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0화. 기묘한 처지
남자가 말을 마친 뒤 포효하자, 그가 내뿜는 요기(妖氣)가 마치 실체화된 화염처럼 온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뒤이어 그가 입은 가죽옷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온몸의 털도 점점 자라나더니, 사지가 팽창하며 백 장(약 300m) 길이의 거대한 표범으로 변했다. 비록 탄천수에 비하면 여전히 작은 크기였으나, 그가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요기 때문에, 기세만 보자면 탄천수를 억누를 정도였다.
“저 탄천수가 저토록 거대하니, 죽이고 나면 반경 천 리 안의 요괴들이 모두 포식할 수 있겠군. 게다가 탄천수가 지닌 영기와 해와 달의 정화, 선기(仙氣)도 맛볼 수 있겠지! 하하하……!”
“좋은 생각이군!”
본래 모습인 표범으로 돌아온 요왕은 탄천수의 등으로 돌진하더니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러 핏빛을 뿌렸다. 그러자 탄천수가 몸을 뒤틀며 공격을 피했다. 다른 요왕은 검 한 자루를 불러내더니, 유성 같은 속도로 강설릉에게 덤벼들었다. 그가 뿜어내는 요기는 날카로운 검광(劍光)으로 변해, 그 기세가 자못 웅장해 보였다.
강설릉이 손에 든 불진을 털자, 실선들이 하나로 굳어져 날카로운 검처럼 변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흉흉한 기세로 날아오는 묘운 요왕의 검을 맞받아쳤다.
챙-!
불진이 날카로운 끝이 요검(妖劍)에 닿자, 맑은소리가 울려 퍼지며 주위에 광풍을 일으켰다. 그 바람은 주위의 혼탁한 기운과 먼지를 깨끗하게 날려 보냈다.
묘운 요왕은 미소를 띤 채 검을 거두어 초식을 바꾸더니, 안개로 변해 눈 깜짝할 사이에 강설릉의 뒤쪽에 나타났다. 동시에 여러 개의 요검이 동서남북 사방에서 나타나 검광을 내뿜었다.
강설릉이 불진을 흔들어 불러낸 흰빛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 보호했다. 그와 동시에 요왕의 검술을 상대하며 팽팽히 맞섰다.
비록 기세가 흉흉하거나 선기(仙氣)가 표표히 날리는 광경은 아니었으나, 검광의 변화는 무섭도록 빨랐고, 날카로운 검기(劍氣)로 인해 계속해서 탄천수의 머리 부근에 희미한 상흔이 남고 있었다.
더욱이 사방팔방으로 치솟은 검의(劍意)는 탄천수 머리 부근의 온도를 계속해서 떨어뜨리다가 결국에는 강설릉의 발아래에 서리를 얕게 내려앉게 할 정도였다.
요왕의 검기와 검의는 무섭도록 예리하고 무척 비범했다. 전문적으로 검술을 수련하는 검선(劍仙)에 비해, 요왕이 쓰는 검술은 무인들의 검법과 수행자들이 쓰는 검결(劍訣)을 조합한 듯 보였다. 강설릉의 대응도 무척 수준급이라, 불진을 들고 있는 선녀가 아니라 오히려 검객이라 이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를 보던 계연은 놀라움에 눈을 반짝였고, 거원자와 연백평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법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이때 요왕인 표범이 포효하며 탄천수의 등 위에 내려앉더니, 그의 살을 찢으려 했다. 그러나 탄천수는 피부가 두껍고 단단해서, 요왕이 낸 상처로는 탄천수가 통증을 느끼지도 못했다. 오히려 탄천수의 몸에서 신령스러운 빛이 크게 일뿐이었다. 탄천수는 공중에서 요동치는 거대한 금산(金山)처럼 보였다.
“하하하하, 네 놈 가죽이 더 두꺼운지, 아니면 내 발톱이 더 날카로운지 어디 겨뤄보자! 얼마나 버티는 보자꾸나!”
표범 요왕이 다시 한번 공중을 향해 포효하자, 십여 갈래의 선광(仙光)이 공중에서부터 찬란한 색채를 띠며 날아왔다. 바로 주섬을 선두로 한 십여 명의 위미종 제자들이었다.
“이 요물이 감히!”
“죽어라!”
주섬은 사자매(師姉妹)들을 이끌고 공중에서부터 탄천수의 등 위로 내려왔다.
“포진(*布陣: 전쟁·경기 등을 치르기 위해 진을 치다)!”
뒤이어 명령이 떨어지자, 십여 명의 위미종 제자들은 원래 깔려 있던 진법의 힘을 빌려 거대한 표범과 한데 엉겨 맞붙기 시작했다.
계연은 선인과 요괴의 싸움을 잠시 지켜보다가 거원자와 연백평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이 상황은 무척 특수했기 때문에, 어떻게 나서는 게 좋을지 잘 생각해봐야 했다.
“계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때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계연의 귓가에 들려왔다. 하지만 거원자와 연백평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소매 속에 있는 해치 족자에서부터 들려온 것이었다.
계연은 입술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서,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따라 다시 소매 속으로 전음을 보냈다.
“해치 어르신, 보셔서 아시겠지만, 탄천수는 곤의 피가 꽤 많이 섞였어요. 소삼의 혈맥은 계모가 일전에 만났었던 거경 장군이라 불리는 고래 요괴보다도 곤과 더 가까워요.”
“흥,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구나. 그걸 이 어르신이 설마 모르겠느냐? 위미종 계집아이들과 저 두 사람만으로는 잠시 탄천수를 보호할 수 있겠지만, 탄천수는 결국 이성을 잃고 남황의 요괴들을 먹어 치울 것이다. 그럼 더욱 많은 요괴가 탄천수를 상대하러 나타나게 되겠지. 저 탄천수의 입안은 무저갱(*無底坑: 바닥이 없이 깊은 구덩이)이나 다름없으니, 영원히 배부르지 못할 것이다. 이대로 남황에 놔둬 요괴들의 먹이가 되느니, 내가 먹는 게 낫지 않겠느냐?”
‘이런데도 네가 해치와 도철(*饕餮: 전설상의 흉악하고 탐식하는 야수)이 섞인 존재가 아니라고?’
계연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으나, 동시에 탄천수의 영원히 배부르지 못할 거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는 해치의 말을 믿었으나, 그래도 일단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떻게 될지 한번 지켜보죠.”
계연의 말에 소매 속에서는 다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계연은 따로 계획을 속으로 세우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가만히 앉아있는 게 그리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계연은 탄천수가 깨어나 허기를 느끼고, 배를 채우는 과정에서 천도(天道)의 겁을 불러와, 마침내 변화를 겪게 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교룡이 진룡으로 변하려고 할 때 그들은 물길을 타며 힘을 얻는다. 그 과정은 힘을 빌리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겁’이기도 했다. 그들의 목적은 인간 세상에 물로 인한 재난을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라 진룡의 몸을 얻기 위함이었다. 탄천수의 지금 상황도 그와 비슷했다.
기나긴 세월 속에서 위미종 수사들은 몇 차례 탄천수의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내 종문(宗門)의 대진법 안에서 보호되고 있었으니 그건 ‘진짜’라고 볼 수 없었고, 그런 이유로 모두 실패했을 것이다. 해치의 말을 통해 계연은 이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때 탄천수는 극도의 허기를 느껴 거의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오직 강설릉이 건네는 말만이 잠시나마 탄천수의 정신을 차리게 해줄 뿐이었다. 바로 이것이 탄천수의 ‘겁’이었다. 이것을 견뎌내면 금색 비늘을 지닌 물고기가 바람을 만나 용이 되는 격이 될 터이고, 견뎌내지 못한다면 여태 쌓은 수행을 모두 잃을 가능성이 컸다.
양황 땅은 올바른 길을 걷는 수행자들이 가장 꺼리는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흑황은 온갖 삿된 것들이 무법천지로 들끓는 지역이었고, 남황은 그보다 조금 나아서 최소한 각계(各界)와 암묵적인 합의를 맺고 있었으며, 명의상으로도 흑황과 분명한 경계를 긋고 있었다. 사적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수행계와 서로 합의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흑황 땅의 요마들처럼 악랄하거나 미친 짓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또 이들이 좋은 이들이냐 하면 당연히 그렇지도 않았다. 남황에 가득 깔린 장기(*瘴氣: 땅에서 일어나는 독이 있는 기운)와 악기(惡氣)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연도 진흙에서 태어났지만,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을 확률이 근묵자흑(*近墨者黑: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과 사귀면 물들기 쉽다는 말)보다 훨씬 낮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계연은 강설릉의 소위 선요불양립(*仙妖不兩立: 선인과 요괴는 양립할 수 없다)이라는 ‘고리타분한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은 이들과 한배에 탄 상황이었다. 위미종은 이성을 잃어 통제되지 않는 탄천수를 결코 버리고 가지 않을 것이고, 계연을 비롯한 세 사람도 절대 이대로 떠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이때 남황의 두 요왕이 공격해오니,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이 두 요왕은 당연히 선량한 자들이 아니었고, 계연도 법안으로 이를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상징성 있는 남쪽 요마계(妖魔界)의 대표였다.
남황의 요마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규칙과 묵계(*默契: 말없이 성립된 약속)가 있었다. 지난번, 이 묵계가 깨진 것은 어느 큰요괴가 천기각의 진귀한 선단(仙丹)을 훔쳤고, 뒤이어 수많은 요마가 남황에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이에 장검산과 천기각이 연합해 요마들을 도살했고, 형산의 산신마저 진노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 때문에 남황의 나이 많은 요괴와 요왕들은 비교적 침묵을 유지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 묵계를 깬 것은 탄천수였다.
계연은 탄천수가 성공적으로 변신할 수 있길 바랐고, 혹여나 실패하더라도 최소한 요마의 공격으로 이성을 찾았으면 했다. 그렇게 되면 이 모든 것을 되돌릴 기회가 있었고, 남황의 요왕들도 탄천수와 이야기를 나눠줄 여지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수리건곤을 펼쳐 탄천수를 데리고 가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탄천수는 극히 짧은 시간 안에 수리건곤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막대한 법력을 소모하게 될 거라는 사실은 젖혀 두더라도 계연은 수리건곤술이라는 묘법의 핵심을 탄천수로부터 얻은 데다, 탄천수의 몸속에는 작지만 독자적인 세계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수리건곤술은 계연의 소매 속 세계에 상대를 가두는 것이었는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일정 경지에 이른 이들은 가둘 수 없었다.
탄천수는 수행 경지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대신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존재였다. 최소한 탄천수가 이성을 되찾지 않는다면, 계연으로서는 그를 가둘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닥쳤을 때 탄천수가 계연에게 협조해야만, 수리건곤술로 탄천수를 소매 속에 넣고 강설릉 등의 일행과 함께 남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 * *
한편, 이 시각 어느 정괴는 극도로 절망적인 상황 속에 빠져있었다. 그는 전방의 빛이 점점 멀어지는 걸 느끼며 탄천수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자신을 집어삼키는 알 수 없는 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 끝을 알 수 없는 암흑이 펼쳐져 있었다. 탄천수의 입안에는 비록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을만한 날카로운 이빨이 달려 있지는 않았지만, 일단 암흑 속에 들어오자 온몸의 법력이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끝났구나, 결국 이렇게 죽게 되다니…….’
그때 암흑 속에서 한순간 부연 안개가 일더니, 정괴는 그와 함께 거대한 괴물의 입속으로 집어삼켜진 요마와 정괴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거대한 늑대나 새도 있었고, 고양이처럼 보이는 존재도 있었으며, 사람의 모습을 한 것도 있었다.
그 요마들은 모두 안개 속에 떠올라 있었는데, 주위는 온통 암흑 일색이었고 안개만이 옅은 빛을 뿜고 있었다. 보아하니 탄천수가 삼킨 요마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이곳에 있는 듯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이미 죽은 것처럼 보였으나, 요마는 그들이 자신처럼 아직 살아있다고 느꼈다. 그 자신도 현재 다른 요마들과 마찬가지로, 눈을 감은 채 안개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죽지 않았구나!’
이를 깨달은 정괴는 즉시 흥분에 찼으나, 곧이어 공포와 무력감에 휩싸였다. 이곳에는 시간의 개념도 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기도 했고 벌써 몇 년이나 지나버린 것 같기도 했다.
정괴는 자신의 영력(靈力)과 다른 요괴들의 요력(妖力), 마두(魔頭)의 마기가 한 자락 한 자락씩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휘발’에 가까웠다. 몸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한편 주위의 안개는 더욱 그 범위를 늘려나가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정괴는 이 과정이 무척이나 길고 길 거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길다 못해 자신의 의지가 전부 깎여나갈 정도로 말이다. 그는 다른 요마와 정괴들이 지금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다. 저들이 모두 살아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서로 소통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바에는 단번에 죽는 게 나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