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화. 선택의 기회
공포, 불안, 혼란, 막연함…… 그리고 마음 깊은 곳의 희미한 흥분감.
호리는 32마리의 여우들을 이끌고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서남쪽으로 도망쳤다. 대정국의 밀정들이 위씨 장원 안팎으로 여우들을 수색하는 동안, 여우들은 검광(劍光)에 맞닥뜨린 후부터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도망치는 중이었다.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쯤 여우들은 이미 어느 황무지에 와 있었고, 등 뒤로는 녹평성이 보이지 않은 지 오래였다.
“큰할아버지, 헉…… 허억……. 할아버지, 저 너무 힘들어요…….”
등에 칼에 베인 상처가 있는 작은 여우 한 마리가 호리의 곁으로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여우들도 모두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들의 털을 적시고 있었다.
호리 자신도 내내 다리를 절면서 고통을 참으며 도망쳐왔다. 그는 무공 고수들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들 같은 약소한 요괴들은 감히 고수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따라 잡히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계속 가야 한다, 멈추면 안 돼, 잡히면 죽음뿐이야. 지체하면 안 돼! 어서!”
호리를 비롯한 몇몇 나이가 있는 여우들은 어젯밤 그 위험했던 상황에서 어느 여우도 치명상을 입지 않은 이유가, 첫째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의외의 공격이 효력을 발휘한 데다 둘째로는 계 선생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이제 더는 계 선생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선생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낼 수도 없을 것이고, 앞으로의 모든 것은 자신들에게 달려 있었다.
이때 호리의 마음속에서 치민 흥분은 점차 공포와 불안을 잠재워 갔다. 도망치는 내내 호리는 계속해서 입에 물고 있는 서책에 온 신경이 쏠리던 참이었다.
장인이 일을 잘 해내려면, 반드시 그 연장을 먼저 날카롭게 손질해야 한다(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 <논어(論語)>에 나오는 구절)는 말처럼, 계 선생님께서 자신들에게 이 서책을 남겨주신 걸 보니, 이 서책은 틀림없이 자신들이 수행을 닦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다.
‘이 책을 잘 보관해서 열심히 수행해야 해!’
여우들은 쉬지 않고 이틀 밤낮을 도망쳐, 더는 지쳐 움직일 수 없을 때가 된 후에야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휴식을 취했다.
그곳은 어느 산자락 근처의 작은 계곡이었는데, 32마리의 여우들은 그 계곡을 보자마자 다급히 달려갔다.
한동안 여우들이 꿀꺽거리는 소리만이 계곡 근처에 맴돌았다. 실컷 물을 마신 여우들은 계곡 근처에 자리 잡고서 상처를 핥기 시작했다.
“설마 지금까지 우리를 쫓아오고 있진 않겠지?”
“그럴 리 없어.”
“맞아, 이틀 내내 쉬지 않고 뛰어왔으니…….”
“나중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다니 어디로? 위씨 집안의 장원으로는 더 이상 갈 수 없어…….”
“그럼 소류산(小柳山)에는?”
“글쎄…….”
호리가 <운중유몽>을 옆에 내려놓고 다친 앞발을 움직여보았다. 몸에 남아있던 희박한 영기는 이틀 동안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지금은 조금 아프기만 할 뿐 움직이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모두 상처는 좀 어떻지?”
“조금 아픈 것 말고는 괜찮습니다!”
“저도요.”
“저는 털이 한 움큼 뜯겨 나갔어요. 아픈 데다가 아주 볼품없어 보인다고요…….”
“곧 자랄 테니 걱정하지 마라.”
호리의 말에 다른 여우들도 찬성을 표했다.
여우들이 모두 낙담한 듯이 보이자, 호리가 웃으며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하지만 호리는 수행이 얕은 데다 따로 걸칠 만한 옷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간단한 베옷을 입은 모습으로 변하는 게 고작이었다.
“모두 너무 낙담할 필요 없다. 비록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리긴 했지만, 위씨 장원에서 이 선법이 담긴 서책을 손에 넣었으니 말이야. 이건 아무나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맞아, 우리에겐 천서가 있어!”
“어서 펼쳐 보죠!”
“위씨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는 책은 무자천서라던데, 우리는 요괴인데 글씨도 안 보이는 책을 어떻게 읽지?”
“전에 이 책은 빛나기도 했고 공중에 글자도 떠올랐었어!”
“모두 와서 함께 보지!”
호리가 좌우로 손짓하며 여우들을 불러 모으자, 여우들도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는 호리의 주위를 둥글게 감쌌다.
가운데 앉은 호리가 성인을 대하는 듯한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운중유몽>을 펼쳤다. 처음 서책을 펼치자 그 안에는 텅 빈 종이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 언제 그랬냐는 듯 종이 위로 글자가 나타났다.
서책은 잔치 자리에서처럼 빛나지도 않았고, 종이 위에 나타난 글자들도 아무런 특이점이 없어서 마치 시정에서 파는 보통의 서적처럼 보였다. 하지만 중평휴가 쓴 <운중유몽> 원문의 행간 사이에는 깨알처럼 작은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이 큰 글자들은 모두 어떤 풍경을 묘사하는 듯한데, 잘 이해가 가지 않네…….”
“쉿, 작은 글자들을 읽어 봐. 그게 바로 핵심이야!”
여우들은 곧이어 정신없이 서책에 빠져들었다. 작은 글자들은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했는데 주로 <운중유몽>의 내용에 대한 주석과 설명뿐만 아니라, 뛰어난 산수(山水)를 묘사한 내용, 영기(靈氣)와 오행(五行)에 대한 설명도 있어 천지자연의 이치에 대한 가르침이 담겨 있었다.
“이 그림, 정말 사실적이네. 높은 산봉우리와 둥근 달…….”
이렇게 중얼거리던 한 작은 여우는 자신이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자 고개를 급히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니,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주위에는 아무도 없이 자기 혼자뿐이었다.
휘이이…… 휘이이…….
차가운 바람이 한바탕 불어닥치자 여우의 털이 바람결에 따라 스르륵 흔들렸다. 이에 경악한 여우가 얼른 주위를 두리번거려보니,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어느 산봉우리의 정상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다들 어디 갔지? 할아버지, 둘째 고모, 어디 계세요?”
산골짜기에 여우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어디 계세요…… 계세요…… 계세요…….”
작은 여우가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에는 밝은 달이 걸려 있었고, 그 주위의 별빛은 어두웠다. 그러다 자세히 바라보니 자신이 선 곳에서부터 달이 무척이나 가깝게 떠 있는 듯했다. 마치 앞발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 * *
그 시각, 호리가 놀라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의 여우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자신 홀로 끝없이 하얀 어느 곳에 앉아 <운중유몽>을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호리가 아무리 멀리 시선을 던져봐도 대지는 보이지 않고 끝없이 아득하기만 했다. 다음 순간, 무언가 알아차린 호리가 살짝 시선을 내려보니, 어느새 자신은 넓은 흰 구름 위에 앉아있었다.
게다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주위에 표표히 스쳐 지나가는 구름 등이 너무나 선명했다.
‘내가 이렇게 높은 하늘에 떠 있다니, 여기서 떨어지면 그야말로 뼈가 가루가 될 것이다.’
호리는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으나 어째서인지 구름의 고도를 낮출 수가 없었다.
“여기는 하늘인가? 나밖에 없다니……. 설마 내가 환각을 보는 건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돌연 계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란 호리가 얼른 고개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계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선생님……!”
호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구름에서 떨어질까 봐 크게 움직이지는 못하고 그저 주위를 향해 이렇게 소리치기만 했다.
“책을 보세요.”
다시 계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호리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든 서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종이 위로 ‘책을 보세요’라는 문장이 떠올라 있었다.
‘목소리가 아니야! 그저 글자라고?’
다시 자세히 생각해보니, 조금 전에 자신은 귀로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은 게 아니라 그것을 ‘느낀’ 것 같았다.
“선생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는 계 선생님의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으나, 막상 그 일이 닥치자 천서를 얻은 기쁨으로도 황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계모(某)는 물론 여러분이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라고 있지만, 어떤 일들은 저로서도 강요할 수가 없는 일이에요. 그러니 선택의 기회를 드리려 합니다…….”
글자는 여기서 잠시 멈추더니, 다시 새로운 글자가 펼쳐졌다.
“일전에 도움을 구했을 때는 여러분 모두 승낙했지만, 그 말이 모두 진실이었다고는 할 수 없어요. 제게 거짓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저는 여러분이 이 일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해요. 또한 어떤 위험이 있는지도 아직 알지 못하고요. 대정국의 밀정들과 마주친 일도,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일깨워주기 위해서예요.”
글은 계속 이어졌다.
“여러분이 보는 책 속의 풍경은 서로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어요. 그건 각자가 지닌 마음의 상태와 바라는 것에 따라 다르거든요.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이 마음으로 바라는 것과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서로 이어져 있어요. 그 길은 자연히 펼쳐질 거고요…….
무슨 선택을 내리든, 한번 이어진 인연인 만큼 이것은 계모가 여러분께 주는 선물로 치세요. 원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든, 다른 곳으로 가서 수행을 닦든 계모는 여러분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호리 당신도 떠나고 싶거든, 저를 돕길 원하는 여우에게 <운중유몽>을 넘겨주세요.”
호리는 계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록 그들에게 처음 이 일을 꺼낼 때도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었지만, 지금은 또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이에 호리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렇게 물었다.
“만, 만약에 모두 떠나고 싶다고 하면 어쩌죠…….”
호리는 무척 초조했지만, 계연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물으면서도 그리 두렵지는 않았다. 그는 계 선생님께서도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마음속의 우려를 솔직히 내보이는 편을 더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한동안 잠잠하던 종이 위로 다시 글자들이 떠올랐다.
“그럼 <운중유몽>을 땅에 내려놓고, 가고 싶은 곳으로 가시면 돼요.”
“하, 하지만 이런 천서를…… 이렇게 놓고 가면, 혹시,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쩌지요? 비바람에 젖기라도 하면, 이런 귀중한 물건을…….”
“<운중유몽>은 알아서 제게 돌아올 거예요. 자, 전할 말은 모두 전했으니, 구름 위에 앉아 천천히 깨달음을 구하도록 하세요. 시간이 모두 지난 후에 아무런 가르침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면 아까우니까요.”
“선, 선생님?”
호리가 작은 소리로 몇 번 계연을 불렀으나, 손에 든 서책은 더 이상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그는 천천히 주위의 풍경에 주의를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