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687화 (687/892)

687화. 후회

이 무리는 다른 조월국 병사들과 확실히 달랐다. 뒤에 있는 한 병사가 현령의 시체를 보며 이렇게 물었다.

“큰형님, 저희는 어찌할까요?”

갑주를 입은 남자는 미간을 찡그린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곧 현령의 손에서 검을 뽑아내려 했으나, 어떻게 해도 뽑을 수가 없었다. 현령은 이미 죽었지만, 그 손가락만은 단단히 칼자루를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현령의 손가락을 하나씩 편 후에야 검을 빼낼 수 있었다. 그러고는 현령의 허리춤에 걸린 검집을 끌러 장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남자가 성안의 광경을 한번 둘러보니, 곳곳이 혼란한 와중에 놀란 백성들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서 형제들을 소집한 뒤 어서 이곳을 떠야겠다. 돌아가 산적이 되는 한이 있어도 여기에 머무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형님, 공을 세울 생각을 포기하신 겁니까? 전쟁은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닙니까?”

그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의혹에 서린 목소리로 묻자, 남자가 검을 쥔 채 일어나 대답했다.

“조월국 군대를 이끄는 원수가 있다고는 해도, 실은 각자가 각자의 무리를 관리하고 통솔하는 상황이다. 또한 말로는 백만의 대군이라지만, 내부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어. 모두 이익을 위해 모여든 오합지졸들 뿐이지. 조정에서는 직속 군대인 십만 명을 빼고 다른 이들에게는 양식이나 건초도 보내지 않아 스스로 조달해야 하지……. 내 보기엔 우리가 대정국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많은 도사나 선사들이 와 있지 않습니까!”

남자는 잠시 주저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신선에 관한 일은 나도 잘 모른다, 게다가, 그 신선이란 자들도…… 됐다, 술이나 고기만 좀 찾아낸 뒤 돌아가자.”

남자와 그를 따르는 형제 둘은 별다른 말 없이 곧장 성안의 시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도 나름대로 맡은 임무가 있었다. 오늘은 최소한 고기와 술을 가지고 돌아가야 했다. 군영에 있는 자신의 형제들이 오늘은 좀 제대로 된 섣달그믐을 보낼 수 있도록 말이다.

쾅쾅! 쾅쾅쾅……!

“문을 열어라! 열지 않으면 부순 뒤 안에 있는 누구든 모두 죽여버리겠다! 어서 열지 못할까!”

몇몇 병졸들이 바깥에 ‘술(酒)’이라고 걸려 있는 점포 밖에 서서, 손에 든 무기로 연신 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를 본 조금 전 세 사람은 서로 눈빛을 한번 교환한 뒤, 얼른 그쪽으로 향했다.

가게 안에서는 주인이 놀라 두려움에 떠는 부인과 아이를 끌어안고 애써 진정시키고 있었다.

“아버지, 무서워요…….”

“괜찮다, 겁먹지 마라. 잘 숨어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가서 문을 열 테니!”

주인은 저 문으로는 병사들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는 부인과 아이를 술 저장실 옆 빈방의 상자 안에 숨긴 뒤 침상 아래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자신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바깥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주인은 연신 바깥의 병사들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소인이 감히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실은 너무 겁이 나서 문을 여는 것이 조금 늦고 말았습니다. 나리들께서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저리 비켜라!”

한 병졸이 장창의 뭉툭한 끝으로 주인의 배를 밀쳤고, 그가 한쪽으로 나뒹굴자 다른 이들이 우르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가게 안에 쌓인 술 단지를 보더니, 얼굴 가득 웃음꽃이 폈다.

“하하하하, 술이 이렇게나 많다니! 일단 어서 옮기자고! 잠시 후에 수레든 마차든 찾으면 되니까. 참, 가게 안에 은자는 어디 있느냐?”

한 병졸이 한쪽에서 연신 배를 문지르는 주인을 잡아당겨 계산대 앞으로 끌고 갔다.

“은자는? 전부 꺼내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을 살려두지 않겠다!”

“예, 예! 여기, 계산대 서랍 안에…….”

주인은 감히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계산대 안쪽으로 들어가 작은 서랍을 열고는 서랍을 전부 빼내 계산대 위에 올렸다. 그중 하나는 은자가 들어있었고, 다른 서랍에는 액수가 각기 다른 동전들이 들어있었다. 그러자 병졸들이 그를 밀치고는 다투어 돈을 쑤셔 넣었다. 다른 이들은 이미 술 항아리와 술병의 마개를 전부 열어 입에 쏟아붓고 있었다.

주인은 홀로 한쪽에 몸을 피한 채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고뇌와 분노로 일렁거렸다. 그러다 그는 참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도둑놈들이라고 욕을 내뱉었다. 그의 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한쪽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뻘건 얼굴의 병졸이 이를 보고 말았다.

“방금 뭐라 했느냐?”

“예? 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나, 나리, 가게 안의 은자와 술은 모두 가져가셔도 됩니다. 그저 소인의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병졸은 칼자루 위에 손을 올리며 주인을 향해 걸어오더니 다시 이렇게 물었다.

“방금 뭐라 했냐고 내가 묻지 않았느냐?”

다른 병졸들도 이를 보더니 몇몇이 가까이 다가왔다. 무표정인 이도 있었고,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는 이도 있었다. 이에 주인은 간담이 서늘해져 침을 꿀꺽 삼킨 뒤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저는 그저 올해를 어찌 보낼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헛소리! 분명 우리를 욕했잖느냐! 죽어라!”

챙- 챙-

댕!

검이 검집에서 뽑히는 소리가 들린 뒤 병졸이 주인의 머리 위로 검을 내리치려던 순간, 뒤에서 도착한 남자가 현령의 시체에서 가져온 검을 뽑아 주인의 머리 위를 막았다.

“그만! 술과 돈을 가져간 걸로 충분하다!”

“오? 넌 또 웬 놈이냐!”

“네가 뭐라도 되느냐?”

“네놈 아비인가 보지!”

챙- 챙- 챙-!

그러자 주위의 모든 이가 칼을 뽑아 들었고, 남자와 함께 들어온 그의 두 형제도 칼을 뽑았다. 남자는 왼손으로 허리춤에 찬 패도를 뽑아 들어, 가게 주인을 죽이려 했던 병졸의 목에 갖다 대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칼날이 피부에 닿자, 피부가 살짝 그을린 그 병졸은 온몸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나 단번에 술이 확 깼다.

“일개 소졸(*小卒: 졸병) 주제에 감히 군령을 거역하는 것이냐?”

한 손에는 검, 한 손에는 칼을 쥔 남자가 이렇게 소리쳤다. 그의 직위는 백장(*伯長: 휘하에 100명을 둔 군대 내 지휘관)으로, 비록 군중에서 주류에 든 이는 아니었지만, 갑옷만 봐도 보통 병사와 차이가 있었다. 그가 엄한 목소리로 일갈하자, 그의 갑옷을 본 병졸들이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술이나 챙겨 들고 어서 가라!”

“어서 가, 가자고!”

“그래, 백장 나리니 그 말에 따라야지.”

병졸들이 도검을 거두고 멀어지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점포 주인의 안색이 창백했다. 백장이 막 그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돌연 소리가 들렸다.

푹, 푹, 푹……!

뒤이어 그의 얼굴과 몸에 따뜻한 액체가 흩뿌려졌다.

이에 남자가 곁에 있던 형제들을 바라보니, 그들의 몸에 온통 피가 흩뿌려져 있었고 얼굴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백장이 자신의 얼굴을 대고 액체를 쓱 훑자, 역시 그것도 피였다.

쿵, 쿵, 쿠웅……!

근처에 서 있던 병졸들이 차례로 바닥으로 쓰러지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서 병졸들은 몸에서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백장과 그의 두 형제가 놀라 자기 몸을 더듬거리며 만져보았으나, 다행히 그들은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그는 얼른 자신의 무기를 다시 뽑아 들고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휘이잉-!

그때 바람이 불어닥치며 점포 안으로 한기가 몰려들었다. 그러자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이 흘리는 피에서 김이 솟아올라,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너희 세 놈은 살려주도록 하겠다, 꺼져라.”

그때 감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오자,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가게 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가죽으로 된 외투를 입은 남자가 눈보라를 맞고 서 있었다. 바닥을 향해 비스듬히 내린 장검 위로는 피가 흘러 땅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핏물이 다 떨어져 내린 검신(檢身)은 다시 새하얀 눈처럼 은빛을 내뿜었고, 그 위에는 조금의 핏자국도 남아있지 않았다.

“감, 감사합니다, 대협!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안색이 창백해진 세 사람은 얼른 점포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다 백장은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로 문가에서 걸음을 멈춘 뒤,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히며 들고 있던 장검을 두 손으로 검객에게 내밀었다.

“대협, 이 장검은 여기 나죽현 현령이 지니고 있던 패검입니다. 그는 홀로 대군에 맞서다 교위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제가 그를 대신해 눈을 감겨주었고, 원래는 이 패검도 제가 가지려 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대협께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점포 앞에 서 있던 검객은 다름 아닌 연비였다. 그는 자기 앞에 멈춰선 조월국 군사를 보더니 장검을 받아들고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백장은 머뭇거릴 엄두도 내지 못해 즉시 대답했다.

“소인의 이름은 한장(韓將)이라 합니다. 소인과 형제들은 결코 일반 백성들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연비가 냉담한 얼굴로 그를 향해 물었다.

“그럼 우리 대정국의 병사들은? 죽여봤겠지?”

한장은 얼굴이 뻣뻣이 굳더니 즉시 떠나지 않은 걸 속으로 후회했다.

‘대체 내가 왜 이자에게 잘 보이려고 이런 바보 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아마도 살아 돌아가지 못할 듯싶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애써 마음을 다스린 뒤, 이를 꽉 물고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양군이 교전 중인 전쟁터에서,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제가 죽는 마당에,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 죽인 적이 있습니다…….”

“흥, 그나마 대장부다운 기개는 있군. 조월국 군중에 널린 것이 건달과 조무래기들이고, 이매망량도 적지 않다는 건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정국을 돕기로 한다면, 나 연비가 네 목숨을 보장하겠다. 부귀를 약속해줄 수도 있다!”

이에 한장이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 성 곳곳에서 비명과 무기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 몸싸움하는 소리 등이 들렸다. 그러자 그는 눈앞의 검객이 홀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정국 쪽에서 반격을 시작한 것이다.

“소, 소인이 만약 곧장 떠나겠다고 한다면요?”

그러자 연비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떠나라. 조금 전에도 이미 너희들을 놔주겠다고 했는데, 설마 이 연비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할까?”

연비는 눈초리를 가느스름하게 뜨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성안에 최소 2백여 명의 강호 고수들이 퍼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좁은 골목과 건물들이 널린 성안에서는 결코 군사들이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이 세 사람은 그의 검 끝에서는 목숨을 건졌지만, 아마도 성을 나서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때 한장도 무슨 생각이 마음속에 스쳤는지, 고개를 돌려 어찌할 바 모르는 제 형제들을 한번 바라본 뒤 다시 연비를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대협, 하겠습니다! 군영을 공격하는 데에 협조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하, 꽤 기민한 자로군. 성을 나서기 전까지는 내 뒤를 따라라. 잘못해서 목숨을 잃지 않도록 말이다.”

연비는 이 말을 남긴 뒤 성큼성큼 떠나려다, 다시 고개를 돌려 점포 안에 빳빳이 굳어있는 주인을 향해 말했다.

“우리 대정국의 대군이 반드시 이 성을 수복할 것이니, 기다리고 계시오!”

말을 남긴 그는 세 사람에게 “따라오거라.”라고 말한 뒤, 그들을 이끌고 성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가 휘두르는 검에서는 검광(劍光)이 기다란 폭포수처럼 흩뿌려졌고, 그 아래 조월국 병사들의 목숨이 스러졌다. 그뿐만 아니라 성에서 마주치는 다른 무인들 모두가 조월국 병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