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0화. 사불압정(邪不壓正)
두장생은 윤재성을 흘끗 보더니 돌연 이렇게 입을 열었다.
“실은…….”
하지만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망설였다.
“국사,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편히 해도 무방하오.”
“아, 그것이, 나라 안의 재사(*才士: 재능 있는 사람)들을 모집할 수 있도록 폐하께서 방을 하나 내걸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의사(義士)들이 전방으로 향하고 있으니…….”
“국사의 말이 옳소. 이 일은 이 대인이 책임지고 감독하시오!”
“예!”
황제가 이렇게 명을 내리자, 한 중년의 신하가 즉시 양손을 맞잡으며 명을 받들었다. 양성이 제위에 오른 뒤, 원덕제 시기까지 조정에서 일하던 삼조(三朝)를 모신 노신들은 거의 나이를 이유로 퇴직하거나 이미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다.
두장생의 이 제안은 사실 양성도 이미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그는 두장생의 국사로서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일부러 이렇게 명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양성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두장생이 원래 말하려던 것은, 윤재성이 친히 전방에 가기만 하면 이 전쟁은 이미 반쯤 이긴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이었다.
* * *
한편, 사천감 권종실 안에서는 계연이 한 손으로는 죽간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백옥 천두호를 들고서 바닥에 앉아 천천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꿀꺽- 꿀꺽-!
한 쌍의 회백색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눈앞의 사물도 흐릿하게 보였으나 그의 마음의 눈은 천산만수(*千山萬水: 수없이 많은 산과 강)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누군가 내 다음 수를 읽었고, 이젠 맞서려고까지 하는군?”
* * *
오늘 어서방에서 열렸던 작은 회의는 간단한 의논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서둘러 처리해야 하는 일은 이미 모두 결정된 참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자리에서 확정된 몇 가지 일들이 있었다. 먼저, 병사들을 모집하고 훈련을 시키는 규모를 더욱 늘리는 것이었다. 또한 각 주(州), 특히 병주에서 충분한 양의 양식과 건초를 마련하여 후방의 보급을 지원하도록 했으며, 합리적인 가격으로 각지의 대장간과 장인들을 징용하여 화살과 무기, 갑옷 등을 제조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조정에 몸담은 기인(奇人)들은 국사인 두장생을 따라 서둘러 전방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최근 훈련을 마친 5만 명의 대군과 합류해 제림관으로 향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사항은 다음 날 조회에서 좀 더 논의해야 했고, 모든 것이 정해지면 다시 정식으로 천하에 알릴 것이다.
약 두 시진(4시간) 뒤, 언상과 두장생은 황궁에서 나와 곧장 사천감으로 향하여, 다시 거대한 권종실 안으로 들어갔다. 계연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앉아 기록을 읽으며, 손가락 끝으로 글자를 만져 그 뜻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떠나기 전과 아무런 변화도 없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이르자 계연이 고개를 들었다.
“두 분 돌아오셨군요?”
그러자 언상과 두장생이 그를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예를 취한 뒤, 서로 한번 눈짓을 교환하더니 언상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계 선생님, 북방의 전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전보에 따르면, 조월국 군영에 사이한 술법을 쓰는 이들이 많이 합류했다고 합니다. 그들 모두가 조월국 조정이 책봉한 천사(天師)나 제사장이며, 정식 관직과 녹봉도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사이한 술법으로 우리 병사들과 백성들을 공격한다더군요.”
두장생이 고개를 끄덕인 뒤 이렇게 덧붙였다.
“이는 언 대인의 말씀처럼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소위 천사나 제사장이라는 부류에는 제대로 된 수행자나 살풀이 법사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요사한 술법을 쓰는 자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들이 자원해서 조월국 조정을 따른다는 것이 믿기 힘들긴 하나, 사실이 이렇습니다.”
그러자 계연은 들고 있던 죽간을 옆에 내려놓은 뒤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월국에 요사한 존재들이 들끓는 상황이 조금 완화되긴 했으나, 이는 조월국의 기운과는 관계가 없어요. 그런데 돌연 조월국 송씨 황조가 강세로 전환해, 군사를 남쪽으로 보내어 대정국을 공격하고 비범한 무리가 이를 돕기까지 하니…… 이 일은 제가 생각해도 무언가 꺼림칙한 데가 있어요.”
두장생이 그 말에 떠보듯 물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그러자 계연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도(邪道)를 닦는 이든 홀로 수행을 닦는 호협(豪俠)이든, 혹은 조월국에 오래 살던 자든 그 주변에 살던 자든, 조월국 조정의 관직에 책봉되어 녹봉을 받으며, 대군을 따라 출정하기까지 했으니 그들은 이제 조월국의 속세와 단단히 묶여버린 거예요. 그렇게 대정국 속세와의 분쟁에도 뛰어든 것이죠.”
계연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으나 그의 말이 뜻하는 바는 무척 심오했다. 사람이든 요사한 존재이든, 그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조월국의 국토에서 살아온 이들이었다. 그리고 마치 나라가 징병할 때 백성들이 이에 호응하듯, 분분히 조월국 조정에 몸담은 것이다. 이는 윤리적인 일이기도 했으니 계연으로서도 별 트집을 잡을 수 없었다.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계연은 다시 두장생과 언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국사도 분명 출정하시겠지요? 언제 가시죠?”
그는 아직 출정하려 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두장생이든 언상이든 계연이 이 일을 알고 있다는 것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두장생이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실은 서둘러 떠나야 해서 이미 제자들에게 인원을 소집하고 말을 준비해 놓으라고 한 상태입니다. 내일 조회에서 정식으로 명을 내리길 기다리지 않고,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이제 좀 국사의 태가 나네요.”
계연이 이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장생은 내심 기뻤으나, 겉으로는 엄숙한 표정을 유지한 채 진심을 듬뿍 담은 어조로 말했다.
“군주의 녹봉을 먹으니 충군(*忠君: 임금에게 충성을 다함)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저 책임을 다할 뿐입니다!”
“옳은 말씀이에요. 이번에 가시면 부디 조심하셔야 해요. 상대편 군영에 대단한 요괴들은 없으나, 이건 대정국과 조월국의 국운을 건 싸움이고,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지게 될 테니 말이에요. 이 국면은 여기서 더 잠잠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커지기만 할 거예요.”
“예, 반드시 신중하게 움직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대정국에서도 더욱 많은 수행자가 군영에 합류할 겁니다.”
그 외에 어서방에서 있었던 논의에 대해 계연에게 굳이 세세하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언상과 두장생은 더는 계연과 한가롭게 앉아 별자리와 기타 학문에 관해 토론할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계연에게 인사한 뒤 총총히 떠나갔다.
계연은 홀로 권종실 안에 서 있다가, 허리를 숙여 발치에 쌓인 죽간들을 들어 올려 멀지 않은 책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뒤 한번 손짓하자, 다른 쪽 책장에 있던 십여 권의 죽간들이 천천히 공중에 떠올라 계연의 곁으로 내려앉았다.
이런 죽간과 고서(古書)들이 한 권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몇 권, 심지어 십여 권을 합쳐야 현재 일반적으로 보이는 서책 한 권의 내용이 되었다. 그러니 권종실이 이렇게 넓은 것은 이런 죽간이나 희귀한 기록들이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계연은 다시 자리에 앉아 죽간 하나를 집어 든 뒤 천천히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전방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변수는 분명 있을 것이다. 심지어 계연은 이 안에 숨겨진 심상치 않은 음모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대국을 예측하고 세심히 고민한 뒤 바둑돌을 깐 지가 무척 오래되었다. 그것이 수십 년이 지나 이제 꽃이 피고 그 결실을 보려 하니, 계연은 이번 대국에서 자신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믿어보고 싶었다.
그는 수많은 반례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지만, 자신의 믿음과 일종의 ‘낭만’을 한번 관철해 보고 싶었다. 소위 사불압정(*邪不壓正: 사악한 것은 정의를 이길 수 없다는 뜻)이라는 낭만 말이다.
* * *
그날 오후, 두장생은 50여 명의 일행을 이끌고 말을 달려 도성을 떠났다. 그들은 제주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대군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다음 날 조회가 끝나자, 장을 보러 나온 백성들과 장사하러 나온 상인들로 북적이는 경기부 동서남북 네 곳의 성문을 향해 기수들이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며 다가왔다.
“비키시오, 비키시오! 공무를 따르는 중이니 어서 길을 비키시오! 이랴, 이랴!”
다다다다…… 다다다……!
“앞에 어서 비키시오! 여기 영패가 있소, 황명을 받아 도성을 떠나는 중이오!”
기수 중 우두머리가 성문 근처에 이르자 그 앞을 지키던 시위가 그들을 막아서려 했다. 그러자 기수는 속도를 살짝 줄여 도금한 영패를 높이 꺼내 들었다.
“어서 통과시켜라!”
수문장은 기수가 입은 옷과 그 영패를 알아보고는 수하들을 이끌어 양쪽으로 길을 터주며, 창을 가로로 들어 행인들을 막아섰다.
기수들은 채찍을 내리치며 더욱 속도를 높여 도성을 빠져나갔다. 성문을 지키던 시위들과 백성들은 그들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의견이 분분했다.
“어이, 또 무슨 큰일이 난 건 아니겠지?”
“또 무슨 큰일이 있겠나. 분명 북방의 전황과 관련된 것이겠지.”
“그건 모르지! 조월국 도적 떼들이 감히 우리 대정국의 적수가 되겠나? 가당치도 않지.”
“자, 자, 물러나시오! 성문 근처에 서 있지 마시오!”
…….
백성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기수들은 대부분 5인이 한 조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네 곳의 성문으로 빠져나온 뒤, 각자 소식을 전할 도시를 향해 달려갔다.
뒤이어 성안에는 연이어 새로운 방이 나붙었는데, 이는 백성들 사이에서 전황에 관련된 새로운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경기부와 맞닿은 통주의 장락부 부성에서는 한때 노염생이 구걸하던 그 거리에 다시 관차(*官差: 관아에서 파견하던 아전)가 방문(榜文)과 찹쌀풀이 든 통을 들고 나타났다.
“비켜라, 비켜! 구걸은 다른 데 가서 하거라!”
“예, 예!”
담벼락 아래에 앉아있던 거지들이 얼른 이가 빠진 그릇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눈썹을 잔뜩 찌푸린 어느 관차는 연신 굽신대는 거지들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손발 멀쩡하고, 나이 들어 움직일 수 없는 것도 아니면서 어찌 일을 찾아다니지 않고 여기서 남들의 적선에 기대 사는 것이냐?”
거지들은 당연히 그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주위로 흩어졌다.
“흥, 저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느니 종군을 하는 게 백배는 낫겠다! 됐소, 이제 방을 붙이도록 하지.”
관차들은 벽에 찹쌀풀을 바르고 그 위에 명주를 덧댄 황방(*皇榜: 국가의 큰일을 게시하는 공고문)을 붙였다. 황방이 나붙지 않은 지는 이미 몇 년이나 된 일이었다. 심지어 조월국에서 침략했을 때도 황방이 붙지는 않았었다.
“어, 저쪽에 황방을 붙이고 있는데?”
“뭐라고?”
“정말이군!”
“어서 가세, 무슨 일인지 봐야지!”
“기다리게, 나도 같이 가겠네…….”
관차들이 황방을 붙인 바로 그 순간, 길을 지나던 백성들이며 주위의 주루와 찻집에서 보내온 점소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때, 하얀 옷을 입은 청수(淸秀)한 용모의 여자아이들이 대바구니를 들고 길을 지나다가 이를 보고는 황방 앞으로 다가갔다. 마침 어느 유생이 방문의 내용을 읽어주고 있었다.
“천하의 모든 재자(才子)와 기인에게 알리노라. 조월국 적군이 우리 조정의 변경을 침략하여, 우리 조정에서도 병사들을 보내어 그들을 상대하고 있지만, 사악한 무리와 온갖 요괴가 적군을 도우며 지나는 곳마다 우리 대정국 백성의 목숨을 앗고 있노라…….”
유생이 방문의 내용을 모두 읽자, 두 여자아이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얼른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