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화. 전방의 불운한 자들
기병들이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까지 멀어지자, 그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용맹하고 사나운 병사들이로군, 저들만 봐도 우리나라가 질 리가 없소!”
“맞소, 저런 군대가 있으니 반드시 조월국을 꺾을 수 있을 것이오!”
그들이 이렇게 감탄을 늘어놓고 있을 때, 통행증을 손에 든 무인이 내내 입을 열지 않던 왕극에게 다가와 물었다.
“왕 신포, 우리도 군영으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물론 갈 것이오. 하지만 조금 전 군관의 말도 있으니, 밤에도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합시다. 오늘 밤에는 야경을 서는 인원을 늘리는 것이 좋겠소.”
왕극은 이렇게 말하며 기병들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때 그의 시야에는 말들이 일으킨 뿌연 흙먼지만이 보일 뿐이었다.
“둘째 사부님, 왜 계속 그 병사들을 보고 계세요?”
이렇게 물은 이는 왕극의 옆에 서 있던 소년이었다. 키가 쭉 뻗고 단단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얼굴에서는 약간의 앳된 티가 났다. 그는 바로 14살이 된 좌무극이었다.
왕극은 좌무극을 향해 탄식하며 말했다.
“선인(仙人)이 주신 이 도장을 오래 몸에 지니며, 음양 양쪽의 일을 심사하고 판결하다 보니 점차 새로운 능력이 생기더구나. 나는 때로 누군가의 죽음이 가까워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사부님의 말씀은…… 저 병사들이?”
“그래, 하지만 세상일에 절대적인 것은 없으므로 나도 뭐라 말하기가 힘들더구나. 정북군의 병사들이라면 원래가 위험한 상황에 몸담은 이들이고, 설령 우리라고 해도 몸에 항시 죽음의 기운을 지니고 있지. 이만 자자.”
* * *
밤이 되자, 저 멀리 황야에서 희미한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자 깊이 잠들었던 왕극이 돌연 눈을 뜨더니, 미간을 찡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곁에 누운 좌무극을 팔꿈치로 깨우자, 좌무극도 단번에 눈을 뜨더니 낮은 소리로 물었다.
“사부님?”
“쉬이……. 자는 이들을 모두 깨워라. 소리를 내서 안 된다.”
좌무극은 그제야 야경을 서던 이들마저 모두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런 강호의 무인들이 교대 시간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곧이어 모든 이들이 잠에서 깼다. 누군가가 잠에서 깨면 그들을 깨운 동료가 곧장 소리를 내지 말라고 주의시켰다.
“여러분, 모두 무기를 꺼내 주시오.”
한 자리에 모여든 무인들이 칼과 검 등을 꺼내자, 왕극이 품 안에서 작고 정교한 도장을 꺼내 그들의 무기 위에 가볍게 찍었다. 그러자 그 위로 ‘옥(*獄: 감옥, 혹은 죄의 유무를 조사하여 처단하는 일을 뜻함)’ 자가 은은하게 빛났다.
“여러분, 곧 사악한 무언가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우리는 자는 척을 해야 하니,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호흡을 규칙적으로 조절하십시오. 그러다 공격을 해야 할 때가 되면, 결코 주저해선 안 됩니다.”
“알겠소!”
“예!”
“왕 신포의 말대로 따르지요!”
그들도 살짝 긴장되긴 했으나, 어쨌거나 강호를 오래 구른 이들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불안을 억누르고 잠든 척 자리에 누웠다. 그들은 호흡과 맥박을 조절하여 자신이 깊이 잠든 것처럼 보이게 했다.
약 반각(7~8분)이 지나자, 스무 명이 넘는 이들이 소리 없이 멀리 황야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엄청난 속도로 왕극의 일행이 잠을 자는 야영지로 다가왔다.
“호오, 여기도 단명할 놈들이 있군. 주(周) 대사(大師)의 갑수풍(*瞌睡風: 상대를 재우는 바람)은 과연 대단하다니까. 오늘 밤에는 왼쪽 귀 백 개를 채울 수 있겠어.”
그들은 수십 명의 무인이 불씨가 남은 모닥불 옆에서 깊이 잠든 모습을 보고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대정국 안쪽에서 온 무인들인가? 잘됐군, 이자들은 필시 기름기가 병사들보다 많을 거야!”
“하하, 그렇겠지! 자,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먼저 이놈들 머리를 베자고.”
스물이 넘는 이들이 야영지로 다가와 천천히 곡도(*彎刀: 칼날이 휜 칼)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각자 목표 대상의 목을 조준해 칼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들이 막 곡도를 내리치려는 순간, 눈앞이 검광(劍光)으로 밝게 물들었다.
챙! 챙! 챙!
푹! 푸욱! 스윽! 푹!
야영지의 흙바닥에 피가 튀더니 왕극을 비롯한 무인들이 반격을 시작했다. 상대가 방심한 틈을 노려 무인들은 이미 여럿을 처리했고, 곧이어 남은 이들을 향해 검광이 몰아쳤다. 좌무극도 편평한 장대를 들고서 크게 휘두르며, 상대의 사타구니를 때리고 다시 다른 이의 목을 찔렀다.
잠시 후, 미처 반격을 대비하지 못했던 데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침입자들은 모두 무인들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몸에 지녔던 자루들에는 피가 묻은 사람의 귀가 잔뜩 담겨 있었다.
약 반시진(1시간) 뒤, 왕극을 따라 움직이던 무인들은 곧 다른 야영지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대정국 병사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는데, 낮에 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군관의 시체도 있었다. 그들 모두는 왼쪽 귀가 없었다.
임시로 지은 야영지라 작은 막사를 몇 개 세운 것이 다였고, 병사들은 대부분 갑옷을 갖춰 입은 채였다. 보아하니 모두 자는 도중에 목숨을 잃은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들 모두 백전을 거친 병사들이니만큼, 비록 군영에서 배운 무공이 조잡하다고는 해도 한번 맞서 싸울 여력조차 없진 않았으리라.
좌무극은 나이가 아직 어렸지만, 본래도 성격이 굳센 데다 최근 몇 년 동안 강도 높은 단련을 이어온 덕분에 일반적인 강호의 협객들보다 경험이 풍부했다. 그래서 그는 시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조사를 하면서도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잠시 후, 왕극을 비롯한 무인들이 다시 한곳에 모였다.
“살아있는 이는 없소, 모두 죽었군.”
“저쪽도 마찬가지요.”
“모두 왼쪽 귀가 잘려 나갔소.”
무인들의 얼굴은 모두 좋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을 공격하려던 이들을 모두 죽인 후였지만, 그런데도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후우,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의 용맹한 병사들인데, 전장이 아니라 이렇게 비열한 사술(邪術) 때문에 목숨을 잃다니!”
“조월국 놈들은 정말 가증스러운 놈들이오!”
왕극이 밤하늘을 둘러보니, 오늘 밤에는 하늘에 옅은 구름이 끼어 있었다. 비록 별빛이 조금 비치긴 했으나, 그래도 주위가 밝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여러분, 모두 조심하는 게 좋겠소. 우리가 그놈들을 모두 죽이긴 했으나, 이 사술을 건 자가 그중에 없었을지도 모르니, 아직 완전히 위험에서 벗어난 건 아니오.”
왕극이 말을 마치는 동시에, 품에 있던 도장이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었던 왕극은 사악한 존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삿된 것이 접근하고 있소! 몸을 숨기시오!”
그러자 3, 40명의 무인은 모두 놀라 야영지의 막사 안이나 시체 아래에 몸을 숨기거나, 근처의 나무 위로 올라가거나, 수풀 아래에 납작 엎드리기도 했다. 그러고는 모두 자신의 심박수와 호흡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휘이이…… 휘이이……!
뒤이어 광풍이 불기 시작하더니 지면의 흙먼지가 들고 일어났다. 몸을 숨긴 무인 중 하나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지만, 흙먼지 때문에 눈조차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곧 뼈를 에는 듯한 한기가 불어닥치자, 그들은 몸이 느끼는 추위보다도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모두 진정으로 삿된 무언가가 다가온다는 것을 느끼고 잔뜩 경계를 세운 채 긴장하고 있었다. 각자 손에 든 ‘옥(獄)’ 자가 찍힌 무기에서는 가벼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 열기는 팔을 따라 올라가 온몸으로 퍼졌고, 무인들은 미약하긴 하나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정신적인 위로를 받았다.
발걸음 소리도, 말발굽 소리도, 심지어는 바람에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지만, 어느새 누군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갑수풍을 이겨 내고 사사(*死士: 죽음을 각오한 군사)들을 전부 죽이길래, 대정국의 어느 대단한 인물이 나섰나 했더니, 고작해야 평범한 인간들이었을 줄이야.”
“그러게, 정말 실망이군. 매일같이 군졸들이나 무인, 일반 백성들만 죽이다가 오늘 드디어 대정국의 고인(高人)과 한번 붙어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고작해야 이런 개미 새끼들이라니!”
그들의 대화가 들려오자 자신들이 들켰다는 것을 알아차린 무인들이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어두운 밤인 데다 흙먼지 섞인 바람마저 불어오자, 상대가 어디 있는지조차 파악할 수가 없었다.
“으아아……!”
그때, 인근 저지대에 숨어 있던 무인이 광풍에 의해 두둥실 떠올랐다. 그는 공중에 대고 마구 칼을 휘둘렀으나 아무것도 찌를 수가 없었다.
푹! 푸욱……!
선혈이 공중에서 폭발하며, 주위에 불어닥치는 광풍에 의해 곳곳으로 튀었다. 왕극 등 적지 않은 무인들의 옷과 얼굴에 동료의 피가 튀었다.
“아악……! 내려줘, 내려줘……!”
“왕 신포! 구해 주시오……!”
인근 수풀에 다시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치자 누군가의 선혈이 주위로 낭자했다.
좌무극은 왕극의 옆에 바짝 엎드린 채, 공포와 그보다 더 큰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는 손에 닿는 잡초를 꼭 쥐고서, 오른손으로는 편장(*鞭杖: 납작한 장대)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잔뜩 긴장한 온몸의 푸른 핏줄이 솟아올라 있었다.
왕극은 좌무극을 진정시키려고 한 손으로 좌무극을 꾹 눌렀다. 그는 상대가 근처에 있지도 않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지금은 나서봤자 어차피 공격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들이 이쪽을 낮잡아 보고 가까이 다가올 때를 노려야 했다.
“요괴 놈아, 내가 상대해주마!”
“죽어라, 이놈!”
챙-, 챙-, 챙-!
나무 위에 몸을 숨긴 무인 세 명이 동시에 뛰어내리더니, 무기를 뽑아 모래바람 어딘가를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아무리 휘둘러도 칼끝에 느껴지는 것은 없었고, 오히려 그들은 제 몸이 찢겨나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렇게 그들은 고통에 찬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보통 상대가 아니야, 어쩌면 여기서 죽겠구나!’
이 순간, 모든 무인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왕극마저 이와 비슷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상대는 술법을 좀 부리는 강호의 술사 정도가 아니었고, 일반적인 귀신(鬼物)이나 요괴가 아닌 진정한 수행자였다.
품 안의 도장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 열기는 왕극을 다치게 하지는 못했고, 그저 온몸을 따뜻하게 데우는 동시에 시야를 또렷하게 만들어주었다. 약 백 보 밖에서 네 명의 ‘사람’이 조금씩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무인들은 차례로 공중으로 떠오르다 바람에 의해 목이 졸려 죽었다. 그들은 마치 무인들이 죽기 전 벗어나려고 발악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 듯했다.
‘좀 더 가까이, 조금만 더 가까이!’
“하하하하, 이놈들은 몸에 무슨 부적도 없네. 이렇게 죽이기 쉬울 줄이야. 지닌 살기가 아깝군. 원래는 우리와 상대를 좀 해줄 줄 알았는데.”
“그만 놀고 어서 끝내지. 몇 놈은 살려서 데려간 다음에 푸짐하게 먹자고.”
그들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무인들이 숨은 곳에서 약 30보 정도 떨어진 거리에 이르자, 마침내 숨어 있는 이들을 모두 찾아낼 수 있었다. 이는 마침 왕극이 정해놓고 있던 사정거리와도 일치했다.
“모두 공격! 죽어라!”
왕극이 고함을 내지르며 단번에 장도(長刀)를 뽑아 전방의 네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30보 정도의 거리는 그가 지닌 무공으로는 1, 2초면 충분했다.
그러자 다른 무인들과 좌무극도 그의 뒤를 따라 삼면에서 상대를 공격해왔다.
하지만 네 사람은 조금도 놀라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 무인들은 그들에게 있어 이미 도마 위의 생선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