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5화. 그림의 변화와 용들의 천적
계연은 조금 놀랐지만, 한편으론 해치의 변화에 흡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해치가 이제 그림을 접는 힘에 대항할 수도 있다는 걸 알고는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한 주위의 용족들을 둘러보고는, 일부러 느긋한 목소리로 해치를 향해 웃으며 물었다.
“해치 어르신,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요?”
“흐윽, 너, 얼른 힘을 좀 빌려주거라……. 이 어르신이 곧…… 허억…….”
계연은 이것이 그가 법력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는, 망설임 없이 다시 그림 안으로 법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그림에서 다시 한번 연기가 치솟더니 곧이어 검은 화염이 불타올랐다.
“후(犼)다, 9할의 확률로 그것은 후의 피인 것이 분명하다. 주위에 용의 기운이 느껴지고, 그 피가 이토록 충만한 악의를 뿜어내는 것을 보면 이는 후의 피라는 뜻이다. 이제 피를 좀 더 다오, 어서 그것을 전부 이 어르신께 다오, 이 어르신…….”
그때 계연이 다시 법력을 거둬들인 뒤 두루마리를 돌돌 말아버렸다. 미처 계연의 동작을 멈춰 세우지 못한 해치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계연은 두루마리를 말아쥔 채 약간 체념한 듯한 얼굴로 네 명의 진룡을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해치에게서 이보다 더 많은 정보는 얻어내기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방금 해치가 한 말과 그의 격렬한 반응을 보아하니, 최소한 상고시대 흉수(凶獸)의 피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 보입니다.”
응굉은 계연이 말아쥔 그림을 보며 물었다.
“예를 들어 해치가 방금 말한 ‘후’ 같은 것 말이오? 계 선생이 지난번 내 여식을 통해 전한 말과 같은 흉수로군.”
그러자 청룡과 황유중이 차례로 말을 이었다.
“후라는 게 대체 어떤 동물이오? 일전에도 그저 상고시대의 흉수라고 들은 게 전부이니, 이왕 여기 오신 김에 우리에게 후에 관해서 설명을 좀 해주시오. 소위 상고시대의 신수와 흉수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오.”
“맞소, 계 선생께서 괜찮으시다면 우리에게도 설명을 좀 해주시길 바라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계연도 이제는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 생에 그는 신화나 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게 아니었고,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읽다가 몇몇 이름에 대해 알게 된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자신이 아는 내용을 최대한 포괄적인 방향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네, 사실 세세히 따져보자면 용과 봉황도 신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어요. 제게 용족 여러분을 짐승으로 취급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으니, 이 점에 대해서는 양해 부탁드립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것뿐이니까요.”
“우리도 무슨 뜻이니 알고 있으니, 개의치 말고 계속 말씀해 주시오.”
황룡이 먼저 이렇게 나서니, 응굉도 굳이 계연을 돕기 위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이에 계연도 마음 놓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상고시대에 일어났던 분쟁이나 알력 싸움에 대해서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고, 보는 시각이 각기 다르기도 해요. 더욱이 지금에 와서는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도 없고요.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그저 상고시대의 신수나 흉수들이 아주 신비롭고 위세 넘쳤던 동물이라는 것만 알아 두시면 됩니다. 지금의 용이나 봉황처럼 말이죠. 이를 전제로 깔고, 먼저 후에 대해서 알려 드릴게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보며, 산호탁자 위의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수증기가 응결되며 그 위로 빛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일전에 응약리가 계연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형상이 만들어졌다. 다만 이번에는 좀 더 또렷하고 생동감이 넘쳤는데, 이는 계연이 수정을 거쳐 보충한 것이었다.
계연이 그려낸 것은 커다란 입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달린 동물이었다. 그것의 몸은 거대한 개와 비슷해서 길고 날렵했다. 털과 비늘이 섞여서 나 있고, 사자의 갈기와 비슷한 것이 달려 있었다. 동물의 입과 코에서 화염이 뿜어나오자, 형상의 테두리가 약간 그을린 듯한 느낌이 났다. 그에 더해 계연은 조금 전 그 괴이한 피가 내뿜던 악의를 모방해내어 이 생생한 동물의 형상에 괴이쩍고 섬뜩한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동물은 마치 자리에 있는용족들을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만약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옛날에 용족과 흉수인 후는 대대로 원수 사이였습니다. 후는 용들을 잡아먹는 걸 좋아했어요…….”
계연은 그리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았으나, 생생히 그려낸 형상 덕분에 짧은 몇 마디만으로도 자리한 용족들은 옛날에 존재했다던 흉악한 흉수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해낼 수 있었다. 후와 용은 서로를 눈엣가시처럼 여겼으며, 그들은 특히나 용의 뇌를 파먹는 것을 좋아했으니 용족에게 있어서는 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이를 듣던 교룡들은 소름에 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고, 네 명의 진룡들도 하나같이 표정이 무거웠다. 그들의 눈에 계연은 선도(仙道)의 정상에 서 있는 인물로, 그가 하는 말에는 자연히 엄청난 공신력이 있었다. 그러니 그들이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동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용족들은 생각했다. 게다가 그들도 검붉은 빛을 띠는 괴이한 피를 보았었고, 조금 전에는 그림 속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해치라는 신수까지 보지 않았던가.
계연은 사실 그리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한두 마디 설명할 때마다 주위의 누군가가 질문을 던져 더욱 자세히 파고들곤 했다. 이에 대해 계연은 대체로 자신이 아는 게 얼마 되지 않는다고 느꼈으나,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또 아주 세세하게 알려줄 수 있었다. 그에 더해 용족들 사이에 잦은 의논과 말싸움이 일어나기도 했고, 중간에는 용시충의 문제가 대두되기도 하여 자리가 아주 오래 이어졌다.
밤이 되자 응굉과 다른 진룡들은 수정궁 어느 곳에서 용족 내부의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반면 응약리와 응풍 두 사람은 계연을 이끌고 수정궁 곳곳을 한가로이 구경했다.
우르릉……!
번쩍-! 콰광……!
쏴아아아……!
폭우가 쉬지 않고 쏟아져 내렸고, 머리 위를 뒤덮은 먹구름에서는 번개가 반짝이다 때때로 떨어져 내려, 수정궁을 더욱더 반짝이게 했다.
수정궁은 이때 섬 위에 있었으나, 이 섬만으로는 수정궁 전체를 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궁전의 많은 누각은 수면 위에 떠 있기도 했고, 어떤 것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덕분에 이 어두컴컴한 폭우 속에서 수면 위아래의 궁전은 찬란한 빛을 뿜으며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냈다.
이 커다란 궁전은 조금 휑해 보였는데, 교룡 중에는 원래 모습인 상태로 궁전 안이나 지붕 위에 누워있는 이들도 있었고, 사람의 모습으로 휴식을 취하는 자도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폭우는 수정궁에 닿으면 부드럽게 변해 궁전 주위를 가볍게 때리고 지나갈 뿐이어서, 용족들은 좀 더 편히 잘 수 있었다.
“계 숙부님, 제가 볼 때 저희 아버지와 다른 용왕께서는 곧 사해(四海)로 소식을 전해, 오늘 논의했던 일을 여러 곳의 용왕에게 알리려고 할 거예요. 그러니 어쩌면 다른 용족들이 더 올 수도 있어요.”
응약리는 이렇게 말하며 멀리 어느 궁전의 지붕 위에 똬리를 튼 짙은 붉은색의 교룡을 바라보았다. 그 교룡의 호박색 눈은 내내 이쪽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응약리에게 당해 불구가 되어버린 공수였다.
계연이 아무 말 없이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 교룡은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던 척했다.
“흥, 계 숙부님, 저 고자가 된 교룡의 일은 벌써 용족 사이에 파다하게 퍼졌어요. 제가 만약 저놈이라면, 용족 내부의 규율에 따라 약리와 목숨을 걸고 일전을 벌였을 겁니다. 설령 죽더라도 용의 혼(魂)은 물길을 타고 흘러갈 뿐이니, 체면은 떨어지지 않겠죠. 그런데 지금 저 꼴을 좀 보세요, 하! 남해에 고자가 된 용이 있다니, ‘수(*綉: 옛날에 수를 놓는 일은 규중의 여인이 하던 일이라 인식되었음)’라는 이름과 아주 잘 어울리게 되었지 뭡니까.”
응풍의 말은 동생인 응약리보다 훨씬 신랄했다. 말끝마다 고자, 고자하고 부르니 계연조차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이 집안사람들은 그냥 보면 서로 성격이 판이한 듯했으나, 사실은 무척 닮은 이들이었다. 자기가 성질이 났다 하면 절대 꺾고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공수는 어쨌든 공 용왕의 아들이니, 그 자체로는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 해도, 이 일로 공 용왕의 체면이 땅에 떨어진 것 아닌가요?”
계연은 용족 내부에도 그들끼리 마찰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다른 요족(妖族)과 달리 용족들은 결속력이 강해, 그런 일이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을 따름이었다.
“하하, 계 숙부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습니다. 공수는 공 용왕의 아들이긴 하나, 가장 총애받는 아들은 아닙니다. 상대를 제압하여 짝짓기하려다 반대로 공격당해 고자가 되었으니, 그는 이미 사해 용족들의 웃음거리가 됐죠. 그러니 공 용왕은 이제 더욱 공수가 마음에 차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그날 화를 내지 않으시고 선인(仙人)인 친우에게 영근목의 과실을 구해다 주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공 용왕의 체면은 충분히 세워드린 셈입니다.”
응풍은 이렇게 말하며 한껏 비웃음을 띤 채로 멀리 궁전 지붕 위의 공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동생인 응약리를 바라보더니, 계속해서 계연을 향해 말했다.
“계 숙부님, 저희 아버지께는 자식이 오직 저와 동생, 단 두 명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용족들도 모두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공 용왕의 자손은 수백이 넘는데, 그는 여태껏 교룡, 상어, 고래, 각종 물고기, 돼지, 말 등 여러 요괴와의 사이에서도 자식을 보아왔습니다. 그중 교룡이 된 자녀만 해도 수십 명이니, 공수가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그 말에 계연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숨을 헉 들이마셨다.
‘공 용왕의 자식 농사는 엄청난 풍작이구나.’
이렇게 보니, 자기 친우인 응굉은 비록 부인과의 사이에 골이 깊긴 해도, 아주 모범적이고 순정적인 남자라 할 수 있었다.
“아오오…….”
멀리서부터 들리던 용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근처에 있던 교룡들이 바닷속에서 장난을 치는 소리인지, 또 다른 용족들이 수정궁으로 오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계연이 수정궁으로 온 당일만 해도 그 뒤로 십여 명의 교룡들이 차례로 수정궁에 도착했다.
* * *
수정궁은 용족의 보물이었으나 궁전의 방이며 침상, 준비된 침구류에는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계연은 그중 한 방에 며칠간 머물렀고, 그동안 매일같이 응풍과 응약리가 그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2주 뒤, 수정궁에서 커다란 용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궁 안 곳곳과 주위 해역에서 잇따라 용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때 계연과 진룡 넷은 수정궁 밖에 서 있었다. 황 용왕이 입을 벌려 용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바람을 불러일으키자, 수정궁 전체가 그 바람에 휩싸여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수정궁이 황 용왕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그들의 발아래로는 민둥민둥한 섬의 표면만이 남았다.
“여러 용왕 분들, 그리고 계 선생, 우리는 이제 원래 계획에 따라 황해에 흐르는 암류(暗流)를 탐색하러 떠나도록 하겠소. 그리고 만약 그곳에 감히 우리 용족에 해를 끼치려는 무리가 있다면,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황유중은 말을 마친 뒤 곧바로 바람과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계연도 주위의 용왕들과 몇몇 교룡과 함께 하늘로 떠올랐고, 뒤이어 수많은 교룡이 그 뒤를 따랐다. 이때 사람의 모습을 한 소수의 용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때 머리 위로는 계속 폭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풍랑도 높이 일어 파도의 높이가 10m도 더 되어 보였다. 이 해역 전체가 마치 거칠고 사나운 파도로 뒤덮여 있는 듯했다. 수정궁에 있던 용족들에 며칠 새 날아온 교룡들까지 합세하여, 총 삼백 명에 가까운 용들이 격랑이 이는 바다 위를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