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화. 북목의 추측
“잠시만요.”
뒤늦게 자리를 뜨던 정괴와 요괴들은 계연의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의 요마들은 모두 떠나고 자신들을 포함한 십여 명만이 탄천수 위에 남아있었다. 이에 그들은 저절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점차 멀어지는 요마들을 바라보았다. 떠나는 이들 중 누구도 탄천수 위에 남아있는 그들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예, 선장, 무슨 분부가 있으십니까?”
대답한 이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생김새를 지닌 정괴로,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자 계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두려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계모(某)가 여러분을 멈춰 세운 것은 결코 해를 끼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강 도우께서는 그 단약을 미련 없이 내주셨으나, 이 단약은 보기보다 훨씬 뛰어난 효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황이 어떤 곳인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시겠지요. 특별히 여러분이 사기(邪氣)를 지니지 않은 점을 참작하여, 계모가 약간의 도움을 드리려 합니다.”
계연은 그리 많은 설명을 하지 않고, 소매 속에서 곧바로 낭호필을 불러냈다. 그리고는 눈앞에 수증기를 모은 다음, 낭호필을 물에 적셔 먹물을 대신해 공중에 ‘영장(靈藏)’이라는 두 글자를 썼다.
글자들은 마치 공중에서 흐르는 물결처럼 보였고, 그 위에 서린 영광(靈光)은 약하지만 생생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계연이 소매를 흔들자 물빛이 십여 갈래로 갈라지더니, 이곳에 남은 요괴와 정괴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요괴와 정괴들은 깜짝 놀라 자신의 몸을 두리번거렸다.
“됐습니다. 여러분이 지나친 일만 벌이지 않는다면, 3년 안에는 특별한 동정을 보이지 않을 거예요. 안전한 곳을 찾아 수련하세요.”
요괴와 정괴들은 그제야 깨달은 얼굴로 계연을 향해 예를 올렸다.
“선장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예를 올린 이들은 저마다 둔술을 펼쳐 떠나갔다. 자고로 필부는 죄가 없으나 옥을 품고 있는 것이 죄(匹夫無罪, 懷璧其罪: 재물이 화를 초래한다는 뜻)라 했다. 비록 많은 요마들이 저마다 단약을 얻었으나, 그중 과연 몇 명이 무사히 그것을 복용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떠나고 탄천수 위가 조용해지자 계연이 남은 도우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도 이만 가죠. 연 도우, 마두의 종적은 계속 쫓고 있나요?”
연백평은 이미 준비를 마치고 계연의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남쪽 1,200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속도를 늦춘 걸 보니, 이제 안전하다고 느껴 천천히 상처를 치료하려는 것 같습니다. 다만 괴이한 요광을 내뿜던 그 요괴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네, 마두가 어디 있는지만 알면 충분해요. 어서 가죠.”
“예.”
위미종 수사들이 진법 설치를 마치자, 탄천수의 몸이 진법에 뒤덮였다. 뒤이어 이쪽을 주시하는 뭇 요괴들의 눈에는 서남 방향을 향해 선광(仙光)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 * *
한편, 서남 방향의 괴석이 즐비한 어느 산등성이의 동굴 안에서는, 수려한 외모의 청년이 검상(劍傷)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푸르스름하니 창백했다. 상처는 보기에 그리 심각하진 않았지만, 그가 느끼는 고통은 마두(魔頭)인 그조차도 참지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는 진마(*眞魔: 마의 정점에 도달한 마인)가 아니었으므로, 진마(眞魔)의 신체를 갖추지 못했고, 자연히 형체와 그림자를 없애는 수준에 이르지 못해 감당할 수 있는 통증에도 한계가 있었다.
“허억…… 헉……. 이제 좀 살겠네…….”
검상의 고통이 조금 줄어들자 북목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상처 부위를 살펴보았다. 검기는 이미 많이 흩어졌으나, 그에 더해 검의(劍意)까지 남아있었으므로 이는 시간을 들여 천천히 회복해야 했다.
‘그 요왕하고 육오는 죽었을까? 육오는 아마 8할은 죽지 않았을 테지. 그놈은 성정이 음험하여, 보통 마두들보다도 더 종잡을 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과연 그게 정말 말실수였을까? 설마 내가 그놈한테 언제 미움을 산 적이 있었나? 아니면 요왕이?’
여러 가능성을 떠올리던 북목은 돌연 그 요왕이 입만 열면 현제(*賢弟: 아우뻘 되는 사람을 높여 이르는 말)니, 동생이니 해대던 것이 떠올랐다. 요왕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육오를 아랫사람처럼 대했는데, 육오 그놈은 겉으로는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음험한 성정을 생각하면 아마 계연의 손을 빌려 상대를 처리한 듯했다.
물론 육오 자신도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이는 조금 황당한 가정이긴 했다. 하지만 북목은 육오의 종잡을 수 없는 성정을 떠올리며, 자신의 추측이 사실과 가까울 거라 확신했다. 천계맹에 몸담은 이들은 사실 정상적인 이가 별로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북목은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육오는 자신도 계연에게 당할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 생각에 북목은 소름이 끼쳤다.
‘그 미친놈…….’
북목은 이를 갈며 분노에 찬 채 생각했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은 오늘 육오 때문에 검상을 입은 거였다. 게다가 원래부터 그가 내심 업신여기고 있던 맹호 요왕도 오늘 육오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북목은 육오의 행동에 무척 화가 났지만, 동시에 육오의 본래 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꺼려지기도 했다. 원래도 그놈은 위험하다는 걸 직감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육오가 위험한 것을 넘어 미친놈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자 아무리 자신이 마두(魔頭)라도 두려울 정도였다.
“육오 그놈도 이번에 콱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북목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가 돌연 무언가를 느끼고는 가슴이 쿵,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어딘가 이상했다.
“이런, 날 놓아준 게 아니었어!”
상황을 파악한 북목은 즉시 빛으로 변하여 몸을 숨기던 곳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쉴새 없이 모습을 변화시키며 날아가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직면한 상황을 점쳐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었는데, 이점 때문에 북목은 더욱 마음이 불안해졌다. 다른 상황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계연이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게 확실한 상황이었다. 이미 천 리 밖으로 도망쳐 왔는데도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에 대비하고자 북목은 대량의 마기(魔氣)를 아홉 갈래로 분산하여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려 보냈다. 여러 갈래의 마기는 상공으로 날아가거나, 지면 아래로 숨거나, 산간에 부는 바람과 섞여들기도 했으며, 은밀한 장소에 몸을 숨기기도 했다. 아직 자신을 추격해오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마기로 빚어진 여러 북목은 모두 전력을 다해 도망쳤다.
하지만 계연과 연백평이 점괘를 치거나 감응을 느낀 대상은 그가 입은 검상(劍傷)이었으므로, 그가 부린 잔꾀는 두 사람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넝쿨검에 입은 상처에는 쉽게 흩어지지 않는 검의(劍意)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북목으로부터 천 리 떨어진 곳에서는 계연과 연백평이 이미 탄천수에서 벗어나 구름을 타고 그를 뒤쫓고 있었다. 탄천수는 이때 또다시 마주칠지 모를 위험을 피하고자 강풍이 부는 대기층보다 더 높은 곳을 비행했다. 조금 전 몇몇 요왕과 맺은 협의는 그들이 담당하는 작은 지역에만 국한될 뿐, 광활한 남황대산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북목이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을 때, 계연과 연백평은 이미 마음으로 감응할 정도로 그와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계 선생님, 그 마두가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네, 지금은 도망쳐봤자 이미 늦었을 텐데 말이에요.”
계연이 날린 일검은 힘이 아니라 뜻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이때 북목에게는 넝쿨검의 검의가 남아있었으므로, 넝쿨검 홀로 보내도 능히 그 마두를 베어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순간, 북목에게서 갈라져 나온 마기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두 사람이 있는 방향으로 도망쳐오고 있었는데, 모습을 숨긴 계연과 연백평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이를 본 두 사람은 얼굴에 괴이한 기색을 띠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끝없이 변화하는 마기를 상대조차 하지 않고, 더욱 높은 상공으로 올라가 계속해서 북목을 뒤쫓기 시작했다.
“계 선생님, 어떻게 그 마두를 잡을 생각입니까? 그 마두는 보기보다 그리 단순한 자가 아닌 듯합니다. 변화와 둔술에 능한 걸 보니, 필시 배후에 관련된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곤선승을 쓸 생각이신지요?”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수리건곤을 써보려고요.”
‘수리건곤?’
연백평은 한 번도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마 계 선생님이 지닌 또 다른 신통한 술법인 듯했다.
연백평이 수리건곤이 과연 무엇일까 추측하던 때, 북목은 계연이 자신을 거의 따라잡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점괘를 치거나 무슨 감응을 느낀 게 아니라, 검상에서 느껴지는 검의가 더욱 활발해진 것을 느끼고서 자신을 벤 선검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추측해낸 것이었다.
아직 그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북목은 위기가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이에 그는 다른 것을 고려할 새도 없이, 좌우 손톱을 이용해 양쪽 팔꿈치에서 손목까지 쭉 깊이 그었다. 그러자 자흑색(紫黑色)의 마혈이 솟구치며, 그의 온몸이 마기와 핏빛에 뒤덮였다.
그가 이른바 ‘천마혈둔대법(天魔血遁大法: 피를 이용해 도망치는 마도(魔道)의 술법)’을 펼치자, 계연과 연백평은 북목의 형체가 환영처럼 변하더니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 속도는 심지어 일반 검선(劍仙)들이 사용하는 비검술(飛劍術)보다 빨랐다.
“선생님?”
“도망치고 싶어도 그리 쉽지 않을걸요.”
마두의 속도는 무척 빨랐지만, 계연의 감각이 미치는 범위에서 마두가 벗어나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게다가 계연은 이미 북목의 기운을 목표물로 고정한 뒤였다. 마침내 계연이 뒷짐을 지고 있던 오른팔을 뻗자, 바람을 맞아 소매가 넓게 부풀었다.
후욱-!연백평의 시각으로는 계연의 옷자락이 부풀어 오른 후로는 별다른 변화를 보지 못했지만, 신념(*神念: 수행자의 의지, 기억, 생각을 가지며 입정 후에 활성화되는 것으로, 영혼과 비슷함)의 측면으로는 마치 계 선생님의 소맷자락이 무한대로 늘어나, 천지를 모두 담을 수도 있을 듯이 느껴졌다. 그 소매가 드리우는 그림자에 하늘이 어두워지고 해가 가려질 정도였다.
연백평이 자신의 감각을 바탕으로 여러 추측을 하던 때, 계연의 동작 때문에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대지에는 옅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끝 간 데 없이 늘어나는 넓은 소매는 시간과 공간의 규칙을 무시하고서 마침내 북목을 따라잡았다.
한편, 천마혈둔대법을 펼쳐 도망치던 북목은 문득 하늘이 어두워진 것을 느꼈다. 그에 더해 그리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그로서는 손쓸 도리가 없을 정도의 견인력이 그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마치 평범한 인간이 되어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심상찮음을 느낀 북목이 고개를 돌려보니, 계연의 한쪽 소맷자락이 그를 뒤덮어오는 게 보였다. 소매 안쪽은 우선 옷감의 재질이 먼저 보였고, 그 안으로는 빛과 그림자가 흐르며 각종 기운이 뒤섞여 있었으며, 벼락이 떨어지고 비가 내리는 것도 보였다.
“이게 무슨……. 어어?”
“수리건곤이라는 술법이에요.”
계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북목은 반항할 여지도 잃은 채 순식간에 소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계연이 소매를 거둬들이자, 어두워졌던 하늘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조금 전 일어났던 모든 일이 환각이었던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