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679화 (679/892)

679화. 맞서다

* * *

봉화가 석 달이나 연이어 오르니, 변경에 나간 병사들에게 집에서 온 서신을 받는 것은 무척 소중한 일이 되었다. 종군하는 가족을 둔 후방의 가족들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윤중이 출정한 지는 이미 수개월이나 되었고, 계연이 경기부에 온 지는 한 달이 조금 더 지난 때였다. 이날 윤씨 집안 사람들은 마침내 윤중이 보낸 서신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안에는 전선의 전보가 함께 들어 있었다.

한편, 사천감 관청 내부에서는 계연이 거대한 권종실(*卷宗室: 공문서나 문건을 보관하는 곳) 안에서 문헌을 뒤적이고 있었다.

권종실은 마치 거대한 도서관 같아서, 이 안에는 역대 사천감 관원들이 곳곳에서 찾아 모은 천문과 별자리에 관한 서적부터 기타 관련 내용들이 기록된 문헌으로 가득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정국의 수백 년 역사 동안 역대 태상사와 그 아래 관원들이 직접 편찬한 문헌도 있었다. 심지어 상당한 양의 사서(史書)들도 소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전조(*前朝: 바로 전대의 왕조) 혹은 전전조에서 별을 관측한 기록들이었다.

계연과 언상은 원래 지난 이야기를 나누며 사천감을 둘러보러 왔다가, 이런 보고(寶庫)를 발견하고는 순간적으로 흥미를 느꼈다. 언상이 보기에 역대 사천감 관원 중에는 능력 있는 자들이 적지 않았고, 이런 현학(*玄學: 이론이 깊고 어려워 깨닫기 힘든 학문)에는 어느 정도 과학적이고 엄밀한 정신이 깃들어 있기도 했다.

그래서 계연은 사천감에 아예 눌러앉아서 매일같이 이 문헌들을 뒤적이고 있게 된 것이었다.

이론적으로 보면 이 문헌들은 당연히 조정의 기밀에 속했으니, 사천감 관원들을 제외하면 계연이든 조정의 고관이든 모두 언상의 동의는 물론 어쩌면 황제의 비준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이론일 뿐이고, 현재 사천감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두 사람 중 하나는 태상사 언상이고 다른 하나는 국사 두장생이었으니, 감히 그들 중 누가 계연을 막겠는가? 그들은 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심전력으로 계연을 보필하고 있었다. 물론 계연은 자기가 귀하신 몸도 아니고 남들의 시중은 필요 없다고 여겼지만 말이다. 계연은 차 혹은 술, 더불어 약간의 간식거리, 그리고 방석 몇 개면 권종실에서 마음껏 편하게 머무를 수 있었다.

계연이 이곳에 자리 잡았으나, 언상과 두장생은 이를 새 황제에게 알리지 않았고 오히려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계연과 함께 권종실에 틀어박혀 버렸다. 언상은 자주 계연과 함께 문서에 적힌 것에 대해 토론하며 이를 배움의 기회로 삼았다. 두장생은 원래 이 틈을 타 계연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뿐이었으나, 뒤로 갈수록 그 토론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계연도 당연히 이런 두 사람에게 아무런 반감도 느끼지 않았다.

권종실 안은 여러 개의 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바깥쪽 벽이든 안쪽 벽이든 창문이 없는 곳에는 모두 크고 높다란 나무 서가(*書架: 책 따위를 얹거나 꽂아두는 선반)가 세워져 있었다. 안쪽으로 갈수록 서가 안의 기록들이 빽빽했는데, 그중에는 종이로 된 것도 있었고 견본(*絹本: 명주에 쓰거나 그린 서화)으로 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많은 것은 역시 죽간(*竹簡: 대나무 조각을 엮어 만든 책) 등의 나무 조각으로 엮은 것이었다. 이런 문서들을 꺼내려면 거대한 도서관에서 하듯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가야 했다.

계연은 왼손으로는 칼로 글자를 파내 조각한 죽간을 들고서, 오른손 검지로 글자를 만지며 내용을 읽고 있었다. 그동안의 별자리 변화를 세세하게 연구한 기록물이었다.

“어, 계 선생님, 이것 좀 보십시오. 여기, 중배(仲裵) 공(公)이 별을 보고 재앙에 변화가 생길 것임을 예측한 기록이 밖으로 전해지는 것보다 백 년은 빠릅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딱 들어맞습니다!”

언상은 마찬가지로 손에 죽간을 한 권 들고 있었는데, 그 위의 내용을 보더니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계연과 두장생이 가까이 다가와 그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과연! 그렇다면 중배 공은 전해진 것처럼 전조(*前朝: 바로 전대의 왕조) 보화(寶和)11년 사람이 아니라, 그보다 백 년은 이른 시기에 살았던 사람이군요…….”

“음, 정말 대단한 인물인데, 아깝게 되었네요.”

계연이 이렇게 말하며 탄식하는 순간, 사천감의 차역(*差役: 하급 관리, 관청의 심부름꾼) 하나가 다급히 권종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멀리 벽에 기대어 앉은 세 사람을 발견하고는 얼른 다가가 예를 올리며 말했다.

“감정 대인께 아룁니다. 방금 궁에서 사람을 보내왔는데, 황상께서 급히 감정 대인과 국사께 입궁하여 알현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긴요하게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합니다.”

“음?”

“황상께서 우리에게 입궁을 명하셨다고?”

언상과 두장생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새로 즉위한 황제는 여태까지 그들을 찾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입궁하라니? 언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차역에게 물었다.

“혹 무슨 일로 나와 국사를 들라 하신 것인지 아느냐?”

차역은 고개를 들어 여전히 느긋한 태도로 죽간을 읽고 있는 계연을 보았으나, 차마 그는 저자가 누구냐고 묻지는 못하고 그저 아는 대로 상관에게 대답했다.

“대인께 아룁니다. 듣자 하니 오늘 동문(東門) 밖에서 깃발을 단 기수들이 서둘러 도성에 들었다 합니다. 아무래도 동북쪽 제주에서 보낸 중대한 전보(戰報)를 전해온 것이라 사료 됩니다.”

“변경의 전보가 전해졌다면, 가장 먼저 불러야 하는 곳은 사천감이 아닐 텐데?”

두장생도 자리에서 일어나 의아한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책장에 기대어 앉아있던 계연이 잠시 미간을 찡그리더니, 곧이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글쎄요. 두 분 대인께서는 서둘러 입궁하시는 것이 좋겠네요. 황상께서 기다리시지 않게 말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시 한번 눈을 마주친 뒤,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계연을 향해 허리 굽혀 예를 취했다.

“그럼 선생님,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소인 두장생,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계연은 고개도 들지 않고 그들에게 어서 가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그제야 몸을 돌려 황명을 전해온 차역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함께 권종실을 나섰다.

* * *

일각(15분) 뒤, 언상과 두장생은 함께 어서방 밖에 이르렀다. 바깥에 있던 태감이 그들의 도착을 고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자, 어서방 안에는 이미 적지 않은 문신과 무장들이 서 있었다.

안에서는 한창 격렬한 논쟁이 오가고 있었는데, 태감이 들어온 것을 본 황제가 손을 들어 올리자 문무 대신들이 즉시 말을 멈췄다. 그러자 태감이 얼른 허리를 구부리며 황제를 향해 아뢰었다.

“황상, 사천감 언 대인과 국사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자 어좌에 앉은 양성이 말했다.

“어서 들라 하라!”

“예!”

태감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언상과 두장생이 함께 어서방으로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윤재성과 윤청을 비롯해 몇몇 주요 문무 대신들이 자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소신 언상, 폐하를 뵙습니다!”

언상은 황제에게 다른 신하들이 하듯 예를 올렸으나, 두장생은 국사로서의 신분과 그간의 공로가 있어, 가볍게 “폐하.”라고 말하는 것이 다였다.

양성이 윤청을 향해 눈짓을 보내자, 윤청이 즉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황제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언 대인, 그리고 두 국사, 오늘 아침 일찍 제주에서 보내온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전보에 따르면, 조월국에서는 현재 계속해서 병력을 늘리고 있고, 군영에 조월국에서 책봉한 대천사(大天師)나 대제사(大祭祀: 제사장) 같은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양군이 교전할 때 요법(*妖法: 요괴가 부리는 술법)이나 각종 기이한 술법으로 공격을 해와, 놀라고 두려워하는 이들이 꽤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우리 군영에도 강호의 협객이나 기이한 능력을 지닌 자가 돕고 있고, 병사들이 용맹함을 잃지 않아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태라 합니다.”

“음? 요법과 기이한 술법이라?”

두장생은 이런 일에 무척 민감했으므로, 이렇게 중얼거리다 양성을 향해 예를 올리며 물었다.

“폐하, 변경에서 보낸 전보를 제가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황제가 옆에 서 있던 한 중년의 태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태감은 어안(御案) 위의 전보를 두장생에게 건넸다. 두장생은 곧장 그 내용을 한번 쭉 읽어보더니, 검지에서 피를 한 방울 짜내어 뿌리며 전방의 상황을 점쳐 보았다.

“국사, 결과가 어떻소?”

황제가 이렇게 묻자 두장생은 먼저 주위의 문무 대신을 한번 둘러보았다. 항상 그를 업신여기던 대신들이 기대 섞인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는 걸 보니 무척 흡족했다. 그는 다시 황제에게 고개를 돌린 뒤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보아하니, 수행자들이 정말로 개입했고 게다가 이들은 조월국과 긴밀하게 얽혀있기까지 합니다. 조월국의 책봉을 받았으면 조월국 조정의 신하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대정국과의 전쟁을 통해 속세의 분쟁에 뛰어든 것인데 이는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치대로라면 조월국은 국내에 온갖 이매망량이 날뛰고 요사한 것들이 사직에 갖가지 화를 끼치고 있을 텐데, 어찌 이들이 갑자기 조월국을 도와 대정국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이는 조월국이라는 구멍 뚫린 배에 자신 몸을 묶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그들은 조월국이 정말로 이길 것이라고 여기는 걸까요?”

두장생은 이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졌다. 수행자들이 진정으로 조국에 충성심을 가지고 전쟁에 뛰어드는 일은 대정국에서도 보기 드문데, 하물며 조월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윤청은 언상을 한번 보고는 다시 두장생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국사께서는 선도(仙道)에 몸담은 분이시니, 혹 무슨 좋은 계책이라도 있으십니까?”

“좋은 계책이라? 두모(某)는 일개 수행자일 뿐이라, 그저 전선에 나가 우리 대군을 돕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좋은 계책은 윤 공과 윤 대인, 그리고 다른 대인과 장군들께 맡기겠습니다.”

그러자 양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좋소! 국사의 말을 들으니 고(*孤: 임금이나 제후가 자신을 겸손히 일컫던 말)도 무척 안심되는구려!”

두장생이 윤재성을 구하던 날, 커다란 진법을 벌여 하늘의 별과 연결되던 광경을 양성은 친히 목격했었다. 그래서 두장생이 그때는 그저 법력을 빌렸을 뿐이라며 재차 강조했어도, 그는 두장생의 능력을 무척 신임하고 있었다. 사실 오늘 두장생을 들라 한 것도, 그의 의견을 묻는 것 외에도 그가 내심 이런 말을 해주기를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직 자신이 그런 암시를 주기도 전에, 먼저 나서서 전방으로 가겠다 하니 양성으로서는 흡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언상도 나서 입을 열었다.

“폐하, 노신(老臣)이 최근 별을 관측해보니, 이 전쟁은 지금 아주 중요한 때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백성들의 노동력이나 재물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있는 힘을 다해 전선의 상황을 지원해야 마땅합니다.”

“병졸, 갑옷, 무기, 수레와 말, 양식과 건초 등은 이 윤모가 여러 동료와 함께 차질 없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군도 계속해서 모집하고 있으며, 훈련이 끝나는 대로 전방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대정국이 그간 쌓아온 국력은 결코 단번에 무너뜨릴 만한 게 아니니, 언 대인께서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윤청의 이 말에는 자신감이 가득해, 자리한 모든 이들이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 윤재성은 황제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이였는데, 이때 그는 어안 옆에 앉아 수염을 쓰다듬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문무 대신들이 한 마음으로 서로 협력하고, 민간과 조정의 모든 이가 한마음 한뜻이 된 것이 무척 흐뭇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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