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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740화 (740/892)

740화. 가짜가 아니다

계연은 호운과 윤청을 향해 걸어오더니, 호기심 어린 얼굴로 호운의 마음속에 나타난 어린 윤청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알겠다.”

눈앞의 윤청은 계연의 기억 속 윤청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비록 이 주위의 모든 것이 호운의 심경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계연은 윤청의 모습이 무척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그는 호기심 어린 눈길로 몇 번 살펴본 뒤, 다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흰옷을 입은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마침 흥미롭다는 듯 계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에 윤 훈장 때문에 한바탕 깜짝 놀랐으므로, 새로 나타난 이 ‘선생’도 무척 대단한 인물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전혀 특별한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기품이 남다른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는 저 여우가 일찍이 존경했던 어느 서생인 듯했다. 아마 여우의 계몽을 도와준 사람일 것이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던 여인과 달리, 계연은 저 여인이 호운의 심경에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여인의 그림자를 보니 구미호인 게 확실했다.

예전에 구미호의 털을 이용해 그가 호운에게 깨달음의 길을 열어 주었을 때, 곤선승으로 단단히 기운을 봉했었다. 그러나 보아하니 호운의 수련이 깊어짐에 따라 상대의 주의를 끈 모양이었다.

계연은 지금은 저 여인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었다.

약간의 의혹을 담고 계연이 먼저 이렇게 물었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산에서 얌전히 수행을 닦는 호운이 대체 당신에게 무슨 화를 샀길래, 이렇게 끈질기게 놓아주지 않는 건가요?”

계연의 말은 호운의 수련 상태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듣는 이로 하여금 그가 호운의 ‘상상’에서 비롯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했다. 계연이 노린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다만 그는 그것을 너무 드러내놓고 표현하진 않으려 했다. 상대가 좀 더 방심하고 아무런 경계도 느끼지 않도록 말이다.

여인이 가볍게 웃더니 계연을 향해 대꾸했지만 실은 호운에게 하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저 여우는 영성이 아주 뛰어난데, 아무래도 어디선가 우리 호족들의 수련법을 얻은 모양이더군. 원래라면 그 불완전한 것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수행을 쌓을 수도 없지만, 저 여우는 뜻밖에도 그 안에 담긴 영험함을 깨달은 모양이야. 저렇게 자질이 출중한 여우는 내 살아생전 처음인 데다, 생긴 것도 저리 귀여우니 어찌 데리고 놀지 않을 수 있겠어?”

여인의 설명에 계연은 대략 어찌 된 일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과연 호운의 수련이 깊어짐에 따라, 예전 그 구미호 털의 주인과 특수한 연결고리가 생긴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 여인은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계연은 그들 사이의 연결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는 호족들의 수련법에 대해 아예 모르는 데다, 도행이 높은 동족 여우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늦기 전에 발견한 만큼, 이 연결이 별 소용이 없도록 만들 수는 있었다. 최소한 호운의 마음속에 저 여인이 다시 나타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왕 호운의 자질이 뛰어나고 당신이 정도(正道)를 닦는 수행자라면, 그가 수행을 잘 닦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면 되지 않나요? 그럼 좋은 연을 맺을 수 있을 텐데 뭐하러 이렇게 막무가내로 상대를 압박하는 거죠?”

여인은 계연을 쓱 쳐다보더니 호운을 향해 말했다.

“여우야, 너는 이게 정도의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 요괴들은 언제나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라왔단다. 심지어 수행계조차 그러하지. 천지간의 규칙이 모두 그러하지 않니?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이렇게 하고 싶다는 거지만.”

계연은 여인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호운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여인이 자신을 전혀 상대하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모든 수행자가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교만하지도 않았을뿐더러, 지금 저 여인의 눈에 자신은 그저 호운의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가짜일 뿐이었다.

계연은 허리를 숙여 호운 가까이 다가가더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그에게 몇 마디 당부했다. 그러자 호운도 알아들었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계연은 다시 허리를 세우고서 여인이 몇 걸음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오자 손을 뻗어 막아 세웠다.

“호운은 성정이 활발하고 움직이기 좋아하니, 당신의 손아귀에 잡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이쯤에서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당신은 분신(分神)은 별것 아니라 여길지 모르나, 그래도 신념에서 뻗어 나온 줄기인 만큼 손상을 입으면 당신에게도 좋지 않을 거예요. 몸은 물론이고 얼굴도 보기 좋지 않을 텐데요.”

“음?”

그 말에 여인은 눈썹을 찡그리더니 처음으로 제대로 계연을 바라보았다. 위아래로 그를 관찰해보니 그의 기운이 확실히 일반적인 서생 같지는 않아 보였다. 게다가 두 눈은 희끄무레했다.

“어린 여우가 생각보다 대단하구나. 조금 전의 유생도 비범했는데 말이지. 당신도 평범한 인간은 아닌 듯하고…….”

그러더니 여인이 시선을 돌려 호운을 향해 말했다.

“여우야, 마음속의 형상은 마음속의 생각에서 비롯된단다. 보아하니 저자를 처음 만났을 때 별것 아닌 조잡한 실력에 놀라 그를 고인(高人)이라 여기게 된 듯하구나. 하지만 저 선생이 네 눈에 심오하기 그지없는 인물처럼 보인다고 해서 저자가 정말로 고인인 것은 아니야. 그저 네 수행이 너무 얕을 뿐이지…….”

여인은 키를 재는 듯한 동작을 해 보이며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그러다 돌연 자신이 저 푸른 옷을 입은 선생의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은, 바로 호운의 인상에 저 선생이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호운이 생각하는 모습이 그대로 그의 마음속에 나타난 것이다.

“그래도, 시야가 좁은 건 나중에 천천히 넓히면 되겠지. 이렇게 영성이 뛰어나니, 내 말을 잘 듣기로 약속한다면 앞으로의 수행이 순조롭도록 도와주겠다. 그게 저렇게 쓸모없는 것을 상상해내서 스스로를 지키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야…….”

여인은 이렇게 말하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희고 부드러운 손가락을 뻗어 자신의 앞을 막고선 계연의 팔을 가볍게 찔렀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는 이미 법력이 모여 있었다.

여인은 조금 전의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까 그 유생은 자신을 깜짝 놀라게 해, 저 어린 여우 앞에서 낭패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간단한 방식으로 상대의 환상을 깨뜨리려 했다. 그렇게 저 어린 여우의 심경을 뒤흔들면 더욱 쉽게 여우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가짜는 어디까지나 가짜…….”

그렇게 말을 하던 여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호운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동시에 계연에게로 옮겨갔다. 제 손가락이 상대의 팔에 닿았는데도, 이자의 형체는 흩어지지도 않았고 그럴 조짐도 없어 보였다.

계연은 가만히 미소 지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호운의 옆에 서 있던 어린 윤청이 품속에서 서책을 한 권 꺼내더니 웃으며 호운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평소에 책을 잘 읽지 않던 호운도 이때는 두 손으로 책을 받아들고 진지하게 읽기 시작했다.

“당신…….”

여인이 의혹 어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순간, 가벼운 현기증이 느껴지더니 주위의 산수와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며 어둠과 빛이 뒤섞였다. 곧이어 천지가 빙빙 돌더니 점차 빛이 사라지며 주위가 어두워졌다.

십여 초 만에, 주위는 제 손가락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깜깜한 암흑이 되었다. 그때 저 멀리 한 줄기 금빛 선이 나타나더니, 점점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주위로 금빛에 물든 파도가 일렁였다…….

원래 그들은 풍경이 수려한 산간에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망망대해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태양은 이제 막 솟아오르고 있었고, 어린 윤청과 호운, 계연, 그리고 흰옷을 입은 여인 모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어느 섬 위에 서 있었다. 그들의 시야에는 저 멀리 바다 위에 우뚝 선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보였는데, 가지가 굵고 잎이 무성한 나무였다.

여인은 너무 놀라 뒤로 펄쩍 물러나면서, 계연과 호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심경의 모습이 어떻게 이렇게 확 바뀔 수 있지? 대체 당신은 누구야?”

구미호는 이제야 푸른 장삼을 입은 선생이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최소한 호운이 상상으로 빚어낸 산물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한순간에 일어난 주위의 변화는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는 누가 봐도 수행자의 마음속 풍경이었다…….

계연은 구미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의 눈에, 그리고 본인 생각에도 자신이 세속에 구속되지 않고 초연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경악한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재미난 일이었다.

“구미호, 당신은 더 이상 호운의 마음에 있는 게 아니에요.”

계연이 이렇게 가볍게 대꾸했다. 한쪽에 선 호운은 겉표지에 <군조론-학동의 대답>이라고 적힌 서책을 들고 있었다.

“듣자 하니 북쪽 바다에는 오동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바닷속에 우뚝 솟은 그 3만 척(약 10km) 높이의 나무는 봉황의 서식지라고 한다. 바다에는 섬이 많아, 봉황과 새 무리가 모두 이곳에 서식하고 있다. 멀리 남쪽에는 산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남쪽 산 새들의 우두머리, 황새가 살고 있다고 한다…….”

어린 윤청과 호운의 입을 모아 서책의 내용을 낭독하자, 여인이 두 눈을 좀 더 크게 뜨며 그들의 손에 들린 책을 바라보았다.

“맞아요, 바로 책 속입니다.”

계연의 온화하면서도 근엄한 목소리가 전해지는 동시에, 넓은 소매가 여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마치 천지를 뒤덮은 듯한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이곳은 책 속의 풍경이긴 했지만, 여전히 호운의 마음속이기도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계연이 호운의 마음에 담긴 <군조론-학동의 대답>을 실체화한 것이었다. 그래서 호운이 이 구미호를 아주 싫어하는 것처럼, 이 세계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싫어했다.

그런 이유로, 여인을 향해 덮쳐오는 계연의 소맷자락에는 ‘천지의 힘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구미호가 손을 뻗어 막으려 해도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퍼엉……!

그들이 딛고 선 섬이 가볍게 진동하더니, 한쪽에서 바닷물이 3장(약 9m) 높이로 높게 일었다. 여인은 계연의 소맷자락에 맞아 공중을 가르며, 저 멀리 바다에 솟은 오동나무를 향해 날아갔다.

소위 ‘바다에 솟은 오동나무’라는 표현은, 원래는 바깥 세계에 널리 퍼진 것이 아니었다. 이 말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오로지 윤재성이 쓴 <군주론> 덕분이었다. 이 서책이 나온 뒤, 그 안에 담긴 이야기도 대정국을 비롯한 주변 곳곳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봉(*鳳: 봉황 중 수컷을 가리킴)이 오동나무를 좋아한다는 것은 속세의 일반 백성이든, 수행계이든 일찍이 알려진 것이었다.

계연이 휘두른 소맷자락에는 천지의 힘이 담겨 있었는데, 구미호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그저 멀리 날려 보낼 생각이었으므로 그리 많은 힘이 들지 않았다. 반면 구미호는 그 힘을 조금도 거스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계연이 날린 소맷자락에 맞아 그대로 날아갔다.

곧이어 계연은 곁에 서 있던 호운과 어린 윤청을 향해 “너희는 여기에 남아 있어라.”라고 말한 뒤 맑은 바람을 몰고 구미호를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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