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5화. 꿈을 꾸는 이, 잠에서 깨어난 이
계연이 장안법을 펼치자 짙은 안개가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가더니, 어느새 새로 만든 하얀 법의(法衣)가 입혀졌다. 원래 입고 있던 푸른 장삼은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어차피 탁자 위에 모은 성사(星絲)는 법의 세 벌을 만들기 위한 양이었으니, 입고 있던 푸른 장삼도 성사와 합쳐야 했다. 물론, 새로 만든 옷을 얼른 입어보고 싶은 생각이 제일 크긴 했다.
새로 만든 법의는 겉으로 보기에 그가 성사를 꿰매 넣기 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몸에 닿는 감촉도 무척 익숙했으나, 그보다는 더 부드럽고 살짝 시원하기까지 해 옷감이 더 고급스러워진 느낌이었다.
옷을 바꿔입고 다시 자리에 앉은 계연은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여러분, 특히 강 도우, 계모(某)가 법의로 포전인옥(*抛磚引玉: 남의 훌륭한 의견을 듣기 위해 먼저 자기의 미숙한 의견을 내놓는다는 뜻)을 했으니, 여러분도 몇 마디 가르침을 나눠주시지요.”
계연은 계속해서 바느질을 이어가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강설릉도 이제는 처음 법의가 완성된 것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에서 벗어나 이미 마음을 가라앉힌 뒤였다.
“계 선생님의 문련(文煉) 방식은 과연 비범하시네요. 덕분에 설릉의 견식이 크게 늘었습니다. 이왕 선생님께서 문련으로 운을 떼셨으니, 저희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죠.”
강설릉이 말하는 문련이란, 일반적으로 단로의 진화(眞火), 진법이나 금제, 반복적인 제련이 필요 없는 제련 방식을 뜻했다. 혹은 반드시 이를 전제로 해야 하는 제련 방식이 아닌 경우였다. 그와 완벽히 대비되는 것이 바로 예전에 계연이 제련했던 곤선승이었다. 곤선승은 무련(武煉)에 속했다.
무련을 펼치는 이는 도행이 높을 수도 있고 낮을 수도 있었지만, 문련은 결과물이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전자의 도행이 높고 심오해야 했다.
“하하하, 정말 재밌겠군요. 연모에게 마침 딱 알맞은 법기(法器)가 있습니다.”
연백평은 소매 속에서 귀각(*龜殼: 거북의 등딱지)을 하나 꺼냈다. 그가 손으로 귀갑을 살짝 흔들자,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댕그랑 소리가 났다.
“이것은 제가 일찍이 귀복(*龜卜: 거북의 등딱지로 치는 점괘)을 칠 때 쓰던 것인데, 한 번도 제련을 거친 적은 없으나 지금은 어느새 그럴듯한 법기로 거듭났지요. 이 귀각은 스스로 영성(靈性)도 띄고 있습니다. 문련의 신묘함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기물이 일단 법(法)을 얻으면, 거기서 생겨나는 신묘한 작용에 제약이 없다는 겁니다. 게다가 금제의 구속도 없으니, 변화의 방향도 기대해 볼 만 하지요.”
* * *
이날 밤 나눈 대담은 마치 보통 사람들이 나눈 평범한 대화와 비슷했다. 그들이 얻은 것은 연기(*煉器: 법기를 제련하는 것)에 대한 얼마간의 깨달음과 계연이 옷을 짜는 것을 바라본 것이 전부였다.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계연은 손을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두 눈을 감은 채 다시 한번 탄천수처럼 반수면 상태로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계연은 탄천수를 따라 자유롭게 유영했지만, 장소는 더 이상 바다 위가 아니라 땅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중이었다. 아래에 보이는 대지는 조금 황량해 보였는데, 곳곳에 괴물이 산재해 있고, 산이며 지형이 조금 괴이해 보였다.
물론 그 괴물들의 실제 거리는 서로에게서 꽤 멀었지만, 탄천수의 속도가 빠르고 계연이 상공에 떠 있는 데다, 저마다 계연의 주의를 끌 만한 생김새였기 때문에 그들이 밀집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 것이었다.
산 하나에 토끼가 백 마리 있으면 별것 아니지만, 산 하나에 맹호가 네다섯 마리나 산다면 무척 많아 보이는 이치처럼 말이다.
이런 광경을 보니 아무리 계연일지라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치 평범한 사람이 되어 무시무시한 악몽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한편, 바깥 세계 탄천수의 관성대 위에는 몇 사람이 모여 앉아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계연은 때때로 한두 마디 얹기도 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의식 한 줄기가 탄천수와 함께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지난번 함께 꿈속을 유영한 후로, 소삼은 계연을 친밀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계연은 거대한 법신(法身)이 아니라, 실제와 같은 모습으로 탄천수의 머리 위에 서 있었다. 바로 강설릉을 비롯한 위미종 수사들이 자주 서 있곤 하는 위치였다.
주위에는 환한 빛도 있고 사물도 또렷한 실체도 갖추고 있었으나, 어쩐지 계연은 공기 중에 쉼 없이 꿈틀대는 불안정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때로 그가 대지를 내려다보면 풍경이 약간 모호해 보일 때도 있었다. 물론 이는 이곳이 소삼의 꿈속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계연은 주로 아래의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산맥과 강줄기는 조금 어둑어둑해 보였다. 이곳은 바람도 거센 데다 비까지 내리고 있었지만, 어쩐지 하늘에는 태양이 떠 있었다. 다만 수명이 다해가는 전구처럼 그 빛이 흐릿할 뿐이었다.
“너는 어릴 때부터 위미종에서 자라왔으니, 아래에 있는 저 많은 괴물을 네가 직접 만나봤을 리가 없겠지. 그럼 저것들은 네가 상상해낸 존재거나, 네 혈맥(血脈)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기억이겠구나?”
계연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소삼도 계연의 말을 들은 듯 입을 열어 우렁찬 울음소리를 냈다.
“오우우-!”
그 소리는 현실의 탄천수가 내는 소리보다 훨씬 컸으므로, 진동의 여파로 인해 소삼 주위에 낀 안개에 파문이 생겨났다. 그러자 주위의 비바람도 뚝 끊겨 산산이 부서져 내리며 멀리까지 그 파문이 퍼져나갔다.
“크르릉-!”
“아우우-”
“커헝!”
그러자 어둑한 대지 위에서부터 여러 괴물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높고 낮은 여러 소리 중에는 어느 존재의 강력한 기운이 연기처럼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계연이 시선을 내려 아래를 훑어보니, 포효한 괴물들의 수는 계연이 관찰한 괴물 중 열에 한두 마리 정도였고 대부분은 기척을 숨기고 숨어있는 상태였다.
“재미있구나, 저들 눈에 네가 꽤 위엄이 있는 모양이지?”
계연이 소삼을 칭찬하자, 소삼은 더욱 쩌렁쩌렁한 목청으로 크게 울었다. 그 진동은 아래까지 전해져 산간이 미세하게 흔들렸으며, 하늘에는 우레와 같은 울림이 퍼져나갔다.
계연이 이런 말을 한 연유는, 소삼이 지나는 곳마다 아래쪽의 괴물들이 맹렬히 짖기만 할 뿐 누구도 상공으로 올라오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들 중 누구도 날지 못한다기보다는 그들이 소삼을 꺼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우우- 오오-.”
탄천수는 잔뜩 흥이 오른 듯,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계연마저 소삼이 너무 과하게 흥분한 게 아닌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때, 저 멀리 보이는 우뚝 선 산맥의 중앙에서 환한 빛이 번졌다.
“크르릉……!”
콰앙!
소삼이 그 산맥에 가까워지자 위엄 넘치는 포효가 들리더니, 산맥이 폭발하듯 부서져 내리며 온 하늘에 흙먼지가 날렸다. 공중에 솟구친 돌멩이들은 심지어 소삼의 몸을 때릴 정도였다.
온몸에 날카로운 기운을 두르고, 두 눈에 요사한 빛이 번뜩이는 괴물이 산맥에 뚫린 구멍에서부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산 정상에 똬리를 틀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그 거대한 한 쌍의 눈은 마치 핏빛을 띤 전구처럼 보였다. 게다가 괴이하게도 괴물의 출현과 동시에 주위가 더욱 어두워졌다.
‘용?’
계연의 눈에 이 괴물은 용과 생김새가 8, 9할 정도 비슷했다. 다만 온몸을 덮은 비늘이 좀 더 날카로워 보였고, 전체적으로 형체가 용보다 더 가늘고 길었다. 하지만 그 냉혹해 보이는 괴물은 상공으로 날아오르지는 않았다.
소삼은 이 괴물이 나타난 후로 잠시 포효를 멈췄으나, 상대방이 날아오르지 않는 걸 보고 다시 마음껏 울부짖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소리는 뒤로 갈수록 더욱 크고 쩌렁쩌렁하게 변했다.
계연이 느끼기에 소삼은 지금 잔뜩 위세를 부리며 우쭐대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어떤 상황에 맞닥뜨린 언젠가의 호운을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계연이 눈치채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때 그는 소삼의 머리 위에 서 있었는데, 비록 그 모습이 쌀알만큼 작았으나 시종일관 맑은 기운이 그 주위에 맴돌고 있어 그의 등 뒤와 상공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언뜻 보면 화염이 솟구치는 듯한 모습의 광륜(*光輪: 둥근 빛무리)이 그의 뒤로 떠올라 있는 듯했다.
그리고 계연도 용과 비슷한 괴물을 바라본 순간,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괴물의 거대한 두 눈에 자신의 형체가 비쳤기 때문이었다.
이를 깨달은 계연은 차마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심정이었다. 알고 보니 소삼은 계연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 것이었다. 그야말로 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린다는 뜻으로,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린다는 뜻)였다.
다만…….
계연이 고개를 돌려 뒤쪽을 아무리 살펴봐도, 그의 눈에는 아무런 이상 현상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두침침한 하늘에 비바람이 거세게 내리치고, 빛을 잃은 듯한 태양이 떠 있을 뿐이었다.
* * *
한편 관성대 위의 계연은 이미 세 번째 법의를 완성한 후였다. 그는 눈을 감고 탁자에 기대앉아, 오른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었다.
강설릉을 비롯한 이들은 점차 목소리를 줄였다. 계연이 입을 떼지 않은 지 이미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선생님께서 잠이 드셨군…….”
연백평이 그제야 깨달은 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자, 옆에 앉은 거원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설릉은 미간을 살짝 모은 채 ‘계연 이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오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밤새 별빛으로 실을 짜고, 황고(*荒古: 상고, 아주 오래된 옛날)를 여행하니 정신이 피로하구나. 일단 조금이라도 자야겠어…….”
그때, 계연이 작은 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의 목소리는 고요한 밤에 더없이 또렷하게 들렸다.
“태양과 달의 운행은 마치 드넓은 바다에서 나온 듯하고, 은하수의 찬란함도 마치 그 드넓은 바다에서 나온 듯하구나(日月之行, 若出其中, 星漢燦爛, 若出其里: 조조(曹操)의 시 <관창해(觀滄海)>의 한 구절)…….”
취한 듯 몇 마디를 중얼거린 계연은 곧 호흡이 길고 일정해지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후로 더는 외부 세계에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계연과 반대로, 탄천수인 소삼은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그의 몸 전체에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우우-”
“사조!”
주섬이 돌연 강설릉을 향해 소리치자 강설릉도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잠시 계연을 바라보더니, 탄천수의 머리가 있는 전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백평과 거원자도 알 수 없는 변화를 느끼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안개가 옅어졌군?”
“정말이네요, 확실히 옅어졌습니다!”
강설릉은 미간을 굳게 찌푸리더니, 남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 뒤 전방을 향해 날아갔다.
“소삼이 깨어날 모양입니다! 탄천수가 깨어나면 반드시 변화가 뒤따릅니다. 계 선생님께서 언제 깨어나실지 모르니, 그때까지 두 분께서 지켜봐 주세요. 저는 어서 가봐야겠습니다. 섬아, 너는 여기 남아 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