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5화. 호리(胡里)
“아직 대화도 제대로 안 나눠봤는데,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다니!”
계연이 웃으며 이렇게 투덜거리자, 앞에 있던 사람이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흐윽……. 선생님, 아니, 고, 고인(高人), 저는 단 한 번도 천리(天理)를 어기는 일은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집이 통통한 남자는 여전히 계연의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사실 반응이 가장 빠른 여우 중 하나였는데, 그런데도 도망치지 못한 이유는 바로 계연이 한쪽 발로 그의 꼬리를 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연은 그저 단순히 꼬리를 밟고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는 남자의 목숨줄을 밟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통통한 남자는 어째서인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여우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고, 최후의 수단인 방귀를 뀔 수도 없었다.
게다가 몸을 돌려 바닥에 꿇어앉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저 계연을 바라보며 양손을 맞잡은 채 애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을 어떻게 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앉으세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밟고 있던 그의 꼬리를 놓아주고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와 가리켰다.
살집이 통통한 남자는 계연이 꼬리를 놓아주던 순간 즉시 도망치고 싶었으나 결국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는 그가 현명한 판단을 내려서가 아니라, 금갑의 눈빛에 등허리가 빳빳이 굳어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저, 저는 서 있는 게 편합니다…….”
그는 도망갈 엄두는 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감히 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가만히 서서 계연과 거대한 체격의 금갑을 불안한 듯 바라보았다.
이때가 되자, 종이학은 더 이상 창호지 위에 붙어있지 않고, 곧장 구멍 안으로 날아 들어와 계연의 어깨 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무척 대담한 눈길로 여우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 여우는 호운과 비교해 그 실력 차이가 아주 커 보였다.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수는 있었지만, 호운만큼 실력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자 통통한 남자도 마찬가지로 종이학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다시 창가로 시선을 던졌다. 조금 전 들린 사나운 개 짖는 소리에 그는 하마터면 심장이 튀어 나갈 뻔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개는 나타나지 않고 밖에서 종이학이 한 마리 날아 들어오다니?
“위씨 장원에 자리 잡은 지 얼마나 됐죠?”
계연이 별안간 이렇게 물어오자 남자는 저도 모르게 몸을 한번 떨었다. 동시에 그의 모든 신경이 다시 계연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선생께 아룁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석 달도 되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저희는 모든 장원을 차지한 게 아니라, 건물 몇 곳을 빌려 쓴 것뿐입니다. 이곳 주인인 위씨들은 아무도 남지 않았으니, 저희가 강제로 점거한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남자는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것으로 보였다. 이를 보니 조금 전에 도망친 여우들보다는 수행한 세월이 좀 더 긴 듯했다.
그 말에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쯤 남은 닭고기를 입으로 밀어 넣었다. 입안에서 뼈를 발라낸 계연은 그것을 식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식탁 위를 다시 한번 살펴보니, 거의 모든 음식이 엉망이 되어 제대로 남아있는 게 없다시피 했다. 심지어 여우들이 다급히 도망치는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져 발로 밟힌 것들도 있었다. 그는 그나마 온전한 떡 몇 개를 집어 들었다.
“환술로 모습을 바꾸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또 있나요?”
계연은 이 여우들의 도행이 아주 낮은 수준인 것을 알아보았다. 이들은 사람의 모습을 갖출 수는 있었지만, 그저 껍데기에 사람의 옷을 입어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아, 선생께 아룁니다. 밤중에 사람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것 말고도, 사람들의 정신이 약해져 있을 때 그자를 미혹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여 종의 약초를 알아보고 찾아낼 수 있으며, 뿌리가 상하지 않게 파낼 수도 있습니다. 참, 쥐와 꿩도 잡을 수 있고, 나무도 탈 수 있고, 헤엄도 칠 수 있고…….”
그 말에 떡을 베어 물던 계연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대단한 능력들이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제대로 가르쳐 주는 이가 없는 이상, 대부분의 요괴는 모두 스스로에 기대 수행을 닦아야 했다. 예전에 호운이 환술을 써 사람으로 변하지도 못했던 때와 비교해도, 도행으로만 보자면 호운이 이 여우들보다 훨씬 높았다.
통통한 남자가 계속해서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을 나열하자 계연이 얼른 그의 말을 끊고 물었다.
“아하, 대단하네요. 할 줄 아는 게 꽤 많군요. 그럼 이 식탁 위의 요리와 술은 어디서 가져온 거죠? 돈을 내고 사 온 건 아닐 테고요?”
계연은 손에 들고 있던 떡 세 점을 다 먹은 뒤, 손바닥에 남은 가루를 몽땅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식탁 위를 살펴보니, 누군가 베어먹거나 밟지 않은 음식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내려 보니, 식탁 아래 엎어진 접시가 하나 보였다. 접시의 깨진 틈 사이로 아래의 다과가 보였다.
그러자 계연은 기쁜 듯 웃으며 허리를 숙여 접시를 치우고는, 모양이 그나마 온전하거나 산산이 부서진 다과들을 모두 집어 들었다. 여우들에게 밟히거나 한입 베어 먹힌 것들에 비하면, 땅에 떨어진 쪽이 훨씬 나았다. 그는 다과 위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후후 불고는 입에 넣었다.
“아, 이건, 저희가 따로 지닌 재물이 없어서…… 어떤 것들은, 사실, 사실 떳떳한 경로로 얻어온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희는 어디서 누구의 것을 가져온 건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나중에 반드시 보상할 겁니다!”
그러자 계연은 “아.” 하고 대답하더니, 마지막 남은 떡 한 점을 끝내고는 다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이름이 뭐죠?”
“아, 제가 스스로 지은 이름인데, 호리(胡里)라 합니다.”
너무나 솔직한 이름(호리(胡里)와 중국어로 여우를 뜻하는 호리(狐狸)는 발음이 같음)에 계연은 또다시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러다 다시 시선을 돌려 뒷문 쪽을 바라보았다.
“왈왈왈!”
그때, 어깨 위에 있던 종이학이 다시 개처럼 맹렬히 짖기 시작했다. 그러자 뒷문 바깥에서 놀라 허둥지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아까 도망친 여우 중 몰래 돌아와 있던 몇몇이 낸 기척이었다. 그들은 바깥에서 기척을 숨기고 이쪽을 관찰하다가, 갑자기 종이학이 다시 개 짖는 소리를 내자 다시 후다닥 도망간 것이었다.
종이학은 자신이 낸 소리가 다시 큰 위력을 발휘하자 기분이 좋아져 세 치(약 9cm) 높이로 떠올라 날개를 퍼덕이다가 다시 계연의 어깨 위에 앉았다.
바로 지척에 있던 호리도 그 소리에 놀라 몸을 퍼뜩 떨었지만, 곧이어 이 소리가 눈앞의 종이학이 낸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만, 저들을 놀라게 하지 말렴.”
계연은 어깨에 앉은 종이학을 두어 번 다독이더니, 옷차림을 정돈하고는 다리를 꼰 채 웃으며 물었다.
“원래는 어디에서 수행을 닦았나요? 영지를 얻은 동족은 얼마나 되고요?”
호리는 원래 자신이 어느 대단한 살풀이 법사를 만난 것이라 여기고 있었고, 금갑은 계연의 제자나 시종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종이학을 보고서, 특히나 종이학의 영성(靈性)을 보고서는 계연이 보통의 고인(高人)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선생께 아룁니다, 저희는 원래 옥림산에서 수행하던 여우들로, 함께 모여 달과 해의 정화(精華)를 토납(*吐納: 입으로 묵은 기운을 내뿜고 코로 새 기운을 들이마시는 수행법)하며, 영기를 흡수하고, 서로를 도우며 수행해 왔습니다. 영지를 얻은 여우는 모두 27마리로, 조금 전까지 모두 여기에 모여 있던 이들입니다…….”
호리는 아직 경계심이 남아 있었기에, 사실 영지를 깨우친 여우는 모두 32마리였으나, 여기에 있던 이들은 27마리뿐이었으므로 정확히 그 숫자만 말했다.
“오, 수가 적지 않군요!”
계연은 호리의 말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었으나, 이 정도 일은 진위를 가려내는 게 별로 의미가 없었다.
“하하, 그렇습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바깥이 더 살기 편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저희 몇몇이 먼저 나와 자리를 잡은 뒤 다른 여우들을 불러온 것입니다. 사람을 관찰하며 많이 배울 수 있고, 수행에도 도움이 되는 데다 마침 위씨 장원처럼 적당한 곳도 찾아냈으니까요. 아, 참, 장원의 주인이었던 위씨들은 절대 저희가 해친 것이 아닙니다. 선생께서 성안에 가셔서 물으시면 금방 알 것입니다. 이들이 당한 일은 모두 자업자득이었습니다!”
“알고 있어요.”
계연은 담담한 얼굴로 호리를 보다가 돌연 이렇게 말했다.
“실은 계모가 당신들에게 한 가지 커다란 행운을 줄 수 있을 듯한데, 그저 당신들이 이 기회를 잡을 만한 용기가 있는지, 또 그걸 잘 견지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행운?’
호리는 마음이 움직여, 조심스럽게 한 발짝 다가간 뒤 허리를 굽힌 채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선생님, 좀 더 쉽게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행운을 일컫는 것인지요? 만약 조정의 대군에 합류하여 싸우는 일이라면 저희는 못 합니다. 그곳은 살기가 넘치는 곳이라, 자칫 잘못하면 칼에 베여 죽게 될 테니까요…….”
“아니, 그런 일은 아니에요. 양국 사이의 전쟁은 이미 결과가 거의 판가름 난 상태고, 설령 변수가 있다고 해도 당신들까지 나설 필요는 없을 거예요. 계모는 그저 당신들이 같은 여우족인 만큼, 동족에게 접근하기가 쉬울 거라고 생각해서 도움을 좀 청하려는 거고요.”
“도움이요?”
호리가 의혹에 찬 얼굴로 계연을 바라보았다.
“네, 도움이요, 어쩌면 작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눈치 빠르게 행동하면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거고요. 저를 도와준다면, 당신들에게 한 가지 행운을 선물하죠. 일단 미리 조금 보여줄게요.”
“선생님, 저희의 도움을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정말로 제가 원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저희의 도행이 너무 낮아 돕지 못할까 봐 그렇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야 저도 결정을 내릴 수 있으니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호리의 어조에는 신중함에 더해 얼마간의 의심이 느껴졌다.
“아, 간단하게 말하면, 저를 도와 어느 여우 요괴를 찾아내는 일이에요. 그들의 도행은 당신들보다 훨씬 높아서, 환술이 아니라 진짜로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할 수도 있을 정도죠.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들은 저를 두려워해서, 지금 저를 피해 멀리 숨어 있는 상태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저를 좀 도와서 그자를 찾아내 주길 바라는 거예요.”
‘어느 여우를 찾아달라?’
“그, 그럼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행운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계연이 가만히 웃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놀란 호리가 뒤로 두 발짝 물러났다.
“놀라지 마세요. 당신이 한번 체험해 볼 수 있게 하려는 것뿐이에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호리의 이마 위에 손가락을 하나 갖다 대었다. 그러자 희미한 법광(法光) 한 갈래가 계연의 손가락을 따라 호리의 이마로 빨려 들어갔다. 뒤이어 왕성하게 움직이는 법력이 이마를 통해 호리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호리는 전에 없던 감각이 온몸에 피어나는 걸 느꼈다. 그의 관절과 근육이 빠른 속도로 변화하더니, 살짝 등이 굽고 통통하던 몸이 어느새 준수하고 말쑥한 모습으로 변했다. 엉덩이에 달린 꼬리도 점점 짧아지더니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에 더해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 듯한 법력도 느껴졌고, 몸 안에 쌓인 영기도 아주 활력 있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