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2화. 해일
다만 계연의 감정은 감탄에 더 가까웠다. 봉이든 황이든 모두 신성하기 그지없는 조류였으므로, 계연은 봉황이 <군조론>의 세계에 나타날 거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구미호는 반대로 놀라움과 두려움이 더 컸는데, 자신이 아무리 꼬리 아홉 달린 천호(天狐)라 해도 봉황은 세간에 모습을 잘 드러내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진룡은 수는 적지만 그래도 원하면 만날 수는 있었다.
“우우- 우우- 휘리리- 휘이-!”
봉의 울음소리는 계연이 들었던 모든 소리 중에 가장 감미롭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퉁소 소리와 무척 비슷하여 운율이 느껴졌다. 그 소리는 마치 극도로 예술적인 음악 연주를 듣고 있는 것 같아, 계연은 가만히 눈을 감고 음미했다.
계연과 달리 구미호는 전보다 더욱 긴장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계연의 모습을 흘끗 본 뒤로는 생각이 많아져 전처럼 경거망동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녀도 이곳에서는 계연이 훨씬 두려운 존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봉황이라는 존재가 가져다주는 압박감이 더욱 컸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경험 덕분에 계연은 유몽술과 천지화생을 결합해 만들어낸 이 세계 속의 천지만물은 아무런 감정과 생각이 없는 나무 인형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생생히 살아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 책 속의 세계에 들어갔다 나온 제 손에 남은 동전이 그 좋은 예였다. 그렇게 그와 구미호가 각자 호기심과 긴장을 느끼며 봉황을 관찰하던 때, 봉황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관찰 중이었다.
바다 위의 새 떼들은 거대한 오동나무 주위를 배회하며 변화무쌍한 빛을 내뿜었다. 각기 달랐던 새들의 울음소리도 하나의 통일된 소리로 변했다. 그러다 봉황이 몇 차례 울자 주위가 점차 조용해졌다. 그야말로 백조조봉(*百鳥朝鳳: 뭇 새들이 봉황의 뒤를 따르다) 그 자체였는데, 새들의 수가 수백은 거뜬히 뛰어넘는다는 것만이 달랐다.
주의 해역의 새 떼들이 머물던 곳에서는 광풍이 불고 해일이 높이 일었으나, 그 중앙 오동나무가 서 있는 곳만은 바람이 온화하게 불었다. 봉황이 아무리 날개를 펄럭여도 그 주위로 거친 바람이 일지 않았다.
주위의 오색 신광(神光)은 봉황과 서서히 합쳐졌는데, 마치 꼬리처럼 봉황의 뒤를 따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봉황은 오동나무 위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을 처음 보는 듯, 고도를 내려 수십 장(丈) 정도 가까이 다가섰을 때 사람의 말로 물었다.
“실례지만, 선장(仙長)은 누구고 어디에서 왔소? 내가 머무는 오동나무에는 무슨 일로 온 것이오?”
사람의 말을 하는데도 봉황의 목소리는 무척 감미로웠고, 약간 중성적이었다. 그의 물음은 누가 봐도 계연을 향해 묻는 것이었다. 봉황은 질문과 동시에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키며 가까이 있는 오동나무 가지에 앉았다.
봉황의 크기는 약 2장(약 6m) 높이였는데, 신수(神獸) 중에서는 무척 왜소한 편이었다. 다만 그 꼬리 깃털은 몸보다 몇 배가 더 길었다. 꼬리에 내려앉아 아래로 늘어뜨린 꼬리 깃털 위로는 오색찬란한 빛이 흘러 광채를 내뿜었다.
아무리 이 세계가 책 속일지라도, 또 이 봉황이 제 신통력이 빚어낸 존재일지라도 계연은 무척 정중한 태도로 봉황을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제 이름은 계연이라 합니다. 선장이라는 호칭은 제게 가당치도 않으니, 그저 저를 아는 이들이 부르듯 선생이라 불러주세요. 찾아온 목적은 따로 없고, 그저 이 후배가 곤란한 상황에 놓여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여기 이 요괴와 북해(北海)에서 싸우다 우연히 바다에 우뚝 솟은 오동나무를 발견하였고요. 이렇게 상서로운 신조의 진신(眞身)을 직접 뵙다니, 정말 행운입니다!”
“아, 계 선생이시로군. 이 몸 단야(丹夜)도 선생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봉황은 계연을 향해 인간이 하듯 가볍게 고개를 숙인 다음, 한쪽의 여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쪽 여우는 대체 누구지?”
구미호는 처음으로 봉황을 만나는 것이라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지만, 봉황이 확연히 차이 나는 태도로 자신을 대하자 불쑥 노기가 치솟았다. 하지만 감히 그것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봉황이라니, 정말 신기하네요. 첩신(*妾身: 옛날, 여자가 자기를 낮추어 일컫던 말)의 이름은 도흔(涂欣)이라 하고, 옥호동천에서 온 구미호예요. 여기 계 선생님과 한바탕 오해가 있어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된 것입니다.”
봉황을 눈앞에 둔 구미호는 아홉 개의 꼬리는 물론이고 하늘에 충천하던 요기도 모두 거둬들인 후였다. 이에 그녀의 기운은 좀 더 맑고 가볍게 변하였고, 말하는 태도는 조금도 움츠림이 없이 당당했다.
“옥호동천?”
봉황은 의혹에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더니 눈가에 웃음기를 띤 채 구미호와 계연을 향해 물었다.
“보아하니 두 분 모두 진신이 이곳에 있는 게 아님에도 꼭 육신처럼 보이는구려. 꼭두각시도 아니고 화신(化身)도 아닌데 실로 신기한 일이오. 혹 이런 내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겠소?”
그러자 구미호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무의식적으로 제 팔을 만져보았다. 촉감은 부드럽고 탄성이 있었으며, 온도도 있고 심장이 뛰는 것도 느껴졌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계연과 대치하거나 싸우고 있었으므로, 다른 데에 신경을 쏟을 여유가 없어 눈치채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봉황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이 육신을 갖추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어찌 된 일이지? 그럴 리가 없는데!’
구미호는 자신이 한 줄기 신념(神念)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호운의 마음속에 있을 때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이 실체 없는 허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이 육신을 갖춘 ‘사람’이 되었다니?
여우의 반응을 본 봉황은 그녀도 어찌 된 일인지 알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상황에서 내내 처음과 같은 미소를 띤 것은 오직 계연뿐이었다. 계연은 이때 봉황이 자신을 쳐다보자 웃으며 말했다.
“단야 도우(道友), 부디 계모(某)를 도와 이 구미호를 처리해주세요.”
계연의 한 마디에 구미호의 안색이 일변하더니, 그녀는 곧장 두려움에 두피가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자 봉황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소, 이 여우를 처리하면 부디 해답을 주시길 바라오.”
“잠깐! 어째서? 잠시…….”
“휘이익-!”
도흔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봉황이 높고 낭랑한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여전히 감미로웠으나 왜인지 모르게 정신을 따갑게 찌르는 듯했다. 이에 구미호의 신념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그녀는 찌를 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순간, 곧장 아홉 개의 꼬리를 드러내더니 오동나무를 디딤돌 삼아 계연과 봉황에게서부터 멀리 날아갔다.
펑- 펑, 펑-!
하얀 여우 꼬리가 오동나무 가지를 거세게 때렸는데도, 가지가 잠시 흔들리기만 했을 뿐 이파리 몇 개가 떨어지는 것이 전부였다.
“크릉…….”
도흔이 뛰어오른 곳에서 희미한 광채가 나더니, 무궁무진한 요기(妖氣)가 치솟으며 다시 하늘을 뒤덮었다. 곧이어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가 원래 모습을 드러내더니, 먼 곳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현재 도흔의 상태로는 계연을 상대하는 것도 힘에 부쳤으므로, 도행을 짐작할 수 없는 봉황과 맞서는 건 더욱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흔은 멀리 도망치는 게 현실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계연과 봉황은 언제든 손쉽게 자신을 따라잡을 수 있을뿐더러, 설령 자신을 따라잡지 못한다 해도 이 세계는 실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벗어나려면 근본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계씨 성의 선생은 자신들이 책 속에 있다고 했었으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린 여우가 들고 있는 서책을 찢어발기는 것뿐이었다.
“확실히 구미호는 구미호네요. 도행도 높고 꽤 똑똑하군요. 즉시 관건을 잡아내다니.”
계연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가장 중요한 그 서책은 계연이 지니고 있었을 테지만, 이 <군조론>은 호운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호운만이 들고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계연은 도흔이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다시 옆에 있던 봉황을 향해 예를 올리며 말했다.
“단 도우, 부탁드릴게요.”
“음.”
봉황은 담담히 대꾸하더니, 오색 찬란한 날개를 펼치며 꼬리로는 주위 수리(里)에 걸쳐 신광(神光)을 내뿜었다. 그가 날개를 한번 퍼덕이자 이미 도흔에게서 3분지 1의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한편 봉황의 꼬리로 이어지는 신광을 밟고 선 계연은 이 순간, 마치 질주하는 마차에 올라탄 듯했다.
“뭇 영금(*靈禽: 영성을 지닌 날짐승)과 요금(妖禽)들은 저 여우를 죽여 없애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수많은 새 떼들의 기운이 하늘을 뒤덮더니, 새 떼들은 각자 날카롭거나 낮은 소리로 울부짖으며 도흔을 향해 날아갔다.
“크릉…… 전부 죽어라!”
쿠궁……!
그러자 광풍이 불어닥치고 거대한 해일이 일더니, 곧이어 벼락마저 내리치기 시작했다. 구미호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빙빙 돌던 수천 수백의 새 떼들은 깃털이 우수수 떨어뜨리거나 선혈을 뚝뚝 흘렸다.
“저 여우는 원신(*元神: 육체가 만들어지는 동시에 생겨나, 수행을 시작하면 혼백을 주관하는 역할)이 허약하다, 모두 심신(*心神: 마음과 정신)을 공격하라!”
그중 어떤 새 한 마리가 크게 소리치자, 모든 새들이 즉시 입을 모아 날카롭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끼익-!”
“우우…….”
“까악-!”
바다는 쉬지 않고 파도가 치며 부서졌고, 하늘을 덮은 먹구름과 광풍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유형과 무형의 파동이 계속해서 새 떼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아악!”
도흔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더니, 뒤이어 수많은 뾰족한 새 부리와 날카로운 발톱들이 그녀를 공격해왔다. 그들 사이로 피가 튀고 찢어진 옷자락이 나풀댔다.
계연은 싸움이 벌어지는 곳에서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봉황과 함께 가만히 떠 있었다.
“원래는 신봉(*神鳳: 신령한 봉새)께서 나서시는 걸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요.”
계연이 이렇게 말하자 봉황이 고개를 돌려 그를 한번 쳐다보더니, 가볍게 날개를 펄럭이며 다시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하러 쓸데없이 힘을 쓰고 손을 더럽히겠소.”
채 일각(一刻)이 지나기도 전에, 새 떼들의 포위망에 갇힌 도흔은 철저히 무너졌다. 새 떼들은 하나둘씩 그녀의 곁을 떠나더니, 고공으로 날아올라 주위를 빙빙 돌거나 해수면 가까이 날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은 광활한 길 하나를 텄는데, 이는 계연과 봉황이 가까이 다가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헉…… 허억…… 헉…….”
도흔이 바다에 불쑥 솟은 암초 위에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옷은 이미 갈가리 찢겨 나갔고 온몸은 새빨간 피로 뒤덮여 있었다. 깔끔하게 틀어 올린 은발의 머리칼은 뚝뚝 끊겨 나가 이미 산발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두 팔로 상체를 일으켜 세운 채 몸을 떨었다.
도흔의 주위로 희미한 빛이 진동하는 걸 본 계연은 그녀의 원신이 이미 흩어지기 시작했음을 눈치챘다. 지금 이 상태라면 해일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없애버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