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화. 이런 기개가 있다니
제주의 날씨는 무척 추워서, 섣달그믐이 되자 제주 전체에 거위 털처럼 커다란 눈송이가 날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밤이 되기 전에 이미 온 땅이 눈으로 뒤덮여 버렸다.
산자락에 기대어 지어진 제림관 성벽 위에서는 윤중이 수비 상황을 순시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은 날씨가 너무 춥고, 또 새해가 다가오는 터라 쌍방의 교전이 줄어든 상태였다.
윤중이 성벽 위를 따라 걸으면 주위의 병사들이 모두 그를 향해 예를 올렸다.
“장군!”
“장군!”
낯익거나 처음 보는 얼굴의 병졸들이 차례로 그에게 예를 올리면, 윤중도 그들에게 한 명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는 병졸들이 추위로 손과 얼굴이 새빨개진 것을 보고, 곁에 있던 한 교위에게 물었다.
“방한용품은 충분한가?”
“장군께 아룁니다. 제주는 겨울이 되자마자 땅까지 얼어붙으니, 방한용품을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군중에서 가장 긴급한 일입니다. 후방에서는 일찍이 준비를 마치고 이를 운송해와, 지금 모든 병사가 안팎으로 방한 옷을 입고 있습니다. 게다가 각자에게 배급된 도롱이도 있습니다. 목탄 등도 모두 넉넉합니다.”
그러자 윤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제림관 밖을 바라보았다. 숲이든 황야든 모두 눈이 쌓여 하얗게 덮여 있었다.
“장군, 저희 군은 물자가 충분한데도 병사들이 이토록 떨고 있습니다. 조월국 놈들은 나라 안이 혼란하니, 지금은 전쟁 때문에 잠시 후방이 통합되었다곤 하나 분명 물자를 충분히 보급해주진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윤중이 손을 올려 그의 말을 제지한 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탐꾼의 보고에 의하면, 적군의 현재 규모가 이미 백만에 달한다더군. 그러니 과장된 숫자를 감안하고 병역으로 징집된 이들을 제해도, 전장에 나설 수 있는 병사의 수가 절대로 작지 않을 것이다. 이런 추위에, 그리 많은 사람이 모였으니 무슨 짓이든 벌이려 할 것이다. 이미 적군에게 점령당한 제주의 백성들이 다시 한번 고초를 겪겠구나…….”
윤중은 비록 무장이었으나 윤씨 집안에서 자란 만큼, 그의 시야는 이제 막 종군을 시작한 젊은 군인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조월국의 상황이며 적군의 습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대정국 쪽은 막 훈련을 마치고 투입된 병사들조차 군기가 잘 잡혀있고 무예를 어느 정도 닦은 상태이지만, 조월국 병사들 대부분은 흉악하기 짝이 없는 도적 떼와 같았다. 아마 열에 일곱은 실제 건달이나 부랑자들일 것이다.
조월국 군대는 물자가 부족하니 그게 무엇이든 상대에게서 빼앗든가, 아니면 제주 백성들에게서 빼앗으려 할 것이다. 감도 무른 것부터 찔러본다고 하지 않는가.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윤중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이는 그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윤중의 생각은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조월국 대군은 3~5만 명의 규모로 군영을 지은 상태였다. 제림관 밖, 제주에 자리 잡은 군영의 땅만 합쳐도 아마 3백 리(약 118km)는 족히 넘을 것이다. 조월국 군영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제주의 도시며 마을은 모두 큰 재난을 당한 상태였다.
큰 성보다는 특히 마을이나 작은 성들이 더 했다. 조월국은 영토를 확장할 꿈에 부풀어 있어, 큰 성은 선뜻 훼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작은 규모의 지방 마을들이 전부 그 희생양이 된 것이다.
제림관 이북의 건구부(建丘府)는 조월국 대군 중 주력이 되는 군대의 주둔지였다. 섣달그믐이 되자, 군중의 장군은 병사들도 새해를 잘 보내야 한다며, 관제를 느슨히 풀어주었다. 그러자 혈기 왕성한 조월국 병사들은 모두 부근의 현성(縣城)이나 마을로 곧장 달려 나갔다.
올해는 제주의 백성들에게 있어 무척 불운한 한해였다. 그러니 평소였다면 모두 함부로 집 밖을 나서려 하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섣달그믐이었으므로 그럭저럭 괜찮은 단원반(*團圓飯: 섣달그믐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밥)도 차려 먹고 폭죽도 터뜨려야 했다. 그에 더해 잘 아는 서생에게 춘련(*春聯: 새해에 문이나 기둥·미간(楣間) 등에 써 붙이는 주련(柱聯) 또는 대련(對聯))을 부탁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사당에 가서 기도를 올리기도 했는데, 그들이 비는 것은 모두 조월국 병사들이 이곳에 찾아오지 않게 해달라는 것과, 대정국 군사들이 하루빨리 전쟁에 이겨 조월국 놈들을 이곳에서 몰아내 달라는 것이었다.
나죽현(羅竹縣)의 현위(*縣尉: 옛날, 각 현에 두었던 경찰)와 대부분의 차역(*差役: 관아의 하급 관리), 그리고 병졸들은 일찍이 조월국 대군에 의해 죽거나 크게 다친 후였다. 원래라면 성이 함락된 후 군대가 다스려야 하지만, 현령(*縣令: 현을 책임지고 다스리는 으뜸 벼슬)이 혈혈단신으로 적군과 담판 끝에 약속을 받아내어 그나마 지금처럼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성은 이제 모든 수비와 방어가 해제된 상태로, 현성 안의 질서는 오직 현령의 명망과 살아남은 소수의 하급 관리, 그리고 백성들의 자율로 인해 유지되고 있었다.
이때 성문 입구에서는 채소 장수 몇몇이 광주리를 들고 성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간 백성들은 모두 문밖을 잘 나서려 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섣달그믐인 만큼 결국 장사를 하러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장해 놓은 무나 다른 채소들을 팔아 고기로 바꿔 집으로 가져가려는 생각이었다.
농민들이 현성에 들어서기 전, 돌연 뒤쪽에서 땅이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이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군대가 달려오며 일으키는 흙먼지가 보였다. 이를 본 백성들의 얼굴에 공포와 혼란이 떠올랐다.
“적, 적병들이, 또 왔어!”
“어서 도망쳐!”
“아이고, 성 밖으로 달려가면 어쩌자는 것인가, 그랬다간 저놈들이 우리를 과녁 삼아 화살을 쏠 거라고!”
“그럼 어서 성으로 들어가세, 빨리!”
농민들은 멜대를 지고서 얼른 성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떤 이들은 팔러 나온 채소가 담긴 광주리도 내팽개치고, 멜대만 뽑아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도망쳤다. 그러고는 성에 들어서자마자 크게 소리쳤다.
“적병이 옵니다! 적병이 또 오고 있어요!”
“뭐?”
“아버지!”
“적병들이 오고 있다고?”
“이런,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어서 도망치게, 적병들이 온다는군!”
“으아앙……!”
“흐윽, 엄, 엄마, 어디 있어요?”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놀라 고함치는 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백성들은 이리저리 사방으로 뛰기 시작했고, 어떤 이는 곧장 집으로 향하거나 어떤 이는 어찌할 바 모르다가 구석진 곳을 향해 달려가곤 했다. 가족이나 일행들이 서로 흩어지고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그 자리에 남아 울고 있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아이가 이리저리 허둥대는 사람과 부딪친 뒤, 대로 옆 어느 점포의 문가에 내동댕이쳐졌다. 가게 주인은 막 문을 잠그려 하고 있었는데, 아이와 부딪친 남자는 고개를 돌려 한번 쓱 바라보기만 하더니 다시 저 멀리 뛰어갔다.
“으아앙……. 흐윽, 흑……. 엄, 엄마…….”
그때 수염이 하얗게 센 한 농민이 아이를 보더니 달려와 일으켜 세웠다.
“아이고, 어느 집 아이냐? 어른은? 부모님은 어디 계시지? 얘야, 네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 있느냐? 울지 마라, 뚝! 아이고!”
더는 지체할 수 없던 농민은 아이의 손을 잡아끌며 성안 깊숙한 곳으로 뛰어갔다. 그들이 떠난 잠시 후, 한 부인이 창백한 안색으로 거리 곳곳을 헤매며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다녔다. 그러다 그녀는 지나던 행인에 의해 끌려가 어딘가로 함께 도망쳤다.
이는 현성의 혼란을 보여주는 단면일 뿐, 지금 이와 비슷한 상황이 성안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백성들은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재난을 느꼈다.
다다다다…… 다다다……!
말발굽 소리와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현성의 성문 앞에 바짝 가까워졌다. 성문은 반쯤 닫혀있었는데, 누가 성문을 닫으려 했던 건지는 몰라도 반 정도 닫다가 포기하고 얼른 도망친 듯했다. 성안의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바닥에 나뒹구는 대나무 광주리 몇 개만이 바람에 의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성안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만약 조월국 병사들이 멀리서부터 혼란에 찬 비명을 듣지 못했다면 정말로 텅 비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듯했다.
그때 관복 차림에 네모난 오사모(*烏紗帽: 관복을 입을 때 착용하는 검은색 사(紗)로 만든 모자)를 쓰고, 허리춤에는 검 한 자루를 찬 중년의 남자가 거리 끝쪽에서부터 걸어왔다. 걸음걸이는 평온했지만 담담한 표정에는 한 줄기 노기가 깃들어 있었다.
조월국 병사들을 이끌던 우두머리는 말을 달려 성으로 들어오다 그자가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것을 보더니,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뒤에서 그를 따르던 병사들은 날뛰는 흥분을 내리누르고 점차 속도를 늦췄다. 아직 병사들은 행동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마음을 다스리기가 쉬워, 공연히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려 하지 않았다.
관복 차림의 남자는 바람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그들 앞에 다가와 두 손을 올려 예를 취했다.
“저는 이 나죽현의 현령입니다. 귀군(貴軍)은 일찍이 나죽현의 평안을 보장한다고 약속한 바 있는데, 오늘 장군께서 병사들을 이끌고 오신 것은 그 약속을 깨시려는 겁니까?”
군마 위에는 앉은 것은 고작해야 교위였는데, 그는 내심 그가 자신을 장군이라 불러주는 것이 흡족했다. 이에 그는 음험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오? 현령 대인이시군. 이왕 약속한 바 있으니, 우리도 당연히 지킬 것이오……. 다만, 그때 이 성의 누구도 무기를 지녀선 안 된다는 조항도 있었던 것 같은데? 현령의 허리춤에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이오?”
교위가 약속을 지킬 거라고 말하자 후방의 병사들 사이에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이에 교위가 고개를 돌려 그들에게 시선을 보내자 곧바로 잠잠해졌다.
현령이 엄숙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서생이 지니는 검은 장신구에 불과합니다. 이왕 장군께서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럼 병사들을 이끌고 떠나 주십시오. 만약 무언가 어려움이 있으시다면, 다른 방식으로 본관에게 상의하시면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음, 그건 문제없소. 아, 그렇지. 현령께 말 좀 묻겠소이다. 나죽현의 평안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한 게 누구요?”
“귀군에 계신 왕성호(王成虎) 장군이십니다.”
교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와, 뒤쪽의 병사들을 향해 물었다.
“형제들, 왕성호 장군이 누군지 나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여기 누구 아는 자가 있는가?”
“없습니다!”
“없습니다, 하하하하…….”
“하하하하…….”
그러자 교위는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약속을 지킬 필요도 없는 셈이지, 하하하…….”
현령은 분노가 치밀어 잔뜩 구겨진 얼굴로, 군마 위에 올라탄 교위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노호했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 네놈들은 결코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우리 대정국 군사들이 이곳을 수복하면, 반드시 네놈들을 능지……!”
챙!
현령은 말을 끝맺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뽑더니 교위를 향해 휘둘렀다. 이들을 향해 걸어올 때부터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후였다.
휘익-!
챙!
교위는 창을 들어 올려 현령의 검을 가볍게 막아낸 뒤, 곧장 기세를 바꿔 앞으로 찔렀다.
푸욱!
소리와 함께 창끝이 현령의 가슴에 박혔다.
“대정국 군사? 그놈들 모두 너 같은 약골들뿐이다.”
“형제들, 가져갈 수 있는 것, 실을 수 있는 것, 전부 찾아내라!”
교위가 장창을 빼내 휘두르자 현령이 땅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들은 성안 곳곳으로 말을 달리며 흥분에 차 크게 웃으며 고함을 질러댔다.
“컥…… 커헉……. 저…… 도둑놈들…….”
현령은 칼자루를 손에 꼭 쥔 채 노기 어린 눈을 감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때 갑주를 입은 어느 군관이 군졸 두 명을 이끌고 현령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두 눈을 튀어나올 듯이 부릅뜬 현령을 엄숙한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다시 죽은 후에도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군관은 허리를 굽혀 직접 손으로 현령의 두 눈을 감겨준 뒤 낮게 중얼거렸다.
“일개 서생일 뿐인 현령에게 이런 기개가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