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화. 모습을 본떠 형상을 깨달은 대추나무 정령
계연은 주방에 남아있던 다기를 쟁반 위에 받쳐 들고나왔다.
“별로 접대할 만한 게 없어서, 대추꿀 결정으로 끓인 차를 내왔어요. 이건 귀한 거라, 거안소각에서만 마실 수 있는 거예요.”
계연은 쟁반을 내려놓고, 꿀 결정을 녹인 찻주전자를 들어 직접 두 사람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대추나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조금 전에 응약리와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생각했다. 조금 전 노점에서 했던 이야기와 같은 말이라면 뭐 하러 소곤댔겠는가? 그리고 위무외가 응약리에게 꺼낸 옛 은인에 관한 이야기는 계연도 주방에서 들었다. 다만 계연은 정체를 밝히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무언가 깊은 뜻이 있어 보이는 심오한 대답으로 얼버무릴 생각이었다.
반 시진(1시간) 뒤, 위무외는 먼저 일어나 가보겠다고 인사했다. 계연은 올해 위씨 집안에서 새해를 보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옥회산 측에 자신이 천기각에 관한 일로 도움을 구하러 갈 일이 있다고 전해달라고 말했다. 지난번 선유 대회 때, 천기각에서는 일찍이 동천을 봉쇄했기 때문에 한 사람도 참가하지 않았다. 계연은 안 그래도 전부터 천기각에 방문해보고 싶었었는데, 최근에 있었던 몇 가지 사건 때문에 이런 생각이 더욱 강해진 뒤였다.
계연은 위무외를 대문까지 마중 나갔고, 위무외는 계연과 한쪽에 서 있던 응약리를 향해 다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응 마마께선 더 나오지 마십시오!”
용과 한자리에 있었던 데다, 그녀의 성격이 겉으로는 온유하고 예의 발라 보이지만, 정말로 화가 나면 아주 무시무시하다는 걸 알게 되자, 위무외는 자리가 더욱 편치 못했다. 그래서 이때 자리를 떠나는 위무외는 내심 안도했다.
계연이 위무외에게 인사한 뒤 위무외가 막 몸을 돌리려던 그때, 계연은 이렇게 물었다.
“위 가주께서도 선유 대회에 함께 가지는 않았지만, 선인(仙人)들이 관리하는 나루터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죠?”
“아, 예. 알고 있습니다.”
선문의 나루터에 관해서는 일찍이 위원생이 그에게 말해 준 바 있어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계 선생께서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말했다.
“선인들이 관리하는 나루터는 수행자들이 모여드는 곳이에요. 사방천지에서 온 수행자들이 서로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교류하는 곳이죠. 위 가주께서는 상업에 큰 재능이 있으시니, 한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그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던 위무외의 두 눈에 곧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다시 눈을 들어 계연을 바라보니, 계연은 곁에 서 있는 응약리를 보고 있었다.
“옥회산도 나름 뿌리가 깊은 선문이니, 위 가주도 돌아가서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일은 크게 될 가능성이 있어요. 게다가 용족들은 다들 부유하니 도움을 줄 수도 있고요.”
계연이 응약리를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가능하다면 최소한 늙은 용의 일맥만이라도 위무외를 도왔으면 하거나 심지어는 그와 함께 일했으면 한다는 뜻이었다. 응약리는 큰 강의 정신(正神)인 데다, 전도유망한 교룡이니 함께 이런 일을 논의할 자격이 있었다.
응약리도 당연히 계연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므로, 곧 미소 띤 얼굴로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
“계 숙부님의 말씀이 맞아요. 위 가주께서는 돌아가셔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옥회산에도 한번 이야기해보시고요. 그들의 명의를 빌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요.”
그러자 타고난 상인인 위무외의 심장이 맹렬히 뛰기 시작하며 갖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곧 흥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 일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겠습니다!”
위무외는 다시 한번 공손히 예를 취한 뒤, 잔뜩 흥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떠나갔다. 위씨 집안은 현재 옥회산의 문하에 소속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속세에 은거하는 수선자의 가족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정말로 선인들의 나루터를 이용해 한발 더 나아갈 수 있다면, 그들 가문의 앞날은 더욱 창창할 것이다.
* * *
위무외가 떠났지만 응약리는 떠나지 않고 남았다. 대추나무를 도와 수행의 난관을 넘어서게 해줘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당연히 계연도 거절할 수가 없었고, 사실 어느 정도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교룡인 응약리가, 심지어 자기 입으로 초목의 정령이 어떻게 수행을 닦는지 모른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저 영근목을 도와낼 방법을 알아내기라도 했단 말인가?
섣달 27일인 그날 밤, 계연은 자신의 방문을 닫고 그 안에 서 있었다. 그는 창호지를 통과해 응약리가 대추나무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순간 사람과 나무 모두 빛나고 있었다.
종이학과 글자들 모두 문 위에 딱 달라붙어서 조심스레 바깥을 관찰했다. 이 순간에는 글자들조차 조금의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응약리는 나무 아래 앉아 있었고,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듯 그녀의 옷자락도 가볍게 나부꼈다. 그녀가 눈을 떠서 맞은편의 안채를 바라보니, 방 안의 등이 이미 꺼져 있었다. 게다가 계 선생님의 기척도 느껴지질 않는 걸 보니 분명 잠이 드신 듯했다.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대추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계 숙부님이 추구하시는 수행의 도리는 자연의 도리와 천지의 오묘함을 따르는 거야. 계 숙부님의 비호가 있다면 굳이 먼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지. 그런데도 왜 마지막 한 걸음을 아직도 내딛지 않고 있는 거야? 무언가 잘못할까 두려운 거니?”
솨아아……!
대추나무는 가지를 가볍게 흔들며 응약리의 말에 답했다.
“나는 원래도 초목의 정령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어. 게다가 너는 영근목이기까지 하니까. 하지만 이제는 알겠어. 너는 어찌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라, 대상의 모습과 움직임을 보고 그 묘리를 깨닫고 싶은 거로구나. 그럼 나도 어찌 도와야 할지 알겠다. 그럼 너도 드디어 큰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될 거야. 어쨌든 이 일은 좋은 점이 더 많으니까. 우리가 약속한 것 잊으면 안 돼?”
말을 마친 응약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기지개를 켠 뒤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는 대추나무를 가운데 두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듯 가벼웠다.
잠시 후, 그녀는 뜰 안에 부는 신령한 기운이 어린 바람을 따라 대추나무 주위를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뜰 안 곳곳에 종이로 잘라낸 듯한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것은 모두 응약리의 각기 다른 모습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춤을 추는 자태뿐만 아니라, 걷고 앉고 서고 누운 각종 모습이 담겨 있었다.
먹물처럼 모호한 와중에도 우아함이 느껴지는 이 그림자는 마치 환영 같기도 하고 곧 흩어질 안개 같기도 했다. 응약리는 동작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입으로는 희미한 안개를 뿜어내고 있어 거안소각 뜰 안의 풍경이 곧 몽롱해졌다.
휘이…… 휘이잉……!
봄기운을 품은 신령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뜰 안의 낙엽뿐만 아니라 모호한 그림자들이 바람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위의 안개조차 맑은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듯이 대추나무를 둘러싸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며 움직일 때마다, 그 형상들은 점차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응약리는 계연이 마련해준 곁채에서 자지 않고 매일 밤 뜰에서 대추나무를 도왔다.
하루, 이틀, 사흘, 마침내 나흘째가 되자, 뜰 안의 모호한 물안개로 된 그림자는 더는 응약리처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차영오형(*借影悟形: 모습을 본떠 형상을 깨닫다)?”
계연은 뜰 안의 희미한 형상을 바라보며 크게 깨달은 표정이었다. 대추나무는 정령의 모습을 만들어내기까지 관찰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이는 보통의 수행자들이 도를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다만 그것이 형체를 빚기 위한 것임이 다를 뿐이었다.
나무 요괴나 나무 정령 중에는 괴이하게도 남녀가 합쳐진 목소리인 경우가 많았다. 계연이 지난 생에 본 <천녀유혼(倩女幽魂)> 속 수요부인이라는 등장인물도 이와 비슷했다. 아마 수행을 닦으며 스스로 성별을 선택할 기회가 없었던가, 아니면 그러기가 어려웠던 탓이리라. 그래서 수행 측면으로만 보자면 이런 시도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타나는 결과는 조금 괴이했다.
계연은 잠시 생각해 본 뒤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대추나무는 여성의 모습이 되기를 더 원했던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계연의 모습만 관찰해도 벌써 정령으로 나타나고도 남았을 것이다.
* * *
응약리가 거안소각에 머무는 네 번째 밤이자 병오년(丙午年)의 섣달그믐날 밤, 계연은 뜰에서 시선을 거두고 침상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넝쿨검을 머리맡에 기대놓고 겉옷을 벗은 뒤 침상 위에 누워 이불을 덮은 뒤 눈을 감았다.
오늘 밤은 섣달그믐이었으므로 가족들이 모인 기쁨으로 인한 명절 분위기가 가득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새해의 맑은 기운이 올라오는 시각이었다. 그러나 계연은 침상에 누워 꿈속에서 수행을 닦기 시작했고, 대추나무에 대해서는 더는 걱정하지 않았다.
파바바밧-!
폭죽 소리가 한바탕 울려 퍼지며 정월 초하루의 아침이 밝았다. 영안현 곳곳에서는 연달아 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다. 계연도 눈을 뜨고는 침상에 일어나 앉았다. 방문 쪽을 흘끗 보니, 종이학과 글자들은 여전히 그 위에 딱 붙어 있었다. 보아하니 지난밤 내내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새해 첫날의 햇빛은 비스듬히 방 안을 비추었고, 대추나무 위에도 내리쬐며 나뭇잎 사이로 땅을 얼룩덜룩 물들였다.
응약리는 웃는 얼굴로 돌탁자 옆에 앉은 채, 푸른 비단 치마를 입은 대추나무 아래의 젊은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과 기쁨에 찬 눈빛으로 자신의 손발을 연신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흥분과 긴장이 묻어났다.
끼익-.
안채의 방문이 열리자, 바깥에 있던 두 사람이 계연을 바라보았다.
“계 숙부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어르신, 안녕하세요!”
그러자 계연이 녹색 옷을 입은 여인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드디어 정령이 되다니, 이는 네게 있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딘 셈이니 확실히 기뻐할 만한 일이구나. 다만 진정한 육체를 빚어낸 것과는 여전히 비교할 수 없고, 대추나무와는 너무 멀리 떨어질 수는 없으니 그 점이 아쉽구나. 그래도 이제는 말을 할 수 있는 데다, 의식도 나무 안에 계속 갇혀 있지 않으니 예전보단 훨씬 낫겠지.”
계연에게서 전혀 불쾌해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조낭은 깊이 안도한 뒤 우아한 태도로 예를 취했다.
“조낭, 어르신의 말씀을 깊이 새기겠습니다!”
계연은 고개를 들어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다가, 예를 취하는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는 조낭을 다시 바라보았다. 초목의 정령들은 처음 얼마간은 햇빛 아래 오래 모습을 유지할 수 없고, 태양의 힘에 쉽게 타기도 했다. 하지만 대추나무는 본래부터가 특별한 영근목이었고, 거안소각은 다른 곳보다 특수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조낭은 햇빛 아래에서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이때, 안채 안의 종이학과 글자들이 모두 쪼르르 날아와 기쁨과 호기심을 드러내며 조낭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조낭이 팔을 들어 올리자 종이학이 그녀의 팔 위에 내려앉아 고개를 들어 조낭을 올려다보았다. 조낭은 처음으로 정령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지만, 종이학은 그녀가 조금도 낯설게 느끼지 않았다. 이 점은 계연도 공감하는 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