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9화. 선생님께선 저기 계시잖아?
육 산군이 수행하던 우규산의 동굴에서부터 산등성이 세 곳을 넘으면, 산허리에 사람 키 반 정도 되는 작은 동굴이 하나 있었다. 동굴 내부를 따라 대략 7, 8장(약 20m) 정도 들어가면 넓은 대청과 같은 공간이 있었다. 그 안에는 작은 걸상들과 대나무 선반이 놓여 있었고 그 위의 바구니들 안에는 발랑고(*拔浪鼓: 양옆에 구슬이 달린 줄을 매어 흔들며 노는 작은 북)부터 가면, 도검을 비롯한 무기, 촉감이 거친 베옷 등 각종 물건이들어있었다.
대청의 중심에는 방석이 하나 놓였고, 그 위에는 꼬리가 두 개 달린 붉은 여우가 앉아있었다. 여우의 앞에는 작은 향로가 하나 있었는데, 정신을 집중하고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단향이 어느새 잿가루가 되어 있었다.
호운은 방석에 앉아 앞발로 취기인(*聚氣印: 기를 모으는 결인)을 맺은 채로 두 눈은 굳게 감고 있었다. 하지만 눈꺼풀은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고, 표정도 계속해서 변했다.
이때 호운은 수련 상태이기도 하고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이 꿈은 벌써 아주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그 꿈속에서는 굽이굽이 이어진 푸른 산맥이 펼쳐졌는데, 보잘것없는 붉은 여우 한 마리가 쉬지 않고 산속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우우-!”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깊은 산간에 울리자, 이를 들은 붉은 여우가 즉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산을 벗어나기 위해 더욱 속도를 높였다. 여우의 네발 아래에는 불길이 치솟는 듯하더니, 구름이 모이는 듯한 환영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여우는 순식간에 백여 개가 넘는 산봉우리를 뛰어넘었다.
여우가 어느 산봉우리를 뛰어넘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평지의 중앙에 거대한 여인 하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하얀 머리카락에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표표한 자태로 웃으며 여우를 바라보았다.
“작고 붉은 여우야, 또 찾아왔구나?”
“아니, 난 당신을 보러온 게 아니야. 대체 어떻게 내 마음에 멋대로 들어온 거지?”
호운은 이렇게 말하며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이때 하늘에는 밝은 달이 걸려 있었는데, 달빛 아래 흰옷을 입은 여인의 치맛자락 아래로 아홉 개의 꼬리가 생생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를 본 호운은 여인이 무슨 존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이 그러니, 네가 날 불렀잖아?”
여인은 여우를 만지고 싶은 듯이 천천히 호운을 향해 다가왔다.
“이렇게 귀여운 데다 천부적인 자질을 지닌 영호(靈狐)는 정말 보기 드물단 말이지. 게다가 이렇게 타오르는 불길처럼 선명한 털은 붉은 여우 중에서도 몹시 희귀해. 그런데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왠지 모르게 네가 아홉 개의 꼬리를 지닐 자격을 지닌 것같이 느껴진단 말이야. 또 보고 있으면 친근함이 느껴지고, 첫눈에 딱 마음에 들었어. 난 네가 좋아.”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난 당신이 싫어! 꺼져! 나가라고, 당장 내 마음에서 나가!”
호운이 노기 띤 목소리로 포효했지만, 여인의 눈에는 귀여운 영호가 짐짓 흉포한 체하며 앞발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고양이가 호랑이인 체를 하는 것처럼 보기만 해도 귀엽기 짝이 없었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든단 말이지!”
여인이 손을 뻗었다. 팔이 길어진 것도 아니고 서 있던 자리에서 걸음을 이동한 것도 아니었는데, 호운이 아무리 도망쳐도 그 손을 피할 수가 없었다.
“크르릉…….”
그때 산속에서 호랑이의 울음이 들리자 수많은 새가 놀라 하늘로 푸드덕 날아올랐다. 맹호의 기운이 산을 뒤덮자 산짐승들도 놀라 멀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호랑이의 포효가 들리자 호운은 조금 전의 겁먹은 태도를 버리고, 곧장 수 장의 거리를 물러나더니, 거대한 암석 위에 내려앉아 소리쳤다.
“산군, 살려줘! 저걸 물어뜯어 버려, 어서 죽여버려!”
“크르르!”
다시 한번 호랑이의 포효가 들리더니, 맹호 한 마리가 산속에서 걸어 나와 단번에 허공을 뛰어넘으며 눈앞의 여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입가의 송곳니가 달빛 아래 차가운 빛을 내뿜었다.
“이것 보게, 마음에 이런 흉악한 것을 숨기고 있다니, 설마 이렇게 예쁜 누나를 물어 죽이려고? 보면 볼수록 참 마음에 든단 말이야, 하하하하…….”
“어흥-!”
맹호가 큰소리로 포효하더니, 흉악한 살기를 내뿜으며 바람을 몰고서 여인을 향해 덮쳐왔다.
콰직…… 쿠웅!
맹호의 공격은 허공을 덮쳤지만, 발톱이 나무 한 그루를 긋고 지나가 거대한 나무가 쓰러졌다.
“엄청 무서운 호랑이네……. 아이고, 무서워라…….”
여인이 다시 호랑이의 뒤쪽에 모습을 드러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맹호가 즉시 몸을 돌려 여인의 다리를 물어뜯으려 했다.
퍽!
쿠웅……!
하지만 여인의 다리에는 조금의 상처도 입히지 못했고, 오히려 호랑이가 걷어차여 뒤로 휙 날아갔다. 호랑이는 대(大)자로 쓰러져 입가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산군…….”
호운이 경악한 표정으로 호랑이를 바라보았다. 이때 그는 약간의 지각만이 깨어있는 상태라, 맹호가 발에 차여 피를 흘리는 걸 보고 산군이 정말 죽은 줄 알았다.
‘선생님, 오직 선생님만이 날 구해줄 수 있어…….’
“선생님, 살려주세요!”
호운이 이렇게 소리치며 계연을 떠올리자마자, 머리가 깨질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주위로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느꼈을 뿐, 계연을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고통은 점차 커져만 갔다.
“얘야, 본인 능력 밖의 사물은 관상(*觀想: 우주 만물과 소통하고 하늘과 합일(合一)하기 위해 사물을 마음속으로 형상화하는 도교의 명상법)하지 않는 게 좋단다. 지금처럼 아주 괴로울 거야.”
여인은 온화한 목소리로 이렇게 충고하며, 호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를 본 호운은 마치 자신에게 마수가 뻗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난번에 저 손에 잡혔을 때, 그는 아주 오래 정신을 잃었었다.
“꺼져!”
그는 상대에게 물러나라고 위협하는 동시에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선생님을 불러올 수가 없어. 선생님이 안 되면…… 윤청! 윤 훈장님!“
호운은 미친 듯이 도망치면서 마치 구명줄이라도 잡은 것처럼 윤 씨 부자를 떠올렸다. 그는 예전에 계 선생님께서 윤 훈장님은 당대의 대유(*大儒: 학식이 높은 선비)라 호연정기를 지녔기 때문에, 사악한 것들이 감히 다가오지 못한다고 했던 걸 기억했다.
산등성이를 타고 나는 듯 도망치던 호운이 빽빽한 수풀을 빠져나오자, 눈앞의 산봉우리 위에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여우야, 또 왔구나. 하하하하…….”
“하늘에서는 밝은 달이 허공을 비추고, 땅에서는 잔잔한 호수가 거울처럼 비치는구나. 천만 권의 책을 읽고, 천만리의 길을 걷고, 마음이 물처럼 맑고, 달처럼 밝으면 속세의 때가 저절로 흩어진다…….”
평온하고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순식간에 밝은 달이 빛나며 산속에 수은이 흩뿌려진 듯했다. 하늘에 떠 있던 먹구름이 흩어지며, 서생 차림을 한 중년 남자가 손에 책을 들고서 산길을 걸어 나왔다. 그의 곁에는 어린 남자아이가 하나 서 있었다.
“윤 훈장님, 청아, 저 요녀(妖女)가 절 사로잡으려 해요!”
호운은 윤 훈장을 발견하자마자 몸과 마음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그는 즉시 윤 씨 부자 곁으로 뛰어갔고, 어린 윤청이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호운아, 어서 이리 와!”
윤청의 목소리는 여인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보다 훨씬 솔깃했다.
그러자 산꼭대기에 서 있던 여인이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재미있구나. 저 인물은 네가 직접 만났던 거니, 아니면 마음속에서 창조해낸 거니?”
하지만 그녀는 곧장 찌푸렸던 미간을 피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다만, 너 같은 여우는 저런 학자의 학식과 경지를 따라잡을 수 없단다. 가짜는 그저 가짜일 뿐이지!”
“낭자, 소위 진위란 것은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소. 성현의 책은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하는 법이오. 우리 호운은 비록 책 읽기를 즐겨하지 않지만, 마음에 성현을 담고 있고 성현의 말을 실천하고 있소. 오히려 낭자는 조금의 교양도 없으니, 계척(*戒尺: 옛날 글방 선생이 학생을 벌할 때 쓰던 자)으로 한 대 맞아야겠소이다…….”
윤 훈장은 서책을 든 채 온화하게 웃더니, 여인에게 다가와 다른 한 손으로 계척을 휘둘렀다.
쾅……! 쿠구궁……!
여인은 팔을 들어 계척을 막아냈으나, 발아래 3척 깊이에 다리가 깊이 박혔다. 뒤이어 온산이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산사태가 일어날 듯한 조짐이 보였다.
두두두두…….
여인은 다급히 뒤로 후퇴했지만, 걸음을 디딜 때마다 산이 흔들리며 발이 깊은 구덩이에 쏙쏙 빠졌다. 십여 걸음을 물러난 뒤에야 진동이 멈추자, 여인은 다시 고개를 들어 산등성이 위의 서생을 바라보았다.
“흥, 그래봐야 가짜지!”
여인은 코웃음을 지으며 계척을 든 서생이 안개로 변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윤 훈장님! 윤 훈장님! 가지 마세요!”
호운이 앞발을 휘둘렀으나 어떻게 해도 흩어지는 안개를 손에 쥘 수가 없었다. 호운은 그의 곁에 남은 윤청을 향해 다급히 말했다.
“윤청, 어서 도망쳐! 내가 막을게! 너는 선생님을 찾아가!”
호운은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고 도리어 윤청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오, 여우야, 이제 도망을 포기한 거니? 조금 전의 그 서생 때문에 이 누나가 깜짝 놀랐단다!”
여인이 웃으며 호운을 향해 걸어왔다. 그때 호운의 뒤에 서 있던 어린 윤청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선생님을 찾아가라고? 선생님께선 저기 계시잖아?”
그 말에 호운이 멍하니 고개를 돌리자, 넓은 소매의 푸른 장삼을 입은 남자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남자가 머리에 꽂은 묵옥 비녀는 달빛 아래 밝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가 호운과 윤청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우야, 대체 네 마음속은 얼마나 뒤죽박죽인 게냐, 하하하…….”
여인이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이 여우를 알면 알수록 더욱 흥미가 생겼다.
아주 옛날, 호운이 막 영지를 얻은 여우였을 적부터 계연에 대한 그의 믿음은 이미 굳건히 쌓여 있었다. 지금에 와서도 호운은 아직 세상 물정을 많이 겪어보지 못해 계연이 대체 어느 정도의 인물인지 잘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의 계 선생님은 그 누구보다 기댈 수 있고 안심할 수 있는 상대였다.
그래서 계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호운은 즉시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그의 마음이 안정을 되찾자, 여진으로 흔들리던 산맥도 즉시 차분해졌다.
계연은 주위의 모든 것이 호운의 심경이 만들어낸 풍경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호운처럼 순수한 요괴 수행자는 단로를 만들어내지도 못할뿐더러, 의식 세계를 펼쳐내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심경을 드러낼 수 없는 건 아니었으므로, 지금 이 상황이 바로 그 증명이었다.
호운은 조금 전에 자신이 계 선생님을 떠올렸을 때 왜 그리 고통을 느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호운은 선생님이 정말로 나타난 걸 보고는 불안과 초조함이 순식간에 가시는 걸 느꼈다. 그는 윤청의 곁에 딱 붙어서서 이렇게 소리쳤다.
“선생님, 저 요녀가 절 잡으려 해요. 절 가둬서 가두려는 거예요!”
호운은 윤청의 곁에 서서 앞발로 흰옷을 입고 하얀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분노와 원한이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