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화. 각자 품은 뜻이 다른 여우들
여우들이 모두 깨어났을 때, 그들은 그동안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여우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는 하늘이 어느새 어두워진 것을 발견했고, 뒤이어 다른 여우들이 계곡 근처에 조각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모든 여우가 깨어났을 때는 다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깨어난 호리는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더니, 자신을 둘러싸고 앉은 여우들에게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아마 하루가 지난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느껴집니다.”
“음, 그런 것 같구나.”
“큰할아버지, 저는 높은 산봉우리에 서서 밝은 달을 보았어요.”
“저는 꽃밭에서 이리저리 뛰어놀았어요!”
“나도, 나도! 저는 사람으로 변해서 부인을 얻었습니다!”
“뭐? 부인을 얻었다고? 사람, 아니면 여우?”
“당연히 여우지. 사람은 털도 없고 너무 못생겼잖아. 어떻게 같이 살겠어?”
“하긴.”
“맞는 말이야.”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무엇을 보셨어요?”
이때 호리의 얼굴에는 별다른 흥분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숨을 한번 고른 뒤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힐 뿐이었다. 그런 뒤, 무릎 위의 서책을 덮고서 여우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이 <운중유몽>을 들고서 이곳을 떠나 멀리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만약 멀리 떠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대정국 조정에 수배되어 붙잡힐 것이다.”
“하, 하지만 여기는 조월국이잖습니까.”
어느 여우가 이렇게 말하자 호리가 고개를 저었다.
“조월국은 가망이 없어, 여기서 멀리 달아날수록 좋다. 물론, 함께 가고 싶지 않은 이들은 다시 산으로 돌아가도 좋다. 다시 돌아가도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어제 본 풍경을 떠올리며 열심히 수행을 닦고, 그저…….”
호리는 책 속에서 본 풍경을 떠올리며, 잠시 망설이다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저 분수만 잘 지키면 된다. 최소한 시작점은 다른 요괴들보다 높으니, 수행만 잘 닦으면 그리 위험하지 않겠지.”
그는 이런 방식으로 완곡하게 여우들에게 떠나길 권했다. 그의 말을 들은 여우들도 곧장 말뜻을 알아듣고는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 그러지 말고 다 함께…….”
어느 여우가 호리의 품속에 있는 <운중유몽>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호리가 즉시 호통쳤다.
“안 된다! 이 일은 아직은 선택의 여지가 있어. 하지만 일단 이 숲을 벗어나면, 우리가 향하는 방향이 앞으로의 길이 될 것이다. 그때 가서 후회했다간 되돌릴 수 없는 재앙을 불러올 거야.”
호리는 어떤 뒷감당을 져야 할 거란 건 알았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었다. ‘되돌릴 수 없는 재앙’이라는 건 그가 그저 지어낸 말이었지만, 이는 여우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혹시 책 속의 풍경을 보지 못한 자가 있는가?”
호리가 이렇게 묻자, 여우들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볼 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호리는 모든 여우에게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다행히 모두 수행에 소질이 있어 책 속의 풍경을 보았다니, 이는 우리 모두 가르침을 얻었다는 뜻이겠지. 나는 계속해서 서북쪽으로 갈 것이고, 나중에 다시 소류산으로 돌아갈지 말지는 알 수 없다. 만약 함께 가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나를 따라오고, 원하지 않는다면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 하면 좀 더 평안할 수도 있겠지.”
말을 마친 호리는 책을 품속에 넣고서, 가부좌를 튼 자세로 가만히 앉아 반 시진 동안 주위의 영기를 흡수했다.
그동안 여우들은 서로 소곤소곤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차분히 상의하는 이들도 있고 말싸움을 벌이는 이들도 있었으며, 흥분 어린 표정을 한 여우도 있고 고심에 찬 표정을 짓는 여우도 있었다. 호리는 다른 31마리의 여우들이 하는 말을 모두 듣고 있었지만, 마음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호리는 고심을 한 끝에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다른 여우들의 대화를 그저 풍경 감상하듯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모든 여우 중에서는 호리의 사명감이 가장 강했고, 또한 그는 이미 결단을 내려 모든 것을 달관한 상태였다.
반 시진 뒤, 다시 눈을 뜬 호리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환술을 거두고는, 회색 털의 여우가 되어 곧장 서북쪽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호리 형님!”
“백부님!”
“기다려주세요!”
여우들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호리는 이미 멀리 사라진 뒤였다. 그러자 여우들은 모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곧장 호리를 따라 뛰기 시작한 몇몇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망설이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대부분이 호리가 떠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호리를 뒤쫓아간 여우 중에서는 처음과 달리 갈수록 속도를 늦추는 이들도 있었고, 그와 반대로 처음에는 천천히 쫓아가다가 속도를 높이는 이들도 있었다.
어느새 태양은 이미 높이 떠올라 있었고, 호리는 홀로 산자락을 빠져나왔다. 그의 뒤로는 벌써 여우 몇 마리가 뛰어오고 있었다. 호리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또 다른 한 무리의 여우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로도 몇몇이 나타났다.
호리가 다시 수백 장(丈)을 뛰어간 뒤 멈춰서자, 그를 따르던 여우들도 제자리에 멈췄다.
여우들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서, 그저 고개를 돌려 자신들이 뛰어온 방향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 마침내 일고여덟 마리의 여우가 다시 수풀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그렇게 처음 온 여우들과 함께 섞여 자리에 앉아 혹시 모를 다른 이들을 기다렸다.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지고, 그들이 뛰어온 방향에도 어둠이 내렸다.
“할아버지, 이제 더는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소홍(小紅)이라는 이름의 여우가 이렇게 말하자, 회색 털을 지닌 여우가 가느다란 눈을 뜨더니 소홍의 머리를 토닥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가자.”
말을 마친 호리는 15마리의 여우들을 이끌고 다시 서북쪽으로 향했다. 이제는 그중 누구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여우들은 각자 품은 뜻이 달랐을 뿐, 누구도 서로의 선택에 대해 어느 쪽이 옳은지 말할 수 없었다.
* * *
이미 요물이 되었지만 호리를 비롯한 여우들은 여전히 수행이 낮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위험을 피해 가는 게 가장 상책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위험한 곳을 돌아가면서도 조금도 길을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낮에는 적당한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하면서, 함께 <운중유몽>을 펼치고 책을 보며 수행을 닦았다.
그러다 밤이 되면 여우들은 휴식을 취한 몸을 이끌고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달리는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며칠 전에 <운중유몽>에서 한 장의 특이한 ‘운도(雲圖)’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운도라는 것은 수선계의 수행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해, 모든 수행계로 퍼져나간 용어였다. 그 위에는 계역 나루터의 위치와 그 외 대형 비행 법기(法器)들이 정차하는 곳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비행 노선은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았고, 그저 선가(仙家)에서 운영하는 나루터들만이 주로 표시되어 있었다.
운도를 얻은 여우들은 앞으로 자신들이 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서북쪽을 향해 길을 재촉하는 동안, 그들의 생활은 단순하고 즐거웠다.
어느 여름밤, 월록산 근처의 한 산간 마을에서는 어느 농부가 용변이 마려워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막 밖으로 나가던 그 농부는 마침 후원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꽥……!”
닭의 비명이 들리다 뚝 끊기자 농부는 즉시 소변볼 생각이 사라졌다. 그는 근처에서 괭이를 집어 들고는 조심스럽게 뒤뜰로 다가갔다.
멀찍이서 닭장을 살펴보니, 어느 검은 형체가 그 앞에 쭈그려있고 주위로 여러 검은 그림자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누구냐? 감히 내 닭을 훔치려 하다니, 이 괭이로 때려 죽여주마!”
농부가 고함을 내지르며 닭장을 향해 괭이를 휘두르자 그곳에 있던 누군가가 깜짝 놀라 얼른 이렇게 소리쳤다.
“아, 아, 아, 아니, 오해입니다, 오해!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닭장 근처의 검은 형체가 당장에 튀어나오더니, 그의 곁으로 고양이 같은 그림자 여러 마리가 후다닥 바깥으로 달아났다.
농부가 괭이를 휘두르려다 말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몸을 잔뜩 수그리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당신은 누구요? 왜 남의 집닭을 훔치려는 것이오?”
달빛 덕분에 농부는 눈앞의 통통한 남자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한편 닭장 바깥에는 이미 숨이 끊어진 듯한 나이 든 암탉 주위로 피가 고여 있었다.
“오, 오해입니다! 오늘 낮에 날씨가 너무 더워서, 일부러 밤에 길을 서두르고 있었는데 우연히 여길 지나던 중 어느 여우가 이 집으로 뛰어 들어와 닭을 잡아먹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여우를 잡으려다가……. 크흠, 못 믿으시겠거든 여기 죽은 암탉 두 마리는 그냥 제가 사들이겠습니다. 아니, 아예 몇 마리 더 사지요. 은자로 값을 치르겠습니다!”
“은자라고요?”
“네, 네, 은자를 드리겠습니다!”
남자는 품 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더니 그 안에서 쇄은자 몇 개를 꺼냈다. 바로 그때, 남자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꼬르륵…….
“아하하…… 밤새 길을 서두르느라, 배가 좀 고파서요…….”
농부는 본디 마음이 선한 사람이었고 상대가 은자도 지닌 걸 보자, 의심을 아예 거두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괭이를 내렸다. 다시 하늘을 살펴보니 멀리 지평선 쪽에는 이미 붉은색이 번진 게 보였다.
“그러시다면, 우리 집에 와서 좀 앉았다 가시지요.”
“예, 예!”
남자는 사실 그리 긴장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 척하며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뒤 울타리 바깥을 한번 쓱 쳐다보더니 농부의 뒤를 따라갔다.
이 남자는 바로 여우 무리를 이끌고 이곳을 지나던 호리였다. 오늘 밤 이 일은 사실 어느 어린 굶주린 여우가 지나던 길에 닭 소리를 듣고는, 식탐을 자제하지 못하고 닭은 잡아먹으려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호리가 얼른 그 뒤를 쫓아왔을 때는 이미 닭 두 마리가 죽은 뒤였다.
하늘이 점점 밝아오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마을 한쪽 어느 농부의 집은 유달리 시끌벅적했는데, 이른 아침부터 십여 명이 넘는 손님들이 뜰에 들어앉았기 때문이었다.
타고나길 눈치가 빠른 호리는 죽은 닭값을 치른 뒤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농부에게 실은 자기가 가족을 이끌고 지나던 길이라며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호리는 한 번에 자기 일행을 이끌고 들어오면 농부의 경계와 두려움을 살까 봐서, 일부러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일어난 다음에 혹시 여기서 식사를 한 끼하고 갈 수 있겠느냐고 물어본 것이었다.
게다가 백은 반 냥을 줄 테니 식사를 한 끼 내달라는 호리의 요구는 마을 사람 누구라도 선뜻 받아들일 만한 것이었다. 게다가 호리가 데리고 온 일가에는 남녀노소가 섞여 있어, 이를 본 농부네 가족도 기꺼이 승낙했다. 그들은 닭과 오리를 잡고 키우던 채소를 뽑으며 이른 아침부터 바삐 불을 피웠다.
비록 도행에 큰 발전이 있다고 할 수는 없어도, 몇 달간 수행에 힘써온 덕분에 호리를 제외한 다른 여우들 역시 이제 낮에 사람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