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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693화 (693/892)

693화. 금지문(*金紙文: 금빛 종이로 된 문서)

홍성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계 선생님의 탈 짐승이었다면, 그렇게 아둔하게 평범한 인간과 사랑에 빠지진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백 부인이 검을 쓰는 것을 보고, 저는 계 선생께서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녀가 선생의 진수를 배우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영정관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을 텐데요.”

홍성연의 말에 계연은 대부분 찬동할 수 없었으므로,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설령 백약이 정말로 제가 타는 짐승이었더라도 <백록연>의 이야기가 벌어지지 않았을 거란 보장은 없어요.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게 꼭 아둔하여 벌어지는 일은 아니니까요. 자, 그럼 한담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죠. 이제 조월국에도 가봐야 하거든요, 그럼 이만!”

“그럼,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예를 취하자, 계연의 등 뒤에 있던 넝쿨검이 소리를 내더니 계연까지 함께 한 줄기 검광이 되어 동쪽 하늘로 사라졌다.

이때 영정관 근처의 한 산봉우리 위에는 여전히 향안(*香案: 향로를 올려놓는 상)과 방석이 깔려 있었는데, 백약이 그곳에서 두 소녀와 함께 앉아 정신을 집중하며 수행을 닦고 있었다. 섣달그믐 밤이 지난 후, 제주는 온통 혼란한 국면에 접어들어 조월국에서는 지원군을 더 보내왔다. 그러자 백약은 수행이 일정 수준에 달한 수행자들만 상대하고, 다른 이들에 대해서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하늘에 한 줄기 빛이 스치고 지나가자 백약이 번쩍 눈을 떠 그곳을 바라보았다.

‘무척 빠른 둔광(*遁光: 둔술(다른 물질의 도움을 빌려 숨거나 도망치는 술법)을 부릴 때 내는 빛)이구나. 대체 누구지, 옥회산의 선인인가?’

“부인, 왜 그러세요?”

그러자 백약이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없을 테니. 조월국의 요마들에게나 큰일이지.”

“부인, 언제 또 저랑 교아에게 가르침을 주실 거예요?”

“맞아요, 부인, 저희도 초식을 배우고 싶어요. 특히 그 검세(劍勢)를요!”

“너희 둘은 아직 어리다. 게다가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벌써 뛰려고 하는구나. 열심히 수행이나 닦아라!”

그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자, 공중을 날던 계연이 고개를 돌렸고 그는 산봉우리 위의 상황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려와 그들을 만나려 하지 않고, 더욱 속도를 내어 조월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정오가 되자 계연은 무애귀성에 도착했다. 이번 전쟁이 시작할 때부터 이미 계연이 올 거라고 예상하던 신무애는 마침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 * *

무애귀성의 유명귀부 안 대전 안, 상석 옆에 놓인 작은 걸상에는 계연이 앉아있었다. 반면 신무애는 상석에 앉지 않고 선 채로, 음침목(*陰沉木: 홍수나 지진 등으로 오랜 시간 땅 밑에 묻혔던 나무. 삿된 것을 쫓아낸다는 속설이 있고, 목재로서의 가치가 뛰어남)으로 만들어진 상자를 계연에게 건넸다. 그 위에는 인장이 찍혀 있었는데, 바로 계연이 내린 ‘유명정당’ 네 글자였다.

“열어 보시지요, 선생님.”

계연이 상자를 받아 맨 위에 덮인 목판을 열어젖히니, 한 줄기 법광(法光)이 반짝이며 그 아래쪽의 금빛 종이가 보였다. 종이 위쪽에는 ‘칙령’이라는 두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고, 아래에 적힌 것은 대략 ‘운주의 기운이 조월국에 모여드니, 흥성하는 일국의 기운에 올라타면 득도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한 주(州)의 성황신 자리를 신무애에게 주겠다는 말도 적혀 있었다.

계연은 종이의 재질을 만지작거리다 정신을 집중하여 다시 그 위의 글자를 느껴보았다. 그러자 그 속의 진의와 심오한 법력이 느껴져 현묘함을 드러냈다. 이 글자에 담긴 힘은 법령보다도 강력했는데, 그로 하여금 혹시 이게 전설 속의 칙봉 부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였다. 계연조차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 이것을 받아든 이들은 모두 이 제의를 매우 설득력 있게 느꼈을 것이다.

“선생님, 수맥이 흐르는 요충지에 자리 잡은 수행자는 대부분 이것을 받았고, 그 외 다른 수많은 이들도 받은 것으로 압니다. 제가 아는 요괴 중에는 신위(神位)를 약속받은 자도 있고,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제사로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은 자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곧장 조월국으로 가 책봉을 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계연은 미간을 찡그린 채 그 종이를 한참 보다가 다시 상자를 닫았다. 그러고는 상자를 소매 안에 넣고서 신무애를 향해 평온하고 담담한 눈빛으로 물었다.

“남겨야 하는 이들이 있나요?”

그러자 신무애는 그 말뜻을 알아듣고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한 뒤, 얼른 자신과 관계가 깊고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악랄한 짓을 하지는 않은 요괴나 귀신 혹은 정괴의 이름을 댔다.

그날 밤, 발톱을 숨기고 거의 1년 가까이 성을 닫았던 무애귀성에서는 여러 귀장(鬼將)이 수많은 귀병(鬼兵)을 이끌고 쏟아져 나왔다. 전차가 쿵쿵 울리고 귀마(鬼馬)가 울어 젖히며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곳곳으로 흩어졌다.

조월국에서 진정한 의미로 가장 많은 귀신(鬼物)이 소속되어 있는 귀도(鬼道)의 세력으로서, 무애귀성의 활동 범위는 일찍이 조월국 전체를 뒤덮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에 어느 요마와 어느 정괴가 있는지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이전에 계연도 그들이 귀신들을 관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다른 존재들도 지켜봐 달라고 당부한 바 있었다.

이렇게 많은 귀신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그 누구도 잠을 자지 못할 테지만, 이날 밤하늘에는 밝은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그때,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조월국의 한 성에서는 살풀이 법사 하나가 돌연 눈을 번쩍 떴다.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었는데도 그의 온몸에는 닭살이 돋아있었고 왠지 모를 추위를 느꼈다.

“어휴……. 왜 이리 춥지? 이상하군, 이상해! 제자야, 어서 일어나라, 뭔가 이상하다!”

“하암……. 사부님, 이상한 게 있다면 사부님이겠죠……. 아이고, 졸려…….”

그러자 살풀이 법사는 곧장 침상에서 내려와 면으로 지은 겉옷을 걸친 뒤, 제자의 침상 앞으로 가서 그의 이불을 홱 젖혔다.

“으으! 사부님, 왜 이러세요!”

“옷 입고 물건 챙겨 나와라. 오늘 밤은 뭔가 이상하구나!”

살풀이 법사는 이렇게 말하며 창문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의아해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별도 없이 달이 이렇게 밝다니? 게다가 이렇게 강한 음기라니, 뭔가 이상한데…….”

제자는 동작이 아주 빨라, 살풀이 법사가 바지의 허리춤을 묶는 사이 이미 옷을 다 갖춰 입은 상태였다. 그러고는 등에 나무 상자를 지고서 검 두 자루를 들더니 사부를 향해 그중 하나를 건넸다.

“사부님, 여기요!”

“그래, 어서 나가자. 오늘 밤 성안에 필시 요사한 것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조정의 징집에 응하지 않았길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누가 지금 속세의 정의를 위해 나섰겠느냐! 가자!”

두 사람은 방문을 열고 경공을 펼쳐 담벼락을 넘더니, 근처의 건물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몇 번 만에 주위에서 가장 높은 한 주루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다음 순간, 사제 두 사람은 모두 얼어붙었다.

꿀꺽-!

“사, 사부님, 저, 저희는 다, 다른 날에 다시 속세의 정의를 위해 나서는 게 어떨까요?”

살풀이 법사도 창백한 안색으로 자기 제자처럼 온몸의 털이 삐죽 솟아 있었다.

“네 말이 맞다……. 오늘은 천시(天時)가 우리 편이 아닌 듯하구나. 게다가 음병(*陰兵: 음기를 띤 병사)들이 넘어오긴 했으나 공격할 것으로 보이진 않으니…… 다, 다른 날에 다시 속세의 정의를 실현하자꾸나, 다른 날에…….”

두 사람은 여기까지 올 때는 제비처럼 날쌨지만, 돌아갈 때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하마터면 지붕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앞을 보지 않고, 계속해서 흙으로 지은 야트막한 성의 담벼락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수천수만의 갑옷을 입은 귀병들이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기병도 있고 전차도 있었는데, 깃발은 높이 도열해 있고 병기들은 숲처럼 빽빽하게 움직였다. 병사들의 발아래에서는 귀기(鬼氣)와 음기(陰氣)가 파도가 치듯 격렬하게 꿈틀댔고, 그들은 곧 엄청난 속도로 저 멀리 산속으로 사라졌다. 이들이 내뿜는 귀기와 음기가 너무 강해, 두 사람은 만약 보통 사람이 이곳에 있었더라도 이 장면을 볼 수 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오늘 밤 이 오싹한 광경은 아마 평생 결코 잊지 못하리라.

살풀이 법사조차 귀기와 음기가 밀려드는 걸 느낄 정도였으니, 요마(妖魔)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들은 이렇게 많은 귀병(鬼兵)이 대체 무슨 이유로 한꺼번에 움직이는지 알지 못했고, 이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 * *

이때, 반경 백 리 안에 아무런 민가가 없는 어느 깊은 산에서는 연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연회 자리인 만큼 가무는 빠지지 않았고 다양한 동물들을 잡아 만든 요리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살아있는 채로 이 자리에 끌려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남녀가 섞여 있었으나 모두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 이들의 눈빛에서는 극도의 공포와 절망이 느껴졌다.

동굴 안에 마련된 커다란 대청에서는 다양한 요괴들이 커다란 돌 탁자를 둘러싸고 앉은 채 흥분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앞으로 며칠 동안 우리 모두 제대로 한번 즐겨봅시다!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이나, 먹고 싶었지만 먹지 못했던 것들 전부 할 수 있소! 날마다 연회를 열고 밤에는 노래를 부르며, 평소 억눌렸던 것을 전부 쏟아냅시다! 그 뒤에 곧장 조월국 황제를 찾아가 책봉을 받으면, 천사(天師)가 되어 조월국의 기운과 한데 묶이게 될 테니, 전장에 가서 또 눈치 볼 것 없이 실컷 먹을 수 있소. 하하하하…….”

“호오, 좋은 생각이오! 자자, 어서 드시오!”

“건배, 건배!”

“여기 이 피부가 부드러운 뚱보는 내가 먼저 맛보겠소.”

“안 돼, 안 돼, 살려주세요! 요괴 어르신, 제발 살려주십시오! 아악-!”

푸욱-!

주위로 피가 분수처럼 치솟더니 곧이어 뼈와 살점이 와그작, 씹히는 소리가 났다.

휘이…… 휘이이……!

그때 산속의 음기가 점점 더 강해지더니, 음기 섞인 바람이 주위 나무와 수풀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러자 일시에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산이 고요해졌다.

동굴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도 단번에 사그라들었다. 그러자 수행이 가장 높은 요괴 몇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대체 이 귀기와 음기는 뭐지? 이 부근에는 이렇게 대단한 귀신은 없는데!”

“이상하군, 나가서 봐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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