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688화 (688/892)

688화. 평화롭지 못한 밤

오후가 되자, 성에 들어와 백성들을 약탈하려 했던 천여 명의 병졸들은 거의 전부 죽은 후였다. 백성들은 모두 이들을 뼛속 깊이 증오했기 때문에 아무도 나서서 그들을 감싸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상황을 파악한 후에는 강호의 협객들에게 자신들이 아는 소식을 전해주기까지 했다.

좌무극과 왕극은 다른 강호인들과 함께 동문(東門)을 지키고 있었고, 다른 세 군데의 성문은 각기 다른 강호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단 한 명의 조월국 병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해가 질 무렵, 피로 목욕하다시피 한 강호인들이 모두 돌아와 마차 등을 빌려 그 위에 조월국 병졸들의 갑옷을 실었다.

좌무극이 든 편장의 양쪽 끝에도 피와 골수가 묻어 있었다. 그는 성문 앞에 서 있다가 연비가 돌아오는 걸 보고는 즉시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큰 사부님! 괜찮으세요?”

그러자 한쪽에 있던 왕극이 웃으며 말했다.

“연형은 선천의 경지에 이른 고수인 데다, 무슨 대군을 상대한 것도 아니고 이런 길거리 싸움에서 누가 그를 다치게 할 수 있겠느냐?”

그 사이 연비가 이미 가까이 다가와, 좌무극의 어깨를 두드린 뒤 낮은 소리로 왕극에게 물었다.

“어찌 됐소?”

이에 왕극도 엄숙한 표정으로 돌아와 이렇게 대답했다.

“밤이 되기 전에 준비를 마칠 수 있을 것 같군.”

바로 그 시각, 작게는 백 명에서 많게는 수백에 달하는 각기 다른 대정국 군사들의 행렬이 제림관 부근의 작은 길을 통해 빠져나갔다. 그들은 눈 덮인 경치에 섞이기 위해 모두 흰색 피풍의(披風衣: 망토와 비슷한 외투)를 걸친 채였다.

한편 강호인들은 말을 몰고 멀리까지 나가 적진을 정탐하고 있었다. 아마 섣달그믐날 밤이 평화롭게 지나가긴 그른 듯했다.

* * *

섣달그믐 밤, 한장의 통솔 아래 천여 명의 강호 고수와 대정국 정예병들이 섞인 돌격대가 조월국 병사들의 갑옷으로 갈아입고서 물자를 가득 실은 채 조월국 군영으로 돌아왔다.

같은 시각, 청송 도인을 중심으로 한 대정국 군중의 수행자들은 함께 모여 제림관 인근의 산꼭대기에 제단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천기(天機)를 어지럽혀 적들을 속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해서 평평한 산꼭대기에 토행(土行)의 술법으로 쌓아 올린 삼층 짜리 제단이 완성되었다. 제단의 너비는 3장(丈)으로, 주위에는 각종 별자리가 그려진 깃발이 꽂혀 있었다. 중앙에 꽂힌 양면 깃발은 운산관의 양면으로 된 별자리 깃발을 본뜬 것이었다.

청송 도인은 제단 중앙에 섰고, 주위로는 몇 명의 수행자들이 계속해서 제단에 꽂힌 깃발들을 향해 법력을 주입하고 있었다. 그러자 깃발에서 은은한 빛이 나며, 그 위에 그려진 별들이 하늘에 있는 별과 마찬가지로 밝게 빛났다.

곧이어 청송 도인이 선 채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는 손에 각기 불진과 도검(道劍)을 쥐고 있었는데, 제단 중심에서부터 각각의 깃발 위를 돌아다니며 불진으로 쓸거나 장검으로 긋고 지나갔다. 그러다 다시 제단의 중앙으로 돌아오더니 검을 휘둘러 하늘을 향해 치켜들며 소리쳤다.

“별들이 밝게 빛나며 비추고, 북두성이 방향을 트니 뭇 별들이 자리를 옮기노라(映星照斗, 斗轉星移).”

화앗!

그러자 모든 깃발 위로 별빛이 밝게 빛나더니, 뭇별들이 하늘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알아차리기 힘든 빛무리가 곧장 상공을 향해 쏘아 오르더니, 잠시 후 하늘의 별빛과 달빛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주위 산속에는 옅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안개는 먼저 제단 전체를 덮고는 점차 하늘 전체를 덮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지역 전체에 검은 구름이 옅게 모여들었다. 상공에 검은 구름이 모여들자 대지 위로도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청송 도인은 뛰어난 점술 능력으로 새해와 묵은해가 교차하는 때에 천시(天時)의 현을 튕기면, 자시(*子時: 밤 11시부터 오전 1시)에 가까워질수록 그 미세한 변화가 점점 더 커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제단을 중심으로 한 넓은 지역의 천시 규칙이 비정상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누구든 도행과 마음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지 못하거나, 점괘를 치는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면 이 비정상적인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수행자들이라고 해도, 고작해야 눈보라가 좀 더 거세거나 혹은 누그러졌다고 느끼거나 별빛이 조금 어둡다고 느끼는 게 다일 것이다.

“청송 도장, 이 진법은 이제 완성된 것이지요?”

제단 옆에 서 있던 한 노인은 제단이 정말로 작동하는 걸 보고 놀라, 청송 도인을 대하는 태도가 더욱 깍듯해졌다.

그를 비롯한 다른 수행자들도 마찬가지로 청송 도인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천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라니. 이는 수행자들로 하여금 길흉을 점치는 데에 큰 혼란을 줄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수행자가 해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닌 무척 고명한 수단이었다.

청송 도인은 내심 뿌듯하면서도 자랑스러웠으나, 겸손함을 잃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

“부끄럽소. 빈도(貧道)가 수행을 닦은 세월이 짧지 않은데도, 법력을 펼치는 수단은 여전히 이토록 얕고 조잡하오. 이에 사문(*師門: 스승의 문하)의 선배와 고인들께는 여전히 내보이기가 부끄럽소. 하지만 이 진법은 사람이 아닌 하늘을 겨냥한 것이고, 오늘 밤은 더욱이 묵은해와 새해가 교차하는 때인 만큼, 날이 밝기 전까지는 누구도 이 진법을 꿰뚫어 보지 못할 것이오.”

“정말 잘되었소! 그럼 도장께서 진법을 잘 지키고 계셔주시오. 우리는 이제 관문을 나설 터이니!”

두장생이 이렇게 말을 마친 뒤 청송 도인을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하자, 다른 수행자들도 그를 따라 청송 도인에게 예를 취했다. 곧이어 그들은 청송 도인의 인사를 받으며 산봉우리를 떠나갔다.

* * *

일각(一刻: 15분) 뒤, 제림관 부근의 대정국 정예병들은 만 명 단위로 길을 나눠 밤바람을 뚫고 행군을 시작했다. 법사나 무사(巫師)들의 도움을 받은 후로, 본디 기강이 해이하던 조월국 군대는 더욱 느슨해졌다.

윤중은 원래부터도 보초병들을 처리할 자신은 있었으나, 적진에 소위 법사나 무사라고 하는 이들이 있어, 이런 공격을 하기가 꺼려졌다. 그런데 이제 아군의 고인이 자신들을 엄호해주고, 안개 속에서 몸을 숨기고 행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조월국 측은 원래도 자기들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고, 섣달그믐에 가까워질수록 양측은 오래도록 암묵적으로 교전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도 대정국에서는 군사들을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번 습격이 얼마나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는 일단 제쳐두고, 조월국 측은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도 충분한 대비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공격!”

“죽이자!”

“덤벼라!”

조월국의 요충지에 있는 군영 몇 곳에서는 동시에 고함과 비명이 하늘을 뒤덮었다. 심지어 대부분의 군영에서는 내부에서 대정국의 공격을 돕는 세력도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조월국의 병졸 차림을 한 첩자거나, 조월국 군사들에 의해 징집된 평범한 농민이었다. 곳곳에 누군가 고의로 놓은 불길이 치솟으며,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사방에 가득했다.

제주 영정관(永定關)은 연추산의 서쪽 끝자락에 속하는 산맥에 지어진 관문이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만 보면 연추산은 동쪽 끝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실은 지하로 산맥이 내내 이어져, 연추산은 동쪽까지 수백 리 넘게 뻗어 있었다.

원래 대정국의 관할이던 이 관문은 보통 사람의 속도로 3일만 걸으면 곧장 조월국의 국경에 닿을 정도로 조월국과 가까운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조월국 대군의 전선의 후방에 자리해 있었다.

영정관 옆, 한 산봉우리의 정상에서는 신선처럼 표표한 자태의 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이때 내내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돌연 고개를 들어 공중을 올려다보더니,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별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제주 방향을 한참 바라보더니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약 반각(半刻) 뒤, 둔광(*遁光: 다른 물질의 도움을 빌려 숨거나 도망치는 술법을 부릴 때 내는 빛) 두 갈래가 멀리서부터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보아하니 곧장 영녕관을 넘어갈 생각인 듯했다. 이에 백약이 즉시 반응을 보였다.

‘네놈들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약이 자리에서 일어나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리자, 입안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공중에서 빙빙 돌며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멀리 둔광을 향해 날아갔다.

빛이 날아가 상대에 닿자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콰광……!

그에 더해 번개처럼 번쩍이는 빛이 밤하늘을 밝게 비추었다.

흰빛은 밤하늘을 가르는 거대한 뱀처럼 쉬지 않고 꿈틀대며 움직였다. 조금 전 하늘을 밝게 비추었던 번개 빛이 사라지자, 두 갈래의 둔광은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흰빛으로 이루어진 뱀과 맞붙어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고인이 잠복하고 있었을 줄이야. 실로 우리가 대정국을 얕보았군. 오늘 천시를 어지럽힌 것도 귀하의 실력이겠군?”

산간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두 줄기 둔광은 술법끼리 충돌을 일으키는 와중에 백약이 서 있는 산봉우리에 가까워졌다.

백약이 하늘에 떠 있는 흰빛을 거둬들이자, 그것은 그녀의 손에서 정교한 연검(*軟劍: 탄성이 강한 재질로 만든 유연한 검)이 되었다. 그녀가 검을 쥔 손으로 뒷짐을 진 채 산봉우리에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속세를 초월한 검선(劍仙) 같아, 그녀의 정체가 사실 요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그렇게 초연한 모습으로 상대의 물음에 대답했다.

“천시가 어지러워진 것은 저와 관련 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두 분이 오늘 이곳을 지나는 건 불가능하겠군요.”

양쪽 모두 오늘 이런 상황에서 마주쳤으니 원만하게 끝을 보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아하니 귀하는 선도(仙道)의 수선자인 듯한데, 이런 속세의 국운을 건 싸움에 끼어들다니. 몸담은 선문은 어디고, 선호(仙號)는 무엇이오? 나중에 가서 우리 임곡(林谷)의 늙은이들에게 당한 뒤, 우리가 그쪽 선문의 체면을 보아주지 않았다고 원망하지 마시오!”

백약은 부드럽게 검을 휘둘러 전방을 향해 가리킨 뒤 웃으며 대꾸했다.

“첩신(*妾身: 옛날, 여자가 자기를 낮추어 일컫던 말)의 성은 백씨로, 어느 유명한 선문 출신은 아니니 안심하시지요. 제게 이 묘법을 전해주신 분은 대단한 고인이신지라, 감히 자신을 그분의 제자라고 일컬을 수도 없으니 그저 일개 수행자일 뿐입니다. 자, 인사는 이만하면 됐으니 이제 시작하죠!”

이렇게 말하는 백약의 목소리는 계연이 알던 온화한 목소리가 아니라 냉정하고 차가운 느낌이 났다. 그녀는 말을 마치더니 곧 발을 세게 굴렀다.

쿠궁!

굉음과 함께 그녀가 서 있던 산봉우리가 금이 가 부서지며, 수많은 거대한 바위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뒤이어 백약 자신도 공중으로 치솟아 한 줄기 흰빛으로 변했다. 그녀는 공중에 떠오른 거대한 바위들을 빙빙 휘감아 공중에서 용의 모습과 흡사한 검세(劍勢)를 만들어냈다.

“오오우-!”

잘 듣기 힘든 사슴의 울음소리와 함께, 백약은 바람과 구름을 몰고 벼락같은 기세로 두 사람을 덮쳤다. 소위 영곡에서 왔다는 두 노인의 눈에 그 흰빛은 마치 태산의 위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감히!”

두 사람은 즉각 뒤로 후퇴하며, 그중 하나는 백약을 향해 영전(*令箭: 군령을 전하는 화살)을 휙휙 던졌고, 다른 한 명은 결인을 맺으며 쉼 없이 술법을 펼쳤다. 영전이 흰빛에 닿자 곧바로 폭발을 일으켰다.

콰광! 쿵! 쿠궁!

영정관 밖, 적막한 섣달그믐의 밤은 이상할 정도로 찬란한 불꽃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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