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663화 (663/892)

663화. 수정보궁(水晶寶宮)

계연도 사실은 늙은 용이 무척 언짢은 기분으로 자신에게 도움을 청할 거라 예상했지만, 화조(火棗)를 요청하는 흉내조차 내지 않을 줄은 몰랐다. 그는 정말로 계연 자신을 깊이 믿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응약리는 자기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곧 늙은 용의 한쪽 팔을 쥐고는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역시 아버지는 절 사랑하신다니까요!”

“됐다, 나이가 몇인데. 네 숙부가 보고 웃겠구나.”

그러자 응약리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아버지의 팔을 놓아주고는 다시 바르게 섰다. 곧이어 그녀의 변장한 모습이 사라지더니, 금사로 수놓은 사포(紗袍)와 장식용 띠가 다시 나타났다. 응약리의 등 뒤로 신령한 빛이 떠오르며 그녀는 통천강 여신의 신성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발아래 구름은 점점 더 높이 고도를 올려,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저 멀리에는 번개가 흐르는 뇌운이 모여들고 있었다. 계연은 곧이어 늙은 용이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떠올렸다.

“응 선생님,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직접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그곳엔 분명 여러 진룡께서 모여계실 텐데, 그런데도 무언가 어려운 일이 있으셨나요?”

그러자 늙은 용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시선을 먼 곳에 던지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계 선생, 상고시대에 천하의 수역(水域)에는 주인이 없었소이다. 우리 용족이 물을 다스리게 된 것은,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상대와 싸워온 결과라 할 수 있소. 하지만 지금도 우리는 사해(四海)를 다스릴 수만 있을 뿐, 황해는 버려둔 상태요. 황해는 물이 혼탁하고 괴이한 일이 많이 생기는 곳이기 때문이오. 옛날에 있었던 용시충 사건도 실은 황해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었소.”

늙은 용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계연을 쳐다봤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옛날, 용시충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크게 번식하기 시작했고, 이를 발견한 후 크게 진노한 용들은 천하 곳곳에서 용시충들을 몰살하기 시작했소. 도를 깨닫고 둔갑한 용시충들을 찾아내 죽였으며, 용족들의 힘을 모아 황해에 사는 용시충들도 모두 죽였소. 그 일로 용족은 크게 원기가 상했지만, 덕분에 천하의 요마(妖魔)들이 겁을 집어먹어 사해의 주인 자리를 공고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했소.

이 일은 모두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용족들 중 지위가 높은 이들은 내내 이 일을 우려하고 있었소. 어떤 이들은 그때 용시충의 출처를 제대로 밝혀내지도 않고 서둘러 몰살시켰다고 생각하기도 한다오.”

“그럼 이번에는요?”

계연이 이렇게 물었다. 일전에 용족들은 용시충에 대한 일을 깊이 숨긴 채, 절대 외부인이 끼어들도록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라진 듯하니, 계연으로서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늙은 용의 표정이 한껏 무거워지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번 일은, 우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소…….”

계연은 그 말에 눈초리를 가늘게 뜨며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응굉은 언제나 천하에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여왔는데,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사안이 심각한 모양이었다.

우르릉……!

천둥소리가 울리자 계연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밟고 서 있는 구름 아래로, 꿈틀거리는 먹구름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그 안에는 번개가 흐르며 천둥이 치고 있었는데, 이는 구름이 진룡의 기분을 따라 변하기 때문이었다.

* * *

세 사람은 속도를 더욱 높여 통천강에는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동해로 나갔다. 며칠 뒤, 저 멀리 시선을 가리는 먹구름이 잔뜩 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아래로는 광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며, 벼락이 떨어지고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 사이로 용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늙은 용은 저 앞의 먹구름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계연에게 설명했다.

“계 선생, 저쪽이 용족 회맹(會盟)이 자리한 곳이오. 이번에 나를 포함해 진룡은 총 네 명이 와 있는데, 각기 동, 남, 북, 세 바다에서 왔고, 나는 동해 소속의 두 번째 진룡이오. 그에 더해 사해에서 온 교룡 백여 명이 있소. 저들 모두 내가 계 선생을 모셔오기만을 기다렸다가, 함께 황해로 향할 예정이오.”

말을 마친 늙은 용은 뱃속에서부터 깊은 울음을 내뱉었다.

“아오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용의 울음을 들으니, 마치 공기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밖으로 드러난 피부에는 저릿함이 느껴졌고, 주위의 기류는 물결처럼 진동했다. 이는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었지만, 어쩐지 귀를 찌르는 느낌이 들거나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늙은 용이 울음소리를 내자, 멀리서 여러 용의 화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우-!”

“아오-!”

그들이 타고 있는 구름이 먹구름 아래로 내려가자, 하는 장대비가 쏴아아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곳에는 용의 기운이 가득 깔려 있었다.

우르릉……!

새까만 해수면 위로 번개가 내리치자, 곧 그들의 시야에 커다란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에는 투명하게 빛나는 거대한 궁전이 세워져 있었는데, 주위로 떨어지는 번개 때문에 더욱 빛났다. 궁전의 면적은 매우 넓어서 섬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심지어는 물속으로 연결된 부분도 있었다. 매끄럽게 반짝이는 진주와 투명한 수정, 진귀한 산호 등으로 장식된 궁전은 보기만 해도 부귀함이 넘쳐흘렀고 사방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거의 멀어버린 계연의 눈을 완전히 멀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계 선생, 저곳이 바로 황(黃) 용왕의 수정보궁(水晶寶宮)이오. 황 용왕은 저것을 보물처럼 아껴 항시 지니고 다니며, 때때로 쉬어가는 곳마다 꺼내어 사용한다오. 우리는 이대로 곧장 안으로 날아가면 되오.”

늙은 용은 계연에게 간단히 수정보궁을 소개한 후, 구름을 몰아 계연과 응약리를 데리고 수정보궁으로 향했다. 궁전 외곽에는 교룡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과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용들이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다. 늙은 용의 일행이 채 내려서기도 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전 안에서 그들을 맞이하러 나왔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응굉과 계연을 향해 있었다.

“응 용왕, 곁에 계신 저분이 바로 계 선생이로군?”

늙은 용이 내려서자, 십여 명의 사람들이 그들을 맞이하러 다가왔다. 그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가운데 서 있던 한 노인으로, 기다란 황색의 눈썹과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차려입은 장포에는 용 무늬가 수 놓아져 있었다.

계연이 법안을 열어 살펴보니, 노인의 모습 위로 똬리를 튼 황룡(黃龍)의 형상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는 계연이 예전에 비행선을 타고 선유대회로 향하던 길에 만났던 바로 그 진룡이었다.

“예, 제가 바로 계연입니다. 황 용왕,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황룡은 본래 자신이 어디서 계연을 봤었는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계연의 두 눈을 보자마자 비행선에서 그를 만났던 것이 떠올랐다. 이에 그는 두 눈을 반짝이며 계연을 향해 가볍게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예전 그 일은, 이 황유중(黃裕重)이 다시 한번 선생께 감사드리는 바요.”

그를 제외한 다른 교룡이며 진룡들은 저마다 담담하거나 혹은 호기심을 담은 눈길로 계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도가 무례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간 계연이 만났던 다른 수행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응풍만이 얼굴 가득 희색을 띤 채로 계연을 향해 장읍례를 올리며 “계 숙부님.”하고 인사했다.

응굉은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와, 용들을 앞에 두고 웃는 얼굴로 계연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여러분, 이쪽이 바로 나 응굉의 벗이자 수선자인 계연, 계 선생이오. 어떤 선문에도 속해있지 않으며, 대정국 시정에 은거하며 속세를 유람하는 것을 즐기는 분이시라오. 내가 평생의 지기로 삼고 있으니, 믿을 수 있는 분이오.”

소개를 마친 응굉은 다시 한 걸음 걸어 나가, 계연을 바라보며 뭇 용들을 소개해주었다.

“계 선생, 이미 아는 사이지만 이쪽이 바로 황 용왕이시오. 이쪽은 청룡(靑龍)인 청 용왕이고, 북해(北海)에서 오셨소. 이쪽은 공융(共融), 공 용왕이시고 남해에서 오셨소. 다른 교룡들은 나를 비롯한 분들의 수하로 따라온 이들이니, 굳이 소개해드릴 필요는 없을 듯하오.”

계연은 늙은 용이 그에게 한 명씩 소개해 줄 때마다, 일일이 그들에게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그의 인사를 받은 용들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인사로 답했다. 계연은 그 와중에도 공융의 뒤쪽에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젊은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준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원기를 크게 상한 것이 척 봐도 그가 응약리에게 당한 용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서로 소개와 인사를 마친 후, 황룡이 먼저 입을 열어 친절한 태도로 말했다.

“계 선생, 어서 우리를 따라 수정궁으로 들어와 쉬시지요. 곧 황해로 출발할 예정이니 말이오. 자, 그럼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이쪽입니다!”

“계 선생님, 어서 들어오시지요!”

용족들은 보통 성격이 좋지 않았고, 심지어는 포악하기까지 했으나 도리도 따지지 않고 패악을 부리는 이들은 아니었다. 특히나 계연은 응굉과 막역한 사이인 데다, 그들의 초청으로 이곳에 오게 된 것이었으므로 용족들 모두 그를 예의 있게 대했다.

이 수정궁은 밖에서 볼 때도 아주 호화로웠는데, 계연이 용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보니 보석들이 내뿜는 빛이 시야를 가릴 정도였다. 각종 보석과 명주(明珠)로 상감된 벽에서는 여러 색깔의 광채가 나고 있었는데, 그 빛깔들은 서로 알맞게 조화를 이루어, 정교하고도 호화로운 예술적 정취가 느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계연은 이 눈을 멀어버리게 할 것 같은 이 호화로움과 광채에서 시선을 돌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문제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수정궁 대전의 중앙에는 붉은 산호로 만들어진 탁자가 있었는데, 네 명의 진룡과 계연은 그 탁자 주위를 빙 둘러섰고 다른 교룡 등은 바깥쪽에 섰다.

산호 탁자 위에는 까맣고 붉은빛이 뒤섞여 빛났는데, 그 중앙에는 들끓는 액체처럼 어떤 덩어리가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생물은 아니었지만 마치 살아있는 듯이 움직여, 황 용왕의 통제가 없었다면 이미 어디론가 튀어 나갔을 것 같았다.

그 덩어리는 용왕의 힘이 의해 통제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내뿜는 빛에서는 여전히 강렬한 악의가 느껴졌다. 대전 안의 용족과 계연 중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 덩어리는 마치 이 자리의 누구든 씹어 삼키고 싶은 것처럼, 그 악의와 살기가 실체가 되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에 용왕들과 계연의 뒤편에 선 교룡들은 온몸의 털이 바짝 서고 식은땀이 다 흐르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상대를 공격하고 싶은 듯 힘차게 움직이는 그 검붉은 덩어리는 보기만 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이 없을 정도였다.

“계 선생, 실은 우리가 반년 전에 수십 장(丈)에 달하는 길이의 용시충을 죽인 적이 있었소. 그것의 뱃속에서 이 덩어리가 나왔는데, 악의의 농도가 평생에 본 적이 없을 정도였소. 그놈을 죽이는 과정에서 우리도 푸른 교룡(靑蛟) 하나를 잃었다오. 만약 이 늙은이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교룡이 죽었을 것이오.”

계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황룡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확실히 엄청난 악의로군요. 게다가 그 악의가 네 분 용왕께 향해 있어요.”

그러자 응굉이 계연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계 선생, 혹시 이 덩어리가 지난번에 내게 약리를 통해 알려준 상고시대의 흉수(凶獸)인 ‘후(*犼: 개와 비슷한 식인 야수의 일종)’와 관련이 있소?”

계연 자신은 그의 물음에 확답을 줄 수는 없었지만, 대신 시도해 볼 만한 물건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매 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그건 저도 확언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 화폭에 저 덩어리를 보여주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황 용왕께서 부디 저 사악한 물질을 잘 통제해 주세요, 두루마리를 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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