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6화. 강물 위의 글씨
여우들이 모두 도망친 뒤, 밖으로 뛰쳐나온 무인들은 하나같이 분에 찬 표정이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구린내가 너무 지독했던 모양인지, 그들은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고 호흡이 곤란한 상태였다.
몇 분 뒤, 철온은 다시 수하들을 이끌고 경공을 펼쳐 주위 높은 데로 뛰어올라 여우들의 위치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여우들의 종적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대인, 아무래도 전부 도망친 것 같습니다!”
“어떡할까요?”
잔뜩 구겨진 얼굴을 한 철온의 주먹에서 마찰음이 났다.
“우리의 무공이 아무리 높아도, 상대가 요괴이니 결국 당하고 말았구나! 어쨌든 여기 오래 머물 순 없으니, 내부를 한 번만 더 살펴보고 우리도 어서 자리를 뜨자.”
“예!”
그들은 다시 옥상을 뛰어넘으며 조금 전 여우들의 잔치가 열렸던 곳으로 돌아갔다. 실내에 쓰러졌던 세 사람은 동료들에 의해 바깥으로 끌려 나왔으나 여전히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저들은 상태가 어떻소?”
철온은 바닥에 쓰러진 세 사람을 살펴보다가, 그들의 가슴께가 부풀어 오르는 걸 보니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의 물음에 내내 이곳을 지키고 있던 강통이 즉시 대답했다.
“큰 상처는 없습니다, 그저 냄새가 너무 강해 혼절한 것뿐입니다. 게다가 정신을 잃은 뒤로 냄새를 많이 맡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깨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맥박이 평온하고 호흡이 일정하니 큰일은 없을 것입니다.”
“음…….”
철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수하들을 둘러보았다. 그중에 큰 상처를 입은 이는 단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한 명은 다리에, 다른 한 명은 손에 각각 물린 상처가 있었다. 상처가 깊어 뼈가 보일 정도였으니 이는 여우가 아닌 그 커다란 검은 개에게 물린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다행히 이 정도 상처는 관부의 고수들에게 있어 찰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근육도 그대로고 뼈도 다치지 않았으니, 약을 좀 바르고 쉬면 전투력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그 개 요괴는?”
“아마 그 여우들과 함께 도망친 듯싶습니다.”
그러자 고개를 돌려 잔치가 벌어지던 건물 안쪽을 바라보던 철온이 깊이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휴우, 무자천서에서 딱 한 발짝 거리였는데! 만약 그 책을 손에 넣어 황상께 바쳤다면, 승진은 따놓은 당상이었을 텐데. 에잇, 아까워라!”
철온의 어조에서는 깊은 실망감과 불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는 사실 말로 하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황상께 바치기 전에 자기가 천서를 몰래 살펴볼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어느 신선과 기연이 닿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기회는 이미 날아갔으니, 철온을 비롯한 고수들은 마음속의 불만을 억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강 공자, 오늘 밤에 비록 작은 소동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회동은 다행히 성공적이었소. 이곳은 오래 머무르기 적당하지 않으니, 어서 떠납시다.”
강통은 개에 물린 대정국의 밀정 두 명과 냄새를 맡고 쓰러진 고수 세 사람을 보더니 작은 소리로 이렇게 건의했다.
“몇몇 대인께서 거동이 불편하신 듯한데, 저희 강씨 집안의 저택에서 잠시 머물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상처가 조금 아물면 다시 떠나시지요.”
“허허, 괜찮소. 남은 이들이 저들을 데리고 가면 되니. 강 공자와 강씨 일가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정말로 별일이 아니어서 그렇소. 이곳에 오기 전에 우리 모두 단단히 각오했다오. 참, 도성에 돌아가면 오늘 밤 회동을 황상께 보고할 테니, 후에 강 공자께서는 반드시 우리 조정의 귀인이 되실 것이오. 부디 황상께서 우리의 노력을 아실 수 있도록 공자께서 후에 서명을 남겨 증명해 주시길 바라오.”
철온의 이 말은 자신의 공적을 증명하기 위한 말과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말에 강통은 기뻐했다.
“예, 예, 반드시 철 대인께서 노력하신 것을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철온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강통을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강 공자, 그럼 후에 또 뵙겠소이다!”
“여러 대인분들, 조심히 가십시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서로를 향해 예를 행한 뒤, 철온은 냄새를 맡고 쓰러진 세 사람을 각자 등에 업으라고 명한 다음 위씨 장원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장원 안에는 이제 강통의 사람들만이 남았다.
한참 뒤, 강통의 곁에 있던 어느 고수가 낮은 소리가 물었다.
“공자, 저들이 갔으니 우리도 이만 떠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강통이 고개를 끄덕인 뒤, 주의 깊게 주위 건물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장원이 이렇게 넓으니, 어쩌면 여우들이 그리 멀리 도망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여기에 숨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다들 어찌 생각하느냐?”
“예, 그럴 수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전부 요괴인데, 철 대인의 수하들 없이 저희가 단독으로 상대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집안 고수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낀 강통은 곧장 생각을 바꾸었다.
“네 말이 옳다. 하마터면 욕심에 눈이 멀어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할 뻔했구나. 군자는 위험한 담벼락 아래 서 있지 않는다(君子不立危墻之下: <맹자(孟子)>에 나오는 구절) 했지. 일단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보자!”
잠시 후, 강통의 일행도 위씨 장원을 떠나자, 거대한 장원이 한순간에 다시 고요해졌다. 떠들썩하던 잔치도, 시끌벅적하던 여우들과 개도, 밀정들도 사라졌다.
계연은 여전히 버드나무 위에 비스듬히 누워, 계속해서 천두호에 들어있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하늘에 뜬 별을 바라보던 계연이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커다란 검은 개 한 마리가 이곳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 앞에서는 작은 종이학이 길을 이끌고 있었다.
검은 개가 비틀대며 걸어오는 걸 보니, 조금 전에 당했던 방귀 공격에서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하하하……. 냄새가 아주 지독하지?”
여우나 족제비들이 요물이 된 경우에, 그리 고상하다고 할 수는 없는 특수한 비장의 기술을 배운다. 그게 바로 ‘방귀 뀌기’였다.
수행자 대부분이 보기에 이는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운 것이었고, 또한 그 냄새에 당하지 않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상대가 미처 방비하지 못한 틈에 쓰기에는 딱 좋은 기술이었다. 특히나 도행이 약한 요물들이 자기보다 힘이 센 평범한 사람을 만났을 때 아주 유용했다.
개보다 후각이 뛰어난 계연은 당연히 그 구린내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냄새를 비롯한 악취 대부분을 견뎌낼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굳이 그걸 시험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듯한 계연의 어조에 검은 개는 잔뜩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금 전에 그 냄새를 맡고 하마터면 혼이 다 빠져나가는 줄 알았다.
“우우…….”
“하하하하, 알겠다, 알겠어. 내가 술을 좀 주마. 이 술은 저 잔치 자리에서 맛본 것보다 훨씬 좋은 술이야. 입 벌려보렴.”
계연이 웃으며 천두호를 아래로 기울이자 기다란 액체가 졸졸 흘러나왔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이 피폐해 보이던 검은 개가 쏜살같이 버드나무 아래로 뛰어왔다. 그러더니 입을 쩍 벌리고는 한 방울도 남김없이 술을 받아먹었다.
“꿀꺽, 꿀꺽…….”
콧잔등을 약간 찡그리고 두 눈을 살포시 감은 모습이 술맛을 음미하고 있는 듯했다.
“우우-!”
계연이 다시 술병을 들어 올리자 검은 개가 머리를 흔들며 매우 흡족한 듯한 소리를 냈다.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너 정말 술고래구나!”
이 검은 개는 비범한 영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직 그리 대단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계연이 방금 흘려보낸 술에는 용연향이 약간 섞여 있었는데, 검은 개는 그걸 마신 뒤에도 곧장 쓰러지지 않았다.
검은 개는 후각이 뛰어났으므로 그간 술 냄새를 자주 맡아봤지만, 그렇다고 직접 마셔본 적은 없었고 마시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술을 마셔보니 도통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견생의 참맛을 오늘 발견한 듯했다.
검은 개는 버드나무 아래에서 비틀대다가 결국 완전히 술에 취해 나무 밑동에 부딪혔다. 그러고는 자기가 무슨 고양이라고 생각했는지, 네발로 나무 위를 기어오르려다 애꿎은 나무껍질만 잔뜩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비틀거리던 검은 개는 곧 풀썩 쓰러지더니, 하늘을 향해 배를 발라당 드러낸 채 사지를 뻗고 잠들었다.
“개가 이런 자세로 잘 수도 있다니, 오늘 처음 알았네…….”
계연은 웃으며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강물로 시선을 돌렸다.
우패천의 존재와 그간 보고 느낀 것으로 인해, 계연은 검은 개에게 꽤 호감을 품고 있었다. 사실 검은 개 자체가 무척 재미있기도 했다. 이왕 자신의 마음에 들고 심성도 괜찮으니, 그는 검은 개를 한번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계연은 곧 낭호필을 꺼내 자신의 정신을 먹물 삼고 강물을 종이 삼아 한 글자씩 글자를 써 내려갔다. 가볍게 일렁이는 물결 위로 글자들도 이리저리 움직였다.
위씨 장원 주위는 이미 조용해졌으나 그렇다고 완전히 침묵에 잠긴 건 아니었다. 가끔씩 개구리 소리와 밤새가 우는 소리가 들려와 적막한 밤에 고요함을 더했다.
잠시 뒤, 붓을 거둔 계연은 술병을 든 채 하늘에 뜬 별을 올려다보다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곧이어 그의 호흡도 깊고 규칙적으로 변했다.
반 시진 뒤, 버드나무 주위를 둘러싼 글자들이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중 한 글자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르신께서는 주무시는 걸까?”
“글쎄…….”
“분명 주무시는 걸 거야.”
“조금 전에 강물에 쓰신 게 뭐지?”
“나는 제대로 못 봤어.”
“이 개는 자기가 운수대통했다는 걸 알까?”
“아마 모를걸!”
“나는 알 거라고 봐!”
“참, 종이학아, 너 방귀 냄새 맡을 수 있어?”
“짹짹…….”
“저들 상태를 보아하니 우린 시도해보지 않는 게 좋겠어.”
“나도 동의해!”
“쉬이…… 다들 조용히 좀 해…….”
* * *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는 시각, 마침내 검은 개가 잠에서 깨어났다. 개가 혼곤한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들어 버드나무 위를 올려다보자, 그 위에서 잠을 자던 선생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우우- 우우- 월월! 월월월!”
위씨 장원의 강변에 개 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거대한 장원은 예전 모습 그대로 황폐하고 공허했으며 그 누구도 화답하지 않았다. 그저 강변에서 벌레를 잡던 새들을 놀라게 했을 뿐이었다.
몇 번 짖던 검은 개는 약간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개는 목이 마른 것을 느끼고, 강변으로 다가가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물을 다 마시고 무심결에 수면을 바라본 검은 개는 깜짝 놀라 뒤로 크게 물러났다. 물을 마시던 곳이 일렁이며 글자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글자와 함께 계연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술 마시는 게 좋으냐? 그럼 부지런히 수행을 닦아라. 세간의 유명한 술은 모두 속세의 장인이 빚거나 수행자들이 빚어내는 거란다. 술을 빚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마음을 닦는 것이고, 술을 마시는 것도 그렇지. 수행에 정진하고 정도(正道)를 따르면, 좋은 술을 찾아내 마시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계연의 말이 끝나자 수면 위의 파문도 점차 가라앉더니, 마침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계연은 일찍이 신의(*神意: 신묘한 뜻)를 바람이나 구름, 혹은 자연의 변화에 남길 수 있는지 연구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렇게 자연에 조화를 부리는 건 확실히 남다른 풍취가 있었다.
계연의 말을 들은 검은 개는 멍하니 강물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조금 전에 자신이 들은 간단한 몇 마디에는 무언가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