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709화 (709/892)

709화. 되찾아 오다 (1)

노인은 온몸에서 이유 모를 무력감이 치솟는 걸 느꼈으나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로 맑은 바람이 불어왔고, 주위는 온통 푸른 하늘과 흰 구름뿐이었다.

이에 무언가 알아차린 그는 휙 고개를 돌리다가, 제대로 몸을 지탱하지 못해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구름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다행히 계연이 손을 뻗어 그를 다시 제대로 앉혀 주었다.

노인은 이때 몸속의 법력을 끌어낼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만약 이대로 여기서 떨어졌다면 정말로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죽었을 것이다. 이에 노인이 뒤늦게 두려움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보니, 넓은 소매의 장삼을 입은 유생처럼 보이는 남자가 뒷짐을 진 채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계, 계 선생님? 제 사형은…….”

사형은 시간을 좀 더 끌기 위해 뒤에 남았었다. 게다가 자신들 사형제는 서로 우애가 깊었으니, 절대로 먼저 도망쳤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계연에게 잡힌 걸 보니, 아마 사형에게 무슨 일이 생긴 듯했다.

그때 계연이 고개를 돌려 회백색의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인은 왠지 모르게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뒤이어 계연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 사형은 삼매진화에 크게 다쳤어요. 상처가 크긴 하지만 아직 죽진 않은 상태예요. 그전에 그는 충황이 이미 송씨 황제의 몸에 있다고 했는데, 계모(某)가 고충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당신이 가서 그걸 좀 풀어줘야겠습니다. 대신 선택지 두 가지를 드리죠. 하나는 통쾌한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그간 쌓은 수행을 거둬 다시 평범한 인간으로서 남은 생을 마치게 하는 거예요.”

“그럼 제 사형은요?”

계연은 그 노인이 중년의 남자에 의해 목숨을 구했다는 걸 알았지만, 이 노인은 아직 모르고 있었으므로 굳이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조금의 파동도 일지 않는 눈빛으로 노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도 이번 한 번은 놓아주도록 할게요.”

그러자 노인이 계속해서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제 사형의 화독을 제거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듣기로 삼매진화는 한번 닿으면 절대 꺼지지 않는다고 하던데, 만약 이로 인해 사형이 그간 쌓은 수행이 사라지게 되면 사형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에 계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가 제 도움을 원한다면, 당연히 도울게요.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이 먼저 그 고충술을 풀어야 합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제가 믿어도 되겠습니까?”

노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계연이 고개를 돌려 전방을 바라보니, 저 멀리 조월국의 도성이 보였다.

“저는 함부로 상대를 속이지 않아요.”

계연이 어떤 인물인지는 사실 노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런 계연이 자기 입으로 약속한 일인 만큼 노인도 곧 안심했다.

“그럼 불효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선생님께 어떻게 푸는지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직접 나설 순 없을 듯합니다.”

그러자 계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계연이 소매를 한번 크게 휘두르니, 흰 구름이 한 줄기 연기로 변하더니 용의 허상이 되어 멀리 보이는 땅을 향해 내려갔다.

* * *

용동도(龍東道)는 이미 조월국에서 가장 번화한 지방이 아니게 된 지 오래된 상태였다. 하지만 여전히 조월국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던 옛 시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편, 조월군이 대정국을 침략한 뒤부터, 조월국의 도성인 대통도(大通都)는 회광반조(*回光返照: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뜻함)라도 한 듯 몹시 떠들썩하고 번화한 모습이었다.

계연은 노인을 데리고 함께 한 줄기 연기로 변한 뒤 대통도성 안에 내려섰다. 때는 이미 오후라, 성안은 인파로 북적였는데 거리 어디나 대정국의 물건을 파는 상인들로 가득했다.

“자자, 대정국 계주에서 온 문방구 팝니다, 영안현 장인들의 솜씨입니다! 어느 대갓집에서 소장하던 아주 귀한 것들입니다! 남은 수량이 많지 않습니다, 많지 않아요!”

“자, 여기 대정국 금주에서 온 설랑(*雪狼: 하얀 털을 지닌 늑대) 가죽 팝니다! 상등급의 품질입니다!”

“손님, 여기 이 털가죽 좀 보십시오. 이 색깔, 광택, 척 봐도 새 가죽이지요! 남쪽 국경에 있는 저희 분점에서 특별히 매입한 것입니다. 이 가격에 이 정도 품질은 어디서도 구하기 어렵습니다! 가격은 단돈 스무 냥입니다, 스무 냥이면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오, 그런가? 한번 보지!”

“자자, 여기 와서 이것 좀 보고 가십시오!”

…….

계연과 노인은 대통에 내려선 뒤, 번화한 거리의 인파 속에 소리 소문 없이 섞여들었다. 계연이 앞에서 천천히 걸으면 노인이 그 뒤를 조용히 뒤따랐다.

금갑은 가장 뒤쪽에서 걷고 있었는데, 이때 남색의 직거(*直袪: 옷자락이 직선으로 떨어지는 형태) 장삼을 입고서 머리에는 검은 복두(*幞頭: 옛날에 남자가 쓰던 두건의 일종)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남들보다 좀 더 불그스름한 피부를 지녀, 척 보기만 해도 대단한 무력을 지닌 장사처럼 보였다. 이에 많은 이들이 금갑을 주시했지만, 행여나 그의 화를 살까 봐서 몰래 쳐다보기만 했다.

계연은 주위의 떠들썩한 광경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듯이 보였지만, 실은 주위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그렇게 걷던 계연이 돌연 소매 안에서 금빛 종이를 한 장 꺼내 민현(閔弦)에게 건넸다.

“이것, 당신의 대사형이 쓴 건가요? 아니면 사부가 쓴 건가요?”

노인이 무의식적으로 받아서 그 위의 글자를 읽어보니, 대략적인 내용은 깊은 산속에 사는 요물에게 대통도로 와서 책봉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조월국이 대정국을 상대하는 데에 힘을 보태면, 전쟁에 이긴 뒤 상승하는 국운의 힘을 빌려 그간 쌓은 악업을 씻을 수 있고, 수행에도 큰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데다 그에 더해 신위(神位)를 하나 내주겠다는 조건이었다.

“당연히 제 대…….”

노인이 하던 말을 멈추더니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얼른 계연의 뒤를 따라가 이렇게 물었다.

“계 선생님께서 제 대사형을 어찌 아십니까?”

노인은 자신의 이름과 고충술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만 계연에게 말한 상태였고, 이에 대해 계연도 그를 협박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계연이 사부님에 관해 묻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어찌 대사형을 거론한단 말인가?

계연은 그를 자극하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가볍게 대꾸했다.

“일면식이 있어요. 그의 도행이 꽤 높았으니 그리 놀랍진 않네요. 당신 같은 사제들도 가르쳐낼 정도니까요. 나쁜 짓을 많이 하고 다니긴 하지만, 그를 보니 당신네 사부도 절대 보통 인물이 아니겠군요.”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면 노인은 즉시 반발하며 크게 분노했을 것이나, 상대가 계연인 만큼 노인은 그저 최대한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생께서는 선생의 도(道)가 있고, 사존께서는 사존의 도가 있는 것이지요.”

민현은 이렇게 대답하며 금빛 종이를 다시 계연에게 돌려주었다. 비록 자신의 대사형이 만든 물건이긴 하지만, 지금 이것을 자기가 감히 들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계연은 종이를 받은 뒤 민현을 흘끗 쳐다보고는, 더 말을 잇지 않고 그저 걸음을 서둘렀다. 민현은 칙령에 의해 모든 법력이 봉인된 상태지만, 수백 년간 수련을 닦아온 것은 사실인지라 몸이 노인이라 할지라도 그 체력은 절대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민현은 계연의 걸음을 그리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성안을 한 바퀴 돈 뒤 황궁으로 향했다. 대통도의 규모는 대정국의 경기부보다 작아서, 황궁이 그 토지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찾기도 무척 쉬웠다.

수선자인 계연은 황궁에 들기 위해 굳이 황제의 윤허를 얻을 필요가 없었다. 황궁을 지키는 시위들은 그에게 있어 그저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계연은 민현과 금갑을 데리고 황궁에 들어 궁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외궁에 이르니 수많은 궁녀와 태감, 그리고 나이 든 상궁들이 함께 어딘가로 걷고 있는 게 보였다. 그들 사이로는 두 줄로 늘어선 도홍색(桃紅色) 옷을 입은 여인들이 걷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막 피어난 꽃처럼 화사하게 단장한 채였다.

계연을 비롯한 세 사람은 그렇게 길목에 서서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계연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보였고, 민현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며, 금갑은 조금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참으로 느긋하네.”

계연은 이렇게 중얼거린 뒤 걸음을 옮겨 그들 무리를 따라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황궁 중앙의 대전이었다.

계연은 황제가 수녀(*秀女: 궁중에 뽑혀 들어간 여인들로 황제의 비빈이 되거나 여관(女官)이 되었음)를 뽑는 장면을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두 나라가 한창 교전 중인 이런 때에 수녀를 뽑다니, 계연은 무척 황당하게 느껴졌다.

대전 밖에 다다르자 시위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녀들은 다소곳하게 걸음을 멈추고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녀들의 심장은 튀어나올 것처럼 쿵쿵 뛰고 있었다.

계연은 함께 안에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었지만, 대전 안에서 요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걸 보고는 잠시 그 안의 요마(妖魔)들과 인사할 생각을 뒤로 미뤘다.

“수녀들은 안으로 들라!”

대전 안의 한 나이 든 태감이 황제의 눈짓을 받고는 바깥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수녀들은 안으로 들라 하신다!”

그러자 밖에 서 있던 또 다른 태감이 큰소리로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뒤이어 대전 밖에서 가볍게 움직이는 소리가 계연의 귓가에 들리더니, 수녀들이 궁녀와 태감, 상궁들의 인도 아래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선보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두 줄로 들어선 뒤 허리 굽혀 예를 올렸다.

“황상을 뵈옵니다!”

예를 행한 수녀들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앞으로의 지시를 기다렸다.

용교의(*龍交椅: 황제가 앉는 옥좌) 옆에 서 있던 노태감(老太監)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폐하, 선발 끝에 용안을 뵐 자격을 얻은 20명의 수녀입니다. 자세히 살펴보시지요.”

그러자 용교의 위에 앉은 황제가 미소를 드러내더니, 아래에 늘어선 여인들을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孤)가 볼 수 있게 모두 고개를 들라!”

상궁들에게 신신당부를 받고 수없이 많은 훈련을 거친 수녀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부드러운 웃음에 수줍음이 섞인 얼굴로 황제를 올려다보는 그녀들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흥분이 섞여 있었다.

“좋구나, 아주 좋아! 모두 대단한 미인들이로구나!”

황제는 연신 좋다고 환호하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노태감이 얼른 그를 일깨웠다.

“폐하, 저들에게 각자 자기소개를 하라고 하시지요. 그중에 마음에 드는 이가 있으시거든, 제게 말씀만 하시면 바로 책자에 기록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말씀해주신 이들을 다시 잘 관찰한 후 그중에서…….”

“하하하하, 어찌 소개하는지는 한번 보고 싶구나. 하지만 더 고를 필요 없다. 이 스무 명의 수녀들 모두 각자 매력이 있으니, 고는 전부 뽑겠다! 하하하하, 전부 맞아들여라!”

노태감이 그 말에 멍한 얼굴을 했고, 이는 대전 안에 있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수녀들도 황제의 말에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곧이어 마음속에 환희가 끓어올라 자신들의 치맛자락을 부여잡았다. 앞으로 누릴 부귀영화가 이제 손만 뻗으면 닿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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