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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744화 (744/892)

744화. 깊은 믿음

저 멀리 어느 섬 위에서는 호운과 어린 윤청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호운은 <군조론>을 가슴 앞에 받쳐 들고 있었지만, 이때 두 사람은 이미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오동나무에 온 정신을 빼앗긴 후였다.

“정말 듣기 좋다, 좀 더 길었으면 좋겠네…….”

윤청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호운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정말 아름다웠어. 봉황의 노랫소리겠지?”

“응, 그럴 거야.”

계연이 그 사악한 요녀를 잘 처리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호운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기다리니 오동나무에서부터 계연이 바람을 몰고 이리로 왔다. 오동나무로 갈 때는 소매를 휘둘러 요괴를 밀어붙였으나 돌아올 때는 혼자였다.

계연이 섬에 내려서는 걸 본 호운과 윤청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계연은 호운이 들고 있던 서책에 시선을 던졌다.

“가자, 인제 그만 돌아가야지.”

계연은 호운과 어린 윤청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었다. 잠시 후, 주위가 다시 부옇게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 * *

우규산, 호운이 머무는 동굴 안에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붉은 여우의 몸이 살짝 움직였다. 마침내 눈을 뜬 호운은 몸이 조금 피곤하게 느껴졌지만, 눈빛만은 맑고 깨끗했다.

호운은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통통 뛰어 동굴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동굴 밖의 세상을 바라보던 그는 무언가를 확신하고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무사히 돌아왔네……. 아무리 꿈이라 해도 선생님은 여전히 대단하셨어!”

이렇게 중얼거리던 호운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니지! 분명 선생님께서 돌아오신 거야! 내가 봉황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알겠어? 게다가 봉황의 노랫소리까지 상상해낼 수는 없어!”

봉황의 아련한 노랫소리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호운의 마음이 다시 요동쳤다. 그저 ‘구성지다’라는 말로는 그 아름다움을 형용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정말 선생님께서 날 구해주신 걸까? 그래, 분명 선생님께서 구해주신 거야!”

마침내 이런 결론을 얻은 호운은 피곤한 몸과 정신을 이끌고 얼른 산자락을 뛰어 내려갔다. 그렇게 산등성이 몇 개를 뛰어넘어 영안현에서 가장 가까운 바깥쪽 돌산에 이르렀다. 이곳은 예전에 계연이 상처를 회복한 어린 여우를 산으로 돌려보내 준 곳이었다.

호운이 멀리 내다보니 영안현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때는 이미 석양이 지는 시각이라, 영안현에 있는 그의 ‘적수’들이 가장 활발히 날뛰는 시각이었다. 그래도 호운은 돌산을 단번에 뛰어내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영안현으로 내달렸다.

산자락 끝에서부터 현성까지의 거리는 호운에게 있어 이제 별것도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도 채 이각(30분)도 되지 않아 현성 바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인문(人文)의 역사가 오래되고 줄곧 평안했던 영안현은 밤이라고 해서 성문을 닫는 규칙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고작해야 수비 두 명이 성문 앞을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호운도 별문제 없이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붉은 여우는 거리와 골목을 내달리며 최대한 개 냄새가 적게 나는 곳으로만 방향을 잡았다. 게다가 일부러 거리보다는 건물의 옥상을 뛰어넘으며 이동했는데, 그의 오랜 경험에 의하면 개 대부분은 옥상까지 올라오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가 영안현에 돌아오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보니, 이전의 적수들이 그 습관을 바꿨는지 아니면 새로운 적수가 나타났는지는 호운이 앞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였다.

어쨌든 호운은 여우보다는 고양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천우방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호운이 거안소각의 대문 앞에 서니, 문이 반쯤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문틈을 통해 안쪽을 살펴보니, 계연은 마침 뜰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고 누군지 모르는 녹색 옷의 여인이 한쪽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여인을 발견한 순간 호운의 머릿속에는 느낌표가 가득 떠올랐다.

‘계 선생님께 여인이 생겼단 말이야? 아니, 아니, 그건 불가능해!’

호운이 문가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일찍이 그의 기척을 느낀 계연은 호운이 계속 들어오지 않는 걸 보고 이렇게 불렀다.

“호운이구나? 바깥에 서서 뭐 하니? 들어오렴.”

“예…….”

호운이 냉큼 대답하고는 대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와 다시 꽉 닫았다. 그런 뒤 뜰 안의 돌 탁자 앞으로 폴짝폴짝 뛰어와 물었다.

“선생님, 조금 전에 선생님께서 절 구해주신 거지요?”

계연은 손에 든 꿀차를 비우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은편의 돌의자를 가리켰다.

“앉으렴. 조낭이 꿀차를 넉넉하게 끓였단다.”

“조낭이요?”

호운이 무의식적으로 녹색 옷을 입은 여인을 흘끗 쳐다보자, 여인이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호운아, 내가 바로 저 대추나무야!”

조낭이 찻잔을 들어 호운에게 차를 따라주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대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아! 대추나무구나! 드디어 정령이 되었구나!”

호운이 고개를 들어 대추나무를 바라보다 다시 조낭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제 초목(草木)과 동물의 수행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본체와 정령의 개념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낭과 대추나무가 자신의 눈앞에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에도 놀라지 않았다.

“꿀을 좀 많이 넣어줄까?”

조낭이 이렇게 묻자 호운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곧장 이렇게 물었다.

“사실 나 차 마시는 것 별로 안 좋아해. 그냥 꿀만 담아주면 안 돼?”

“그래.”

조낭은 전혀 개의치 않고 쟁반 위에서 작은 도기를 끌어와, 호운의 찻잔 안에 꿀을 가득 퍼담아 주었다. 계연조차 흘끗 쳐다볼 정도였다.

“하하하하, 역시 조낭이 제일 좋아!”

호운이 기뻐하며 이렇게 소리치다가, 계연이 자신을 쳐다보는 걸 느끼고는 얼른 이렇게 덧붙였다.

“선생님도요, 선생님도 제일 좋아요!”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호운이 찻잔을 부여잡고 꿀을 핥아먹는 걸 가만히 보다 보니, 계연은 그가 이제 세상 물정도 잘 알고 도행도 높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어리게만 보였다.

꿀을 처음 맛본 순간, 호운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맑고 향긋한 기운이 사지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에 더해 정신적인 피로도 확 풀리는 것 같았다.

계연은 호운이 피로를 많이 회복한 걸 보더니, 자신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 구미호가 처음 나타난 게 언제지?”

계연의 물음에 호운이 고개를 들어 입가에 묻은 꿀을 핥더니, 가만히 기억을 떠올려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막 두 번째 꼬리를 만들어냈을 때예요. 그러니까 대략 2, 3년 전이에요. 제가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나타나 처음에는 제 환상인 줄 알았어요. 그러다 나중에야 그 여인은 결코 환상이 아니고 무척 위험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금제(禁制)를 설치하려고도 해봤는데,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더라고요.

참, 선생님, 그 구미호를 어떻게 하셨어요? 다음에도 또 나타날까요?”

계연은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른 후 꿀을 한 숟갈 섞더니,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네가 수련을 닦을 때 심마(心魔)의 형상으로 마음속에 나타나지는 못할 거야. 그 여인의 정체는 옥호동천의 구미호인 도흔이란다. 이번에는 그저 신념(神念)이 약간 손상되었을 뿐이니, 후에 바깥세상을 돌아다니게 되거든 조심하렴.”

“예? 정말로 구미호였다고요……? 큰, 큰일이네요…….”

호운은 불안한 와중에도 잊지 않고 꿀을 두어 번 핥은 뒤 계연을 향해 주저하며 말했다.

“선생님, 그 여인은 구미호고 저는 그저 여우 요괴일 뿐인데, 제가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막을 수 있을까요? 제가 계속 선생님을 따라다니지 않는 이상, 아무 때나 찾아와서 저를 죽일 수도 있을 텐데요…….”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본 것은 현재의 너이고, 본 것도 기운이 완전하지 못한 여우의 본체일 뿐이니 말이야. 후에 너는 환골탈태를 하고 인간의 모습을 갖추게 될 거야. 구미호라고 해도 무소불위의 존재는 아니니, 아무런 정보도 없이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낼 수는 없단다. 네가 그녀를 꿈처럼 느끼는 것처럼, 이는 구미호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저 그 구미호와 가까운 거리에서 부딪히지만 않으면 된다.”

호운은 꿀이 든 찻잔을 든 채로 무언가 생각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저는 언제나 운이 좋았으니, 설마 그렇게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지진 않겠죠?”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조낭이 웃으며 말하자 호운도 적잖이 안심했다.

“그저, 저랑 선생님이 이렇게 친한데, 최근 몇 년 동안에는 몇 번 만날 수가 없었잖아요. 아, 그렇다고 절 보러 오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건 아니에요. 선생님께서 바쁘신 건 잘 알고 있어요.”

“꿀부터 먹으렴. 앞으로는 조낭이 이곳에 있을 테니, 시간이 되면 자주 놀러 오거라.”

호운은 조낭을 한번 보더니, 찻잔에 든 꿀을 보며 환히 웃었다.

계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소매 안에서 문방사우와 그리 크지 않은 금문지(*金紋紙: 무늬 있는 금빛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그러더니 금향묵으로 먹을 간 뒤, 금문지 위에 글자를 적고는 먹물을 잘 말려 호운에게 건넸다.

“이걸 주마. 네가 그렇게까지 운이 없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네가 계속해서 그렇게 재수가 없지는 않을 거라고 중얼거리는 걸 보니 오히려 그 구미호를 꼭 마주치게 될 것 같구나. 이 종이를 잃어버리지 말고 잘 지니고 있다가, 만일 마주치게 되면 속으로 묵념하면 된다.”

“이게 뭔가요? 제게 주시는 건가요? 선생님께서 쓰는 부적이에요?”

호운은 흥분한 표정으로 연달아 질문했다. 계 선생님께서 자신에게 무언가를 준 것이 아주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동안 계 선생님께 많이 배우긴 했지만, 이 금빛 종이는 척 봐도 범상치 않아 보여 기대가 되었다. 호운은 얼른 종이를 받더니 그 위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나는 그 어린 붉은 여우가 아니다……. 저어, 선생님, 이게,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요?”

“하하하하…… 효과가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언제 널 속인 적이 있었느냐?”

“그건 그렇죠…….”

호운은 계연에 대해 깊은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계 선생님의 저 놀리는 듯한 표정이 그를 조금 불안하게 했다. 이에 그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것보다는 당신은 내가 보이지 않는다나 당신은 나를 모른다가 더 낫지 않나…….”

“오? 그 말도 맞긴 하구나. 그럼 그렇게 다시 써줄까?”

계연이 웃으며 이렇게 묻자, 호운이 즉시 종이를 풍성한 꼬리털 안에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아뇨, 아뇨! 이것도 좋아요. 충분해요!”

호운은 다시 찻잔을 손에 쥐고 꿀을 핥아먹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계 선생님, 혹시 육 산군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시나요?”

구미호의 신념이 빚어낸 심마(心魔) 아래에서 이토록 오래 버티고도 정신과 마음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호운은 그야말로 괄목상대(*刮目相對: 남의 학식이나 재주가 놀랄 만큼 부쩍 늘다)라고 일컬을 만했다. 이에 계연은 한층 더 안심되어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

“알지. 육 산군은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육오(陸吾)라는 가명으로 불린단다. 음, 그리고 우패천이라는 이름의 순박한 소와 함께 지내는데, 그도 요즘에는 우마(牛魔)라는 가명을 쓰고 있지. 그들은 함께 무척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단다.”

요괴들은 이름을 소박하게 지었으므로, 호운은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우패천이 소 요괴라는 걸 알아차렸다.

“무슨 중요한 일인데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요?”

그러자 계연은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었다. 이를 본 호운도 계연의 뜻을 눈치챘지만, 그렇다고 크게 낙담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타고난 자질은 육 산군과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크게 뒤떨어지지도 않았다. 꾸준히 수행을 닦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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