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743화 (743/892)

743화. 봉구황(鳳求凰)

“계, 계연…….”

“도흔, 이후에 호운이 수행을 닦을 때 당신이 다시 나타나 방해하지 않도록, 호운의 윗사람으로서 제가 그를 대신해 후환을 없애려 합니다.”

“당신, 정말 이렇게까지 할 거야?”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대꾸했다.

“전에 제가 분명 좋은 말로 권했었잖아요?”

도흔은 계연의 말을 듣더니, 후회하기는커녕 더욱 화가 나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하…… 좋은 말이라니, 그건 분명 계략이었잖아!”

만약 일전에 계연이 자신이 이렇게 높은 도행을 지닌 고인(高人)임을 드러냈다면, 자신이 어찌 그 말을 따르지 않았겠는가? 완전히 굴복하진 않더라도 일단은 물러났을 것이다.

“저는 당신이 굴복하지 않았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게다가 그 과정에서 당신의 심성이 어떤지 알게 된 후로는, 더욱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결론을 내렸죠. 이젠 반항해봤자 소용없어요.”

계연이 이렇게 말하며 도흔의 곁으로 다가오자, 도흔이 자비를 구하듯 무척 가련한 자태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계연은 곧장 검지를 뻗어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대었다.

푸욱-!

검기가 바늘처럼 도흔을 꿰뚫자, 그녀의 신념과 형체가 단번에 흩어져 희미한 빛무리가 되었다. 그러자 계연은 팔을 들어 그것을 자신의 소매 안에 넣었다.

* * *

서역 남주, 깊은 산속 세상과 단절된 옥호동천 안의 수려한 궁전에서는 호화로운 침상 위에서 화려한 궁의(宮衣)를 걸친 채 휴식을 취하던 여인이 퍼뜩 깨어났다.

“으윽…….”

여인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가볍게 숨을 헐떡이더니, 양손으로 이마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도흔은 본체를 여기 둔 채로 신념만 책에 들어가 있던 터라, 이제는 완전히 그 감응이 끊긴 후였다. 그래서 그녀는 책 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했고, 계연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신념이 흩어져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오동나무 근처에서 흩어져 버린 신념과 달리, 도흔의 본체는 더 이상 분노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그 ‘계 선생’에 대한 꺼림칙함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저 멀리 옥호동천의 구미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계연은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현재 눈앞의 상황이 더욱 흥미로웠기 때문이었다.

도흔의 신념(神念)이 사라지자, 망망대해의 암초 위에는 계연만이 남아 있었다. 크기와 모습이 다양한 각양각색의 새들이 주위를 뒤덮고 있었는데, 그들이 내뿜는 요기(妖氣)는 놀랄 만큼 강력했다.

이렇게 강력한 기운을 내뿜는 새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저 먼 해역까지 뒤덮고 있었다. 계연은 이곳이 <군조론> 속의 세계라는 걸 알면서도, 백조조봉(*百鳥朝鳳: 뭇 새들이 봉황의 뒤를 따르다)의 광경에 감탄과 신기함을 금치 못했다.

동시에 계연은 이 수많은 새가 각기 다른 성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길에는 경계심도 있었고 호기심도 담겨 있었으며 심지어 흥분감을 드러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 주위의 새 떼들이 분분히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무지개처럼 오색찬란한 신광(神光)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봉황은 더없이 우아한 자태로 계연이 서 있는 암초 위의 상공으로 날아왔다.

“계 선생, 여우는 이미 죽었으니, 이제 해답을 주시겠소?”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들어 올려 봉황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으시다면 오동나무로 장소를 옮겨도 될까요?”

“좋소.”

계연과 단야는 상의를 마친 뒤, 각자 날개와 바람을 이용해 바다에 우뚝 솟은 오동나무 위로 돌아왔다.

이때 태양은 이미 해수면 위로 완전히 올라와 있어 사방으로 눈부신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계연과 봉황은 그 빛에도 전혀 방해받지 않는 것처럼, 일출이 떠오르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른 새들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눌지 무척 궁금했지만, 봉황의 명령에 따라 오동나무에서 멀리 떨어졌다. 그런 뒤에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빙빙 도는 새들이 있었지만, 자신들이 서식하는 섬으로 돌아간 새들도 있었다.

태양이 점점 더 높이 솟자, 오동나무 주위를 배회하던 새들도 하나둘 자신들이 머무는 섬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일정 거리 밖에서 오동나무 쪽을 주시하는 이들은 도행이 일정 수준 이상이거나 인내심이 끈질긴 새들뿐이었다.

물건은 흔치 않을수록 귀한 법(物以稀爲貴)이라는 말처럼, 이 새 떼들은 모두 외부에서 온 이 선인(仙人)에 대해 큰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저 선인은 봉황과 무슨 이야기를 저토록 오래 나누는 것일까?’

동쪽을 향해 뻗은 오동나무 가지 위에서는 계연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고, 봉황도 계연 옆에 앉아있는 상태였다.

“이게 다예요. 제가 아는 건 모두 말씀해 드렸어요.”

봉황 단야는 하늘에 떠오른 찬란하고 신성한 태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혼란과 막막함이 스쳤다. 한참 뒤 봉황이 고개를 내려 계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이곳이 그저 책 속의 세상이란 말이오? 나와 저 새 떼들, 이 오동나무, 망망대해……. 이 모든 것이 책에 적힌 것일 뿐 진짜가 아니란 뜻이오?”

계연이 살짝 미간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에요. 이 모든 것이 책 속의 세상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 안의 모든 게 진짜가 아니라고 볼 수는 없지요. 이곳에서 우리는 지금 문제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저 새들도 조금 전에 불완전한 구미호의 육신을 공격해 중상을 입혔으니까요. 이곳이 책 속인 것만은 변하지 않겠지만요…….”

계연은 더는 이 문제에 대해 말을 잇지 않았다. 봉황의 눈빛은 전보다 더욱 혼란스러워 보였다.

“선생의 말대로라면,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수행을 닦고, 심지어 오늘의 이 기억마저 실제가 아니라 조작되었다는 뜻이 아니오…….”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계연은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자신이 지닌 생각을 털어놓았다.

“세상의 만물은 각자 자기 삶을 이끌고 움직이죠. 예전 수행을 닦던 세월을 단 도우가 기억하고 있고, 다른 새들도 이에 대해 각자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 증명해 줄 수 있으니 그걸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비록 제가 이 술법을 펼치긴 했지만, 저도 그 안에 담긴 오묘함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휘이이-!”

봉황이 우렁찬 소리로 울자 바닷바람이 일시에 잠잠해졌고, 주위가 더욱 고요하게 느껴졌다.

“계 선생, 만약 이 술법의 시전자인 선생께서 계속 이곳에 머무른다면, 이 세계도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게 아니오?”

봉황의 이런 물음에도 계연은 아무런 위협도 느끼지 않았고, 긴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사실대로 대답할 뿐이었다.

“일단, 이곳을 떠나는 건 오로지 제 의지에 달려 있을뿐더러, 설령 제가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더라도 언젠가는 심력(心力)이 다 소모될 때가 올 거예요. 유몽술과 천지화생 모두 심력을 적잖이 소모하는 술법이거든요. 또한 술법을 유지하려면 마음도 맑고 안정적이어야 하고요. 그러니 심력이 다 소진되기 전에 마음이 먼저 어지러워질 수도 있죠.”

“그럼 혹시 나를 데리고 나가줄 수도 있소?”

계연은 그가 비록 신령한 존재이긴 하지만 이렇게 물어올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곤란해하지 않고 담담한 태도로 대답했다.

“안타깝게도 제겐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설령 금은보화를 들고 나간다고 해도 그것은 헛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중에서도 당신과 같은 신조(神鳥)라면 더욱 그렇죠.”

봉황도 이미 이런 대답을 예상하였으므로, 화를 내거나 의기소침해하지 않았다.

“그렇군. 덧없는 생 꿈과 같도다(浮生如夢)……. 우리는 모두 선생의 꿈속에 나오는 인물과 마찬가지겠구려?”

계연은 수행의 경지에 이른 뒤로는 꿈을 꿔본 적이 없어, 일찍이 그게 무슨 감각인지 잊어버린 후였다. 지금 이 상황은 그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부분이 꽤 있었으므로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 뒤 계연과 단야는 오래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계연은 굳이 찾자면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꼭 말해야만 하는 것도 없었으므로 굳이 입을 열지 않는 것이었고 봉황인 단야도 그러했다.

그렇게 반 시진(1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있던 단야가 돌연 이렇게 물었다.

“선생께서 하신 말에 의하면, 저 밖의 진짜 세계에서는 한 번도 봉황이 나타난 적이 없고, 전설 속에만 남은 존재란 말이오?”

“네, 그래서 저도 호기심에 도우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거예요.”

조용히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던 봉황이 날개를 쭉 펴자, 온몸의 신령한 광채가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계연은 봉황이 자신에게 적의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그가 무얼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선생께서 내 봉명(*鳳鳴: 봉황의 울음소리)이 노랫가락처럼 들린다 했었지 않소? 그건 그저 아무렇게나 낸 소리일 뿐이오. 이 세계에는 나를 제외하고 또 다른 봉도 황도 없으니, 내 노래를 들려줄 다른 이도 없소.”

계연은 그제야 봉황의 뜻을 이해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단야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다 오늘 선생을 만났으니, 이것도…… 잘된 일이라 생각하오. 선생을 배웅하는 뜻으로 노래 한 가락 들려드리겠소. 부디 이 노래를 서책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 내가 존재했었다는 흔적을 남겨주시오.”

“우우- 휘리리-!”

단야는 길게 울며 날개를 활짝 펴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오색찬란한 빛이 공중에 감돌며 노랫소리가 빛을 따라 널리 퍼졌다. 봉황은 빙빙 돌며 날다가 때로 오동나무 가지 위에 내려앉아, 날개와 꼬리를 움직이며 춤을 추기도 했다. 그의 꼬리 뒤로 한 줄기 무지개가 생겨나더니 노랫소리와 함께 망망대해에 널리 퍼졌다.

바다 위의 새들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고, 해역에 일던 파도도 어쩐 일인지 무척 고요해졌다.

계연은 눈을 크게 뜨고서 봉황이 하늘을 날고 춤을 추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노랫가락을 모두 마음에 깊이 새겼다.

그렇게 반각(7-8분)이 흐른 뒤, 단야가 날개를 펄럭여 다시 오동나무 가지 위로 돌아오더니 계연을 향해 웃으며 물었다.

“선생, 잘 들었소?”

“계모(某)의 청각은 한번 들은 건 절대로 잊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께서 듣기에 내 노랫소리가 어떠하였소?”

계연은 자신이 느낀 그대로 성심껏 대답했다.

“구성진 가락이 세간에 둘도 없을 정도로 뛰어났고, 계모가 평생 들은 음악 중 천상의 소리의 소리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이에 봉황은 무척 흡족한 얼굴로 환히 웃더니 다시금 물었다.

“선생, 내가 부른 이 노래, 혹은 이 선율을 뭐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소?”

그러자 계연이 봉황의 물음이 끝나는 거의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봉구황(*鳳求凰: 봉새가 황새에게 구애한다는 뜻. 전한(前漢) 시대 문인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부호의 딸인 탁문군(卓文君)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지어 부른 노래의 제목이기도 함)이라고 부르죠.”

그 말에 봉황이 눈을 반짝 빛내더니 진지한 얼굴로 계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께서는 정말로 천인(*天人: 천상에서 내려온 사람, 학문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시구려. 부디 이 곡이 오래도록 전해지길 바라오.”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운율을 곡으로 써낸다고 해도, 이걸 연주할 수 있는 이는 세간에 몇 없을 거예요. 하지만 그때까지 계모가 잘 기억하고 있다가 소실되지 않도록 잘 간직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소, 계 선생.”

“고맙긴요,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 할 건 저이지요. <봉구황>을 도우께 직접 듣다니 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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