써서 용궁에서 멀어졌다. 그러자 그중 한 명이 용궁 안으로 들어가 응약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용궁 안에 있던 응약리는 연탑(*軟榻: 좁고 긴 휴식용 의자) 위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이렇게 물었다.
“누구냐?”
그러자 야차는 방 안에 늘어뜨린 휘장 뒤에 멈춰 서서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강신마마께 아룁니다. 방금 계 선생님께서 오셨었습니다.”
그 말에 응약리가 눈을 번쩍 뜨더니 연탑 위에 일어나 앉았다.
“계 숙부님께서? 어디 계시느냐?”
“아, 강신마마께 아룁니다. 계 선생님께서는 용왕님을 찾아오셨던 터라, 용왕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걸 알고는 그저 강신마마께 인사를 전하라고 하신 뒤 떠나셨습니다.”
그러자 응약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뇌리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응약리는 다시 천천히 탑 위에 누웠다.
“알겠다. 가보거라.”
“예!”
응약리는 그렇게 일각(一刻) 정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가, 곧 이리저리 몸을 뒤틀더니 다시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신을 신고 방에서 나와 용궁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용궁 밖을 지키고 서 있던 야차가 얼른 예를 올렸다.
“강신마마!”
응약리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이렇게 말했다.
“용궁을 잘 지키거라. 계 숙부님을 뵙고 돌아오겠다.”
그러고는 야차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용궁의 금제를 빠져나와, 상대적으로 수질이 혼탁하고 물살이 빠른 통천강 강물로 나온 뒤, 몸을 부드럽게 움직이며 헤엄치기 시작했다.
응약리는 그렇게 백 리(里) 정도를 헤엄치다가 마침내 수면을 뚫고 올라왔다. 그녀와 함께 수면 위로 솟구친 물방울은 모두 안개로 변했다. 응약리는 구름을 타고 가지 않고, 안개에 휩싸인 채로 상공으로 치솟아 계주 방향으로 향했다.
응약리가 날아가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계연이 통천강에 왔을 때는 이미 어두운 밤이었는데, 응약리가 영안현 상공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거의 다 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천우방 한쪽 끝에 푸르고 커다란 나무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나무 주위로는 영기 섞인 바람이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기운을 읽는 방식이나 점괘로는 계 숙부님을 찾아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그녀는 뛰어난 시력으로 푸르른 나무 아래를 투시하듯이 내려다보며, 거안소각 안에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심지어 안팎의 대문과 방문까지 모두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건가? 아니면 원래부터 돌아오실 생각이 없으셨고, 통천강에는 잠깐 들르기만 하셨던 걸까?’
이렇게 고뇌하던 응약리는 어느새 영안현에 내려선 후였다.
계 숙부님과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응약리가 영안현에 오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비록 골머리를 앓게 하는 일이 있었음에도, 이 고요하고 평온한 현성 안에 내려서자 곧 호기심이 들었다. 비록 계 숙부님께서는 이곳에 계시지 않지만, 이번 기회에 영안현을 한번 돌아다녀 보고 싶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쩌면 계 숙부님께서 돌아오실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로서는 도대체 어떻게 계 숙부님을 찾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물며 진룡인 자신의 아버지도 계 숙부님을 생신 연회에 초대하기 위해 몇 년을 찾아다녔지 않은가.
성에 들어온 응약리는 금실로 수 놓인 사포(*紗袍: 곱고 가벼운 견직물로 만들어진 도포 따위의 겉옷)와 금빛 사(紗)로 만들어진 장식용 띠, 진주가 달린 비녀와 비늘로 만들어진 관(冠) 등을 전부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보편적인 모양대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옅은 푸른색을 띤 비단 치마에 심의(*深衣: 상의(衣)와 하의(裳)가 따로 재단해 만든 뒤 그 둘을 재봉해 붙인 것)를 걸쳐 입고는 영안현의 큰길로 걸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겉모습을 바꿨다고는 해도, 주위의 행인이며 장사꾼들이 응약리를 주목하지 않기란 어려웠다. 장식품을 빼고 의상을 갈아입었어도 용모 자체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녀를 힐끔거리거나 넋 놓고 쳐다보았다.
“와…… 어느 대갓집 소저일까?”
“궁에 계시는 마마가 아닐까?”
“쉬잇, 조용히 해. 이쪽을 봤어…….”
시골 사람들은 성정이 순박했기에, 응약리가 자신들을 쳐다보자 곧 찔끔하고는 시선을 피하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응약리는 피식 웃고는 물안개를 불러내 얼굴이 몽롱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 걸음걸이마다 느껴지는 기세와 우아함이 여전히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다.
영안현은 작다고도 크다고도 할 수 없는 크기였는데, 번화가는 온통 새해맞이 장을 보려는 백성들로 붐볐다. 대부분의 상점은 등을 내걸고 오색빛깔 천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채였고, 백성들의 얼굴은 한 해가 무사히 지난 안도와 다시 맞이할 봄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응약리는 목적지 없이 거리를 걷다가 결국 천우방 부근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그 유명한 ‘전설 속의’ 손기 노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장사를 하는 이는 나이가 꽤 들었음에도 여전히 건재한 모습의 손복이었다.
‘듣던 대로 정말 그렇게 맛있는지 아닌지 나도 한번 맛을 봐야지!’
응약리는 곧장 흥미가 생겨 손기 노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때 노점에는 식탁 두 개에 총 세 사람이 앉아 훈툰(*餛飩: 얇은 밀가루 피에 여러 가지 소를 넣어 싼 후 육수에 끓여 먹는 음식으로 만둣국과 유사함)으로 아침 식사를 들고 있었다. 그러다 응약리가 노점으로 다가오자 당연히 응약리는 그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녀가 비록 모습을 숨기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도 여인이었기에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외양을 못생기게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게 하되, 그녀를 본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이 무척 수려하다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반면 손복은 손님들보다 좀 더 특별해서, 그의 눈에는 응약리의 용모가 좀 더 또렷하게 보였다.
손복은 원래 자기 손녀가 어느새 아리따운 낭자로 자라나 다시 찾아온 줄 알았다. 그가 평생 보았던 여인 중, 자기 손녀인 손아아와 비견할 만한 여인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여인은 손복이 느끼기에 인간 세상에 속하는 아름다움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주인장, 국수 한 그릇이랑 내장 하나 주세요. 아직 아침 시간이니 그래도 있긴 있겠죠?”
응약리는 이미 한약재를 넣어 만든 양념 냄새를 맡았으나 일부러 이렇게 물었다. 그녀는 주위에 앉은 손님들을 잠시 둘러보다가 마침내 수레 앞에 선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손복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
“있지요,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낭자. 바로 내오겠습니다.”
응약리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손에 턱을 괸 채로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