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4화. 괴이쩍은 피
계연은 오른손으로 두루마리를 활짝 펼쳤다. 그 안에는 위풍당당한 맹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온몸이 짙고 빽빽한 검은 털로 뒤덮여 있었다. 두 눈은 살아있는 듯이 반짝였고, 이마 위에는 커다란 뿔 하나가 달려 있었다. 네 발은 굵고 단단해 보였고, 발톱은 마치 갈고리처럼 날카로웠다. 굵은 몸통에 짧은 꼬리를 지녔으며, 커다란 입 안에 기다란 송곳니가 나 있어 교룡들은 그 그림을 보기만 해도 이 맹수의 위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화폭 위에 그려진 것은 상고시대의 신수(神獸)인 해치예요. 그러니 어쩌면 이 사악한 물질이 무엇인지 알아볼지도 몰라요.”
계연은 구태여 더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해치 그림으로 법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화폭 위에서는 검은 연기가 치솟았고 갈수록 그 색이 더 진해졌다. 뒤이어 맹수가 송곳니를 드러내고 위협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것은 화폭 안에서 들리는 게 아니라 마치 주위에서 들리는 듯하여 교룡들은 경계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악-! 그르르…….”
계연의 오른손과 화폭은 어느새 화염 같은 검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해치의 반응은 어쩐지 지난번보다 훨씬 강렬했는데, 그 위협적인 소리 다음에 곧장 위엄이 서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해치다, 감히 나를 방해한 자가 누구냐? 크르릉…….”
그러자 수정궁 안의 기류가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검은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황 용왕이 통제 중인 검붉은 물질마저도 그 움직임이 더뎌진 게 눈에 보였고, 뒤쪽의 교룡들은 하나같이 경계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
계연은 평온한 목소리로 화폭 안의 해치를 향해 물었다.
“해치, 이 물질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두루마리를 산호 탁자 가까이 갖다 대며, 더욱 많은 법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화폭 안의 해치는 더욱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되어 금방이라도 그림을 뚫고 나올 듯했다.
“크르릉…… 크르르…….”
그림 안의 해치가 마치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것처럼 계속해서 부딪혀오자, 두루마리가 계속해서 덜덜덜 흔들렸다.
다른 이들은 이 화폭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계연만은 지금 이 해치가 아주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걸 알았다. 해치는 언제나 흉악하고 위엄 넘치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처럼 격렬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뒤이어 주위 교룡들의 경악하는 눈빛 아래, 검은 연기에 휘감긴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해치의 앞발이 화폭 밖으로 튀어나왔다. 해치의 격렬한 감정을 보여주듯이 발톱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림 속의 맹수가 살아있어!’
이는 이 순간 진룡들을 포함한 모든 교룡의 생각이었다.
“저 피를 내게 다오, 저 피를 내게 다오! 이 어르신께…….”
‘피? 이게 피라고?’
그 말에 모든 이들이 해치 그림에서 산호로 된 탁자 위의 물질로 시선을 옮겼다.
‘검붉은 빛을 내는 충만한 악의가 담긴 저것이 피라고?’
이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결과였다. 용시충을 죽인 뒤 그 시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는 정상적인 피라면 모두 증발해 버렸어야 했다.
계연은 혹시 해치가 무슨 돌발 행동이라도 벌일까 싶어서 온통 검은 연기가 뒤덮인 해치 그림을 오른손으로 흔들림 없이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 화폭은 겉보기에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계연에게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마치 상대방의 법력이 있어야만 지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용족들이 아직도 저 물질이 피라는 것에 놀라고 있을 때, 계연은 저 피가 아마도 용시충의 것이 아닐 거라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 피를 이 어르신께 다오, 크릉……!”
해치는 앞발을 뻗어 그 물질에 닿으려 했으나, 황 용왕의 힘이 가로막고 있어 격렬하게 꿈틀거리는 그 검붉은 물질에 닿을 수가 없었다. 화폭 안의 해치는 아무리 용을 써도 그 물질을 잡을 수가 없자, 황룡에게 시선을 옮겼다.
“용?”
계연은 오른손을 한번 털어, 해치의 앞발을 다시 화폭 안으로 흔들어 넣으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치, 이 피는 누구의 것인가요?”
계연은 법력을 점점 더 많이, 그리고 더 빠른 속도로 주입하고 있었다. 그는 요청받고 이곳에 온 것이므로 최대한 도움을 베풀고 싶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용왕이 네 명이나 모여 있으니, 설령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들이 통제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혹시 자기가 법력을 더 많이 주입하면 해치가 지금의 단순한 대답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렇게 행동한 것이었다.
“저 피를 이 어르신께 다오, 내게 다오, 내게…….”
다만 해치는 계연의 물음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쉬지 않고 포효하며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두루마리에서 나오는 검은 화염은 점점 더 기세를 높여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치지직…… 치지직……!
검은 화염이 산호로 된 탁자에 닿자, 보석들이 빛나는 탁자가 검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의 용족들은 위험한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기운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강렬해졌고, 변화의 속도도 빨라졌다.
응약리와 응풍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뒤편으로 물러나는 동시에 다른 교룡들에게도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교룡들은 잠시 망설이다 시선을 계연이 든 그림 위에 고정한 채 뒤로 물러났다. 그 검은 화염은 무척 위험한 기운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중앙의 산호 탁자도 실은 일반적인 물건이 아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을리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였다.
“피! 저 피를 내게 다오!”
계연이 네 명의 진룡들을 바라보니, 그들은 자신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응굉이 그림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계연에게 물었다.
“계 선생, 이제 어찌하면 좋겠소?”
계연은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네 분 용왕께서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나, 제게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이 피를 조금 잘라내어 해치에게 주면 혹시 무슨 변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늙은 용을 비롯한 용왕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들도 실은 계연과 같은 생각을 떠올리던 중이었다. 이왕 이런 상황이 되었으니, 시도해보는 게 좋을 듯싶었다.
“나는 계 선생의 제안에 동의하는 바요.”
“이 늙은이도 계 선생의 말씀에 동의하오. 후에 연구할 수 있는 정도의 양만 남겨두면 충분하오.”
응굉과 황룡이 먼저 동의를 표하자, 청룡과 공융도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럼 이 늙은이가 피를 조금 잘라내 보겠소. 계 선생, 어떻소?”
해치가 입만 열면 저것을 ‘피’라고 부르니, 자리한 이들도 일단은 이것을 피라고 여기기로 했다.
“그럼 황 용왕께서 수고해 주세요, 저는 준비됐습니다.”
그렇게 계연은 해치 그림을 제어하고, 황유중은 자신이 통제 중인 괴이쩍은 피에다 손가락을 뻗어, 길고 뾰족한 손톱으로 가볍게 그었다. 그러자 소리도 없이 검붉은 빛을 내뿜는 ‘피’가 두 덩이로 갈라졌다. 황룡은 그중 반 덩이를 손에 쥐었고, 나머지 반은 산호 탁자 위에 남긴 채 계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 분 용왕께서 이제부터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 이 해치가 비록 그림이긴 하나, 상고시대의 신수인 만큼 무슨 큰 힘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안심하시오, 계 선생. 우리 다섯 명이 여기 모여서 고작 그림 한 폭도 통제하지 못한다면 그 무슨 망신이겠소!”
황룡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계연도 더 주저하지 않고 해치 그림을 산호탁자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그림 안에서 해치의 앞발이 다시 한번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어떤 것도 사이를 가로막지 않아, 드디어 그 괴이쩍은 혈액에 해치의 발이 닿을 수 있었다.
해치는 앞발로 천천히 피를 움켜쥐더니 다시 그림 안으로 발을 끌어왔다. 그 동작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워서, 마치 쉽게 깨질 위험이 있는 물건을 다루는 듯했다. 날카로운 앞발이 다시 그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주위의 검은 화염이 단번에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계연과 네 용왕은 그림 안의 해치에 집중하며 그 안에서 일어날 변화를 기다렸다.
생생하게 움직이는 해치는 앞발을 얼굴 앞으로 가져오더니,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을 쩍 벌리고는 용암처럼 검붉은 그 물질을 입 안으로 삼켰다.
“꿀꺽-!”
그림에서부터 무언가 목구멍을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별것 아닌 가벼운 소리일 뿐이었지만, 멀찍이 떨어져 있던 교룡들은 마치 귀청이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후욱……!
뒤이어 검붉은 연기가 해치의 입과 콧구멍에서 뿜어져 나왔으나, 다시 숨을 들이쉰 해치에 의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자 해치의 사지, 비늘, 털, 수염 등에서 각기 다른 광채가 빛나더니 천천히 잦아들었다. 곧이어 해치는 사람과 무척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오래가지 않았고, 해치는 곧장 그림 바깥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너무 적다, 너무 적어! 어서 이 어르신께 조금 더 가져오너라, 조금 더!”
계연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이 해치는 자기가 정말로 무슨 어르신인 줄 아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해치, 방금 당신이 먹은 그 피는 누구의 것인가요?”
“너무 적어, 너무 적어! 어서 이 어르신께 좀 더 가져오너라, 좀 더! 하하하하…….”
그림 안의 해치는 조금이나마 피를 먹은 덕분인지, 원래보다 감정 표현이 더욱 풍부해져 이제는 웃기까지 했다.
네 명의 진룡들은 모두 계연을 바라보았고, 계연은 굳게 찡그린 얼굴로 무언가 생각하더니 해치를 곧 자신의 얼굴 앞으로 돌렸다. 그는 회백색의 눈으로 해치를 직시하며, 담담하지만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치 어르신, 저희가 그 피를 좀 더 구해다 드리려면, 어르신께서 먹은 피가 어느 존재의 것인지 저희에게 알려주셔야 해요.”
그림 속의 해치는 마치 유리 벽 너머의 맹수처럼 한 걸음씩 그림의 표면 가까이 다가오더니, 계연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 어르신이 백택(*白澤: 사자를 닮은 신수(神獸)로, 세상 만물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함)도 아니고, 그림에 불과하여 감각도 거의 없다시피 한데 방금 먹은 게 무엇의 피인지 어찌 아느냐? 어쨌든 무슨 선량한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러니 그것을 어서 어르신께 가져와라, 어서! 그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 부족해, 부…….”
해치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계연은 두루마리를 접어 자신의 법력을 거둬들였다. 보아하니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계연이 채 두루마리를 말기도 전에 그림 속에서 발이 튀어나오더니, 두루마리 끝단을 잡아 계연이 그림을 말지 못하도록 막았다.
“잠깐, 잠깐! 기다려라! 이 어르신이 아직 할 말이 남았다!”
이때 계연은 두 손으로 두루마리 양쪽을 잡아 닫으려 하고 있었고, 해치는 앞발로 족자의 아래쪽을 눌러 계연의 힘에 맞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