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1화. 대정국의 병사들
성안 장수방(長繡坊)의 어느 조용한 저택에서는 아름답게 차려입은 수려한 외모의 여인이 뜰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한쪽에 놓인 작은 탁자 위에는 과자(*瓜子: 해바라기씨, 호박씨 등을 소금이나 향료를 넣어 볶은 것)와 다과가 차려졌고, 꽃봉오리를 우려낸 향긋한 차가 놓여 있었다. 그녀가 입은 넉넉한 품의 하얀 옷은 그녀의 놀랄 만치 아름다운 자태를 가리고 있었다. 이는 바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백약이었다.
바로 그때, 조금 전 황방 앞에 서 있던 열여섯 정도 된 여자아이 둘이 다급히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인!”
“부인, 큰일 났어요!”
“무슨 큰일인데 그러니, 천천히 말하거라.”
여인은 고개도 들지 않고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자 두 아이는 가까이 다가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을 자세히 고했다.
“부인, 조월국 군중에 요사한 술법을 부리는 이들이 있대요. 게다가 계속해서 병력을 늘리고 있어서 사람들 말대로 시간이 길어지면 스스로 자멸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대요. 그래서 우리 군사들이 그들을 상대하기가 힘에 부쳐, 조정에서 황방을 내걸어 재자와 기인들의 도움을 요청했어요. 듣자 하니 이 나라 국사는 이미 밤에 전방으로 떠났대요.”
“뭐?”
백약이 살짝 미간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들어 두 아이를 향해 물었다.
“두장생도 떠났다고?”
“네!”
그러자 백약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책을 쥔 왼손으로 뒷짐을 진 채, 오른손으로 과자를 한 움큼 집어 바닥에 뿌렸다.
촤악-!
그것들이 바닥에 알알이 흩어진 모습은 아무런 특별한 형태도 없어 보였으나, 백약은 이를 토대로 무언가를 점치고 있었다. 그러다 백약은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황방을 읽어보거라.”
“네!”
두 아이는 기억력이 무척 뛰어났으므로, 한번 들은 내용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그대로 말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황방의 내용을 그대로 고하자, 백약의 움직이던 손가락은 멈추었으나 그녀의 두 눈에는 머뭇거리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선생께서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알 수 없는데, 변경이 이리 급박한 상황이라니……. 만약 선생께서 돌아오셨는데 대정국이 이미 무너진 상태라면……. 두장생이 선생께 약간의 가르침을 얻긴 했으나, 도행은 아직 한참 부족하지. 설령 윤 공께서 친히 전선에 나간다 해도 성을 지킬 때나 도움이 될 뿐, 공격에는 별 힘이 없어…….”
대정국에도 나름대로 도움이 될 만한 실력을 지닌 수행자들이 있다는 걸 백약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총 몇이나 되는지, 그중 제대로 된 이가 몇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정국의 신도(神道)는 조월국을 능히 상대할 만한 힘을 지녔지만, 그들은 나름의 규칙이 있어 속세의 분쟁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설령 돕는다고 해도,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그리 큰 힘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백약은 생각을 거듭하더니 곧 두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이렇게 오래 살았으니, 이 정도면 우리도 대정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자, 우리도 제주로 가자꾸나!”
두 아이는 무척 기뻤으나 흥분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제하며 대답했다.
“예, 부인!”
그러나 백약은 도성에 들어 황제를 알현하고 책봉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이 일로 인해 필연적으로 속세의 분쟁에 발을 들이게 된다 해도, 대정국의 기운과 얽히지만 않으면 그녀는 자신의 수행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 있었다. 나라의 책봉을 받지 않았으니, 그녀가 속세의 분쟁에 끼어드는 것에는 내놓을 만한 명분도 없을 테고 조월국 신도(神道)의 누군가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녀를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별로 두렵지 않았다. 게다가 전투는 대부분 대정의 국토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설령 후에 조월국으로 쳐들어간다 해도, 그때는 그곳의 신도가 이미 무너져내린 후일 것이다.
백약과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은 사실 적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보다 훨씬 행동이 빠른 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녀와 달리 조정의 책봉을 받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도성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고, 현지 관아에만 보고한 뒤 통행증을 받아 곧장 북쪽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다.
* * *
“이랴! 이랴……!”
“이랴! 여러분, 해가 지기 전에 이 산을 넘어야 하오!”
“알겠소!”
“동의하오!”
황혼이 지는 제주 남쪽의 한 산길 위에는 3, 40명의 사람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무기를 몸에 지니고 있었고, 옷차림도 각기 달랐다. 그래서 그리 단합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하나같이 느껴지는 기운이 평온했다.
마침내 그들은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산자락에서 몇 리 정도 떨어진 관도(官道) 근처에 자리 잡고 야영을 하기로 했다. 야영이라 해봐야 그저 적당한 위치에 말을 묶고 모닥불을 피우는 것이 다였다.
때는 아직 한겨울이라 쉼 없이 길을 달려왔던 무인들은 이미 몸이 꽁꽁 얼어있었다. 그러다 모닥불을 곁에 앉아 온기를 쬐자 그들은 마침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차가운 몸과 달리 마음만은 뜨거웠던 이들은 다시 한번 서로를 다독였다.
“제주 경계 안으로 들어왔으니, 이제는 대정국 군영이 자리한 요충지에서도 그리 멀지 않소. 곧 조월국 놈들과 맞서 싸우게 될 테니, 그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면 모두 푹 쉬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오!”
“옳소. 조월국 놈들도 정면으로 맞붙으면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지금 어떻게든 사도(邪道)를 닦는 이들을 끌어들이고 있지 않소? 우리 대정국에는 쓸만한 사람이 없는 줄 아는 거요, 뭐요? 그놈들에게 내 이 대도(大刀)가 얼마나 날카로운지 보여줄 것이오!”
남자는 이렇게 상대의 말을 받으며 칼을 반쯤 뽑아 들었다. 그러자 모닥불의 불빛이 칼날 위에 반사되며 날카로운 빛을 뿜었다.
“점점 더 많은 강호의 의사(義士)들이 전방으로 모여들고 있소. 우리처럼 무예를 지닌 이들이 마땅히 나서서 정의를 바로 잡아야 하오! 제주 지역 안의 많은 백성이 이미 조월국 놈들에 의해 해를 입었소. 이제는 도둑놈들이 제주를 제집처럼 돌아다닌다고 하니, 제림관을 넘기만 하면 만나는 즉시 죽여버립시다!”
“옳소!”
“그럽시다!”
* * *
무인들이 열띤 대화를 나누던 중, 먼 곳에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들은 비록 군중의 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무예를 닦은 만큼 시각이나 청각이 무척 민감했다. 이에 야영지가 단번에 고요해졌다.
그중 누군가가 경공을 이용해 근처의 나무 위로 가볍게 뛰어오르자, 멀리서 말을 탄 기병들이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아직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진 않았기 때문에, 그는 기병들이 갑옷을 차려입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일행 여러분, 여기로 병사들이 오고 있는데, 보아하니 대정국의 병사들인 듯하오!”
나무 위의 남자가 이렇게 말하자, 아래에 있던 이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그들은 무기를 몸에 지닌 채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병사들을 피해 숨으려고 들지는 않았다.
잠시 후, 기병들이 말을 달려와 그들 가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군관이 손을 들어 올리자, 기병들이 천천히 속도를 늦췄다. 그들은 이 강호의 무인들에게서 약 서른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는데, 이는 서로의 안전거리인 동시에 화살이 닿을 만한 거리이기도 했다.
기병들의 우두머리가 장창을 들어 전방의 무인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우리는 대정 정북군의 순찰대다. 너희는 어디서 온 자들이냐? 어서 신분을 대라!”
그가 이렇게 묻는 동안, 수십의 기병들은 말 등 위에서 화살을 활에 매긴 뒤 무인들을 조준하고 있었다.
그러자 무인 중 하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정중히 포권하며 대답했다.
“저희는 대정의 무림인들입니다. 그러나 나라가 위급한 것을 보고 조월국 놈들을 죽이고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왔습니다.”
“통행증이 있는가?”
“예, 한번 보십시오!”
무인들을 대표해 나선 사내가 품속에서 수첩과 비슷하게 생긴 통행증을 꺼내어 앞으로 몇 발짝 걸어가 군관에게 건넸다. 군관이 그 수첩을 펼쳐 보니, 이곳에 오기까지 거친 모든 관문의 도장과 날인이 찍혀 있었다. 그가 통행증을 확인한 후, 무인들을 한번 훑어보니 소박한 옷을 걸친 이도 있고 때깔 좋은 옷감을 걸친 이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옷차림이 깔끔했고 핏자국도 묻어 있지 않았다.
군관은 눈초리를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돌연 이렇게 물었다.
“당신들은 모두 의주 사람이오? 막 북방에 왔을 텐데, 혹시 의주에서 유명한 화룡단자고(*花龍團子糕: 굴피나무 열매로 속을 채운 동그란 떡)를 조금 갖고 있소? 먹은 지 오래되어 무척 먹고 싶군.”
그러자 통행증을 건넨 무인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가 입을 떼기 전, 뒤쪽에 있던 무인 중 누군가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화룡단자고? 의주에서 유명하다고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나으리, 어느 다른 지방의 음식과 헷갈리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자 군관이 씩 웃더니 손에 든 창을 거둬들였다.
“내가 지어낸 말이오, 당연히 들어본 적이 없겠지.”
그러자 무인은 그제야 깨달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의 질문을 받아 말을 이었다.
“저희 모두가 의주 사람은 아닙니다. 병주에서 온 이들도 있으나, 통행증을 의주에서 받았을 뿐입니다. 저기 저분이 바로 병주의 총 포두이자 음양신포로 유명한 왕극, 왕 포두 이십니다!”
그러자 군관이 고개를 들어 모닥불 근처에 서서 그리 눈에 띄지 않는 갈색 장삼을 입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왕극이 그를 향해 살짝 양손을 잡고 인사했다. 군관도 관아의 포두가 이곳에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는 ‘음양신포’라는 별명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이것도 분명 허풍이 잔뜩 섞인 강호의 칭호와 비슷할 것이라 여겼다.
군관은 그렇게 생각하며 왕극을 향해 마찬가지로 예를 취한 뒤, 통행증 수첩을 조금 전의 무인에게 돌려주며 그들을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나라를 돕기 위해 여러 의사(義士)께서 이리 와주시니 참으로 감사하오. 이곳은 전선이다 보니 경계를 내려놓을 수가 없었소. 조금 전 내가 실례를 범했다면 부디 넓게 헤아려 주시길 바라오.”
“당치 않습니다, 나리. 저희도 책무의 무거움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도 강호의 무인인 만큼, 경계심을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무인들은 이 기병들에 대해 아무런 악감정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갑옷에 남은 전투의 흔적이나 오래된 핏자국을 보며, 강호의 무인들은 이들이 전장을 겪은 진정한 병사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음, 그럼 여러분께 당부 한 마디만 남기겠소. 이 근방은 썩 안전한 곳이 못 되오. 게다가 저들 중에는 괴이한 자들이 섞여 있어, 삿된 술법에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오. 여기서 동북쪽으로 쭉 가면 바로 우리 군의 진영이 있긴 하지만, 주위의 샛길로 남몰래 관문을 넘나들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소! 그럼, 임무를 수행해야 하니 우리는 이만 가보겠소!”
“조심히 가십시오,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후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나무 뒤쪽이나 위에 몸을 숨겼던 무인들이 모두 나와, 약 50명 정도의 기병들을 향해 포권했다. 우두머리 군관만이 말 등 위에서 그들을 향해 약식으로 예를 취한 뒤, “출발!”하고 소리치며 기병들을 이끌고 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