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3화. 선구(仙軀)가 먼저인가, 선심(仙心)이 먼저인가
민현의 마음은 여전히 전과 마찬가지였지만, 몸의 반응이 그가 처한 잔혹한 현실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그는, 낭떠러지 아래 펼쳐진 심연을 보고는 한순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좀 더 안쪽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걸음마저도 무척 조심스러웠다. 이곳은 편히 움직일 정도로 면적이 넓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 몸으로는 까딱 잘못했다간 균형을 잃고 저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민현은 자신의 균형 능력을 과대평가한 듯했다. 작은 돌 부스러기를 밟고 그대로 쭉 미끄러진 그는 앞을 향해 철퍼덕 넘어졌다.
“윽…….”
그러다 그는 앞에 있던 금갑의 몸에 퍽 부딪혔다. 깜짝 놀란 그가 금갑을 올려다보자, 금갑은 전방을 향한 고개는 그대로 둔 채 시선만 아래로 내린 채로 민현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는커녕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민현은 왜인지 그것이 소리 없는 조소처럼 느껴졌다.
“민모(某)가 실례했습니다…….”
민현이 한 발짝 물러나 공손히 인사했지만, 금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아무런 말도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계연은 민현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를 조롱하거나 비웃지 않았다.
“당신 사문(*師門: 스승의 문하)에서 다시 당신을 찾아내기는 무척 어려울 거예요. 설령 찾아내 대단한 신통력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당신은 다시는 수행을 닦지 못할 거고요.”
이렇게 말한 계연이 산 아래를 향해 팔을 뻗더니 손가락을 구부렸다. 그러자 봄에 자란 나무의 영기가 느껴지더니 산 아래에서부터 어린잎이 달린 나뭇가지 두 개가 날아올랐다. 그 뒤 나뭇가지는 저절로 껍질이 벗겨지고 모양이 다듬어지더니 윤기가 흐르는 둥근 나무 막대로 변했다.
그때 계연이 손에 든 그림을 펼치자, 나무 막대 두 개가 저절로 위아래에 둘둘 말려 고정되었다. 이로써 그림이 그려진 두루마리가 간단히 표구되자 계연이 천천히 그림을 말았다.
처음의 불안함이 조금 가신 민현은 내내 멍하니 계연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망연함과 미련이 담긴 눈길로, 손을 뻗고 무어라 말하고 싶었으나 결국 그러지 못했다.
원래 민현이 지녔던 부적과 수행에 관련된 물품은 모두 계연이 거둔 후여서, 그는 이제 지팡이 하나조차 없었다.
계연은 돌돌 만 그림을 소매 속으로 넣은 뒤, 넋이 나간 듯한 민현을 향해 말했다.
“이제 가죠. 노인 홀로 이 높은 산에서 내려갈 수는 없으니,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말을 마친 계연이 소매를 흔들자 발아래로 구름이 생겨나더니, 계연은 금갑과 민현을 데리고 천천히 상공으로 떠올랐다. 그러고는 전보다 느린 속도로 동주의 대운부(大蕓府)를 향해 날아갔다.
채 200리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계연이 천천히 구름을 몰았기 때문에, 그들은 약 반 시진 뒤에야 대운부 상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는 민현이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좀 주려는 것이기도 했으나, 여전히 넋이 나간 듯한 그의 모습을 보고 계연은 그가 아직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운부는 동주의 수부(首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동주 안에서 손꼽히는 부성이었다. 대정국 전체로 보면 중간 정도의 규모였으나, 조월국에 놓고 보면 확실히 번영한 고장이었다. 그들이 아직 땅에 채 가까워지기도 전에, 약 백 장(약 300m) 높이의 상공에서부터 이미 떠들썩한 시정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구름은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없이 땅 가까이 내려갔고, 세 사람은 누구의 주의도 끌지 않고 시정 근처의 한 조용한 골목에 나타났다. 이곳에서는 저 멀리에 노점 몇 개가 보일 뿐이었고 행인도 그리 많지 않았다.
구름이 완전히 흩어지자 계연과 민현, 그리고 금갑은 큰길 중심으로 걸어갔다.
날씨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거리에는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추위를 느낀 민현은 나이 들어 쇠약해진 몸이 어떤 것인지 체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잔뜩 말고는 연신 팔을 문질러댔다.
민현은 이때 아주 얇은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무슨 대단한 법포(法袍)도 아니었고 그저 얇은 비단옷일 뿐이라 계연도 굳이 그의 옷을 바꿔 입히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수행을 잃고 강건한 체백도 잃은 후라, 그 나이대의 노인이 된 민현은 이 옷만으로는 추위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민현, 속세에서는 지켜야 할 규칙이 적지 않아요. 수선계처럼 그리 자유롭지 않으니,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이것을 주고 갈게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민현을 향해 한쪽 손을 내밀었다. 이에 민현이 두 손으로 얼른 그것을 받아보니, 그리 크지 않은 은자 몇 덩이와 동전 반 꾸러미였다.
“이 돈은 신중히 쓰세요. 당신을 살려주었으니, 이제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두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후배가……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계연이 자신에게 무슨 희망을 주지는 않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동취(*銅臭: 동전에서 나는 냄새)가 나는 것을 직접 손에 쥐자 그는 이제야 실감이 났다.
“음, 일단 가서 솜옷부터 사 입으세요. 돈을 지니고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해선 안 돼요. 그럼 이만.”
민현은 멍하니 손에 쥔 돈을 바라보고 있다가, 계연의 말을 듣고는 돌연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어 두려움과 혼란함이 밀려왔다.
“계, 계 선생님! 선생님…….”
민현은 무어라 말해 그를 붙잡고 싶었으나, 결국 그를 붙잡을 이유를 찾아낼 수 없었다.
노인은 다급히 뒤쫓았으나 계연과 금갑의 뒷모습은 이미 저 멀리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십여 걸음 정도 뒤쫓다가 하마터면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질 뻔했다. 그가 다시 중심을 잡고 고개를 들어보니, 계연의 모습은 이미 아주 희미해진 후였다.
‘따라잡을 수 없어, 이젠 따라잡을 수 없어…….’
민현은 돈을 쥔 채 거리에 멍하니 섰다. 함께 수행을 닦던 동문, 존경하는 사존, 기이하고 아름다운 수선계, 그 모든 것들이 이제 너무나 요원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다시 찬 바람이 불어오자 그는 강제로 현실로 끌어당겨졌다. 저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어이쿠, 노선생, 어찌 거리에서 홀로 울고 계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곁에서 돌연 목소리가 들려와 민현이 고개를 돌려보니, 농부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어깨에 멜대를 지고 있는 게 보였다. 비록 수행을 모두 잃었지만, 그자의 생김새를 한번 훑어본 민현은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애써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별, 별일 아니오, 늙은이가 홀로 걱정이 많아 그렇소. 별일 아니오, 허허…….”
민현은 이렇게 말하며 불안한 걸음으로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더 이상 계연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반대 방향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곳의 도시도 행인도, 앞으로의 여생도 그에게는 너무나 낯설었다.
“미친 노인네구먼…….”
중년 남자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민현의 뒷모습, 특히 그의 두 손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멜대를 지고 떠나갔다.
계연은 이때 상공에 떠서 민현이 거리를 따라 걷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생 선인(仙人)으로 살던 이가 돌연 선인의 몸을 잃자, 선심(*仙心: 신선의 마음)마저 그토록 빠르게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선구(*仙軀: 신선의 몸)가 먼저인가, 선심(仙心)이 먼저인가?’
모든 신통한 법력이 사라진 민현은 이제 전과 달리 해골 같던 얼굴에도 살이 붙어 더는 그렇게 소름 끼치는 모습이 아니었다.
“스스로 잘 살겠지.”
계연은 나직이 탄식한 후 옆에 있던 금갑과 언제부터인지 금갑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종이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은 어찌 생각하지?”
그 말에 종이학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려 금갑을 쳐다보았고, 금갑도 마찬가지로 눈을 들어 종이학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어느 날 나도 민현처럼 저렇게 법력이 사라지게 되면 어찌 될까 생각이 드는구나. 음, 그때는 그저 보통의 장님일 테니, 살아가기가 쉽지 않겠지. 그저 지금처럼 귀라도 잘 들렸으면 좋겠구나.”
“삐익…….”
종이학이 이렇게 소리를 내더니, 금갑의 머리 위에서 계연의 어깨로 내려와 앉았다.
계연도 이에 별말 없이 종이학을 몇 번 쓰다듬은 뒤, 목적 없이 멍하니 걷는 민현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두 손을 뒷짐 진 채 구름을 몰아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곧이어 민현의 의식 세계와 단로가 담긴 그림을 펼쳐 들었다. 그러고는 다른 손으로 백옥으로 된 천두호를 들어 한입 마시고는 호쾌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신묘한 술법이야, 그림도 좋고! 이 정도 술은 마셔줘야지, 하하하하…….”
민현이 자신의 의식 세계를 펼쳤을 때, 계연은 유몽술과 결합하여 그의 도행을 곧장 거둬간 것이었다. 이는 대단히 신통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신묘한 술법인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한편, 흡족한 계연과 달리 저 멀리 민현의 사문에서는 민현의 존재를 감지할 수가 없어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들은 민현이 죽지 않은 것은 알아냈으나, 구체적으로 무슨 상황에 놓인 건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 * *
날씨가 천천히 따뜻해질 때가 되자, 추운 날씨 때문에 느슨해졌던 전선에 다시 불이 붙었다. 하지만 조월국은 가진 재간이 바닥나 그간의 우세가 꺾이고 있었고, 그와 반대로 대정국은 점점 더 많은 물자와 인력을 전선으로 보내고 있었다.
계연은 이제 전선의 상황에 대해 그리 우려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원래부터 대정국이 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계속해서 ‘반칙’을 하지 않았다면, 그도 직접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동주에서 떠난 계연은 반나절을 날아 다시 조월국으로 돌아갔다. 비록 중간에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긴 했지만, 계연은 원래의 계획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남도현으로 가지 않고, 그곳을 지나 좀 더 북쪽으로 향했다.
그날 밤, 계연은 녹평성 밖 예전의 위씨 장원에 이르렀다. 예전에 위씨 집안에 큰 소동이 일고 그들이 한 짓이 낱낱이 밝혀진 후로, 이곳은 완전히 버려져 이미 황폐해져 있었다. 위씨 일족 중에서 도망친 자는 도망치고, 잡힌 자는 모두 관아에 갇혀 집안의 하인들은 모두 달아난 뒤였다.
게다가 백성들 사이에서는 위씨 장원이 불길한 곳이라며, 귀신도 나오고 요괴도 있다는 소문에 대낮이라 할지라도 아무도 그 근처를 지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밤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에 계연이 이곳에 내려서자, 거대한 장원은 이미 잡초로 뒤덮여 있었고 아무런 화기(火氣)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계연은 남들보다 청력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장원의 전원(前院)에 들어오자 저 안쪽의 기척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귀신도 요괴도 두렵지 않은 계연은 곧장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머리 위에 종이학을 얹은 금갑도 아무런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저택 깊숙이 걸어 들어갈수록 떠들썩한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이제 계연은 저 앞에 등불이 켜진 것까지 볼 수 있었다.
“일이 재미있게 되었구나,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계연이 고개를 돌려 이렇게 묻자, 금갑은 언제나처럼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하지만 주인인 계연이 질문을 던진 만큼 그도 몇 글자 쥐어짜내 대답했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럼 너는?”
“찌직!”
종이학은 이렇게 짧게 울고는 날개를 움직여 전방을 향해 날아갔다.
“됐다, 괜히 물었구나.”
계연은 웃으며 중얼거린 뒤 계속해서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가자, 우리도 구경이나 해보자꾸나. 이제 곧 잔치가 열리려는 듯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