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780화 (780/892)

780화. 천기전이 열리다

건물들은 아름답게 조각된 난간과 옥으로 된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마치 수면에서 1척(尺) 정도 위에 지어진 어느 수향(*水鄕: 물이 많은 고장)의 건물 같았다. 하지만 이런 건물들은 주로 강 연안을 따라 지어진 게 대부분이었는데, 이처럼 끝없는 수역 위에 달랑 세워져 있으니 조금 이상해 보였다. 보아하니 이곳 수역에는 정말로 파도가 전혀 일지 않는 듯했다.

지금은 비록 수각(*水閣: 물가나 물 위에 지은 정자)밖에 볼 수 없었지만, 조금 전에 현기자가 ‘13도’라고 거론한 걸 보니, 멀리 어딘가에 섬이 있긴 한 것 같았다. 다만 천기 동천 안에 대체 육지가 있긴 한 걸까 궁금해졌다.

이곳의 수각들은 무척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었고, 규모도 작지 않았다. 하지만 천기각 수사들은 이들을 데리고 한가로이 거닐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계연, 거원자, 강설릉 등에게 각자 수행을 닦고 머물 수 있는 곳을 배정해준 뒤, 계연을 이끌고 천기전(天機殿)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남은 거원자와 위미종 수사들은 어느 누각 꼭대기에 앉아 다과를 곁들여 차를 마셨다.

거원자와 강설릉은 탁자 앞에 마주 보고 앉았고, 다른 위미종 제자들은 다른 탁자 몇 개에 나눠 앉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천기각 수사들과 계연이 저 아래로 멀리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장수옹 몇 명은 계연의 양옆을 따르고 있었고, 그 뒤로는 항렬이 높은 천기각 수사들이 두 줄로 늘어서서 공손한 태도로 뒤따랐다.

“거 도우, 천기각 도우들이 계 선생님을 대하는 것이 꼭 후배가 조사(*祖師: 어떤 종파를 처음 세운 사람)를 대하는 것 같지 않나요? 듣자 하니, 계 선생님께서는 대정국 계주의 우규산 근처에서 오래 사셨다는데, 그럼 옥회산과도 분명 교분이 깊겠군요. 혹 도우께서 제 의혹을 풀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거원자는 계연에 대해 아는 게 꽤 많았지만, 강설릉의 물음에는 그도 시원스레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저희 옥회산이 비록 계 선생님과 오랜 교분을 쌓아왔긴 하나, 선생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건 아닙니다. 계 선생님은 현묘한 법력을 지니셨고, 내력이 신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저희가 선생님의 존재를 알기 전에도 선생님은 이미 영안현에 머물고 계셨으며, 어쩌면 우규산에서 아주 오래 사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설령 선생님과 천기각 사이에 저희가 모르는 인연이 있다고 해도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그러자 강설릉이 홀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편, 계연은 천기각 수사들의 안내에 따라 마침내 천기각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수각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정상이 평평하게 다져진 어느 산봉우리의 기슭에 와 있었다.

계연은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최소한 6, 7개의 진법을 통과했다고 느꼈다. 마지막 진법을 통과했을 때는 주위의 환경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는데, 끝없이 펼쳐진 수역이 아니라, 어딘지 모를 육지에 와 있었다. 계연이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이제 떠나온 수각이 보이지 않았다.

눈앞의 산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대신 계단이 천 개에 이르렀다. 그 끝의 천기전은 하얀 벽에 검은 기와를 얹은 대전(大殿)으로,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이들은 따로 없었다.

그들이 대전이 세워진 축대의 계단 아래에 멈춰서자, 현기자가 대전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천기각 제자들은 고두(*叩頭: 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나타냄)하시오!”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리자, 천기각 수사들이 황제를 향해 절을 올리는 것처럼 천기전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은 항렬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자세로 장읍례를 올리더니 마침내 바닥에 꿇어앉아 절을 올렸다.

“이(二) 고두, 다시 고두하시오…….”

그러자 계연은 이 상황이 난처해 이들을 따라 함께 읍을 올렸다. 하지만 그들이 강요하지도 않았고, 계연도 바닥에 꿇어 버릇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으로 그쳤다. 그렇게 모두가 땅에 머리를 갖다 댈 때 오직 계연만이 홀로 꼿꼿이 서 있었다.

다행히 이 어색한 시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현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기전을 가리키더니 계연에게 정중히 말했다.

“계 선생님, 문을 열어주십시오.”

그 말에 계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미간을 모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백평을 포함한 모든 천기각 수사들은 읍을 행하는 자세로, 경외심을 담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에는 조금도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제가 문을 열라고요?”

계연이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자 현기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께서 문을 열어주십시오!”

“문을 열어주십시오!”

천기각 제자들이 입을 모아 이렇게 외쳤다. 그들의 어조는 전혀 강압적이지 않았으나, 태도가 무척 진지하여 계연은 왠지 모르게 압박감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천기전의 대문을 바라본 계연은 마침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때까지도 천기각 수사들은 누구도 그를 재촉하지 않고, 그저 정중한 태도로 한쪽에 서 있을 뿐이었다.

계연은 다시 찡그린 미간을 펴고서, 어차피 문을 열면 무슨 일인지 알게 될 테니 굳이 지금 고민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가 설령 문을 열지 못하더라도 또 무슨 큰일이 있겠는가?

“알겠어요.”

담담한 어조로 대답한 계연은 걸음을 옮겨, 대전 앞의 계단에 올라섰다. 허리를 굽힌 천기각 수사들의 경외심이 느껴지는 태도와 달리, 계연은 가슴을 곧게 펴고 머리도 꼿꼿이 들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는 경의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천기전의 붉은 대문 앞에 선 계연은 아무런 특이한 기운도 느끼지 못했다. 대문은 2장(약 6m) 높이로, 신령한 빛이 보이거나 현묘한 법력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양쪽 대문 위에 사람의 형상처럼 보이는 그림이 떠올랐다.

좌측의 사람은 금빛 갑주를 입고서 주위에 표대(*飄帶: 어깨나 팔에 거는 장식용 띠)가 흩날리고 있었으며, 대문과 같은 높이로 우뚝 서 있었다. 우측의 사람도 마찬가지로 갑주를 입고서 왼손에는 부적을, 오른손에는 옥규(*玉圭: 옥으로 만든 홀(笏))를 쥐고 있었으며, 발아래에는 현갑귀(*玄甲龜: 등이 검은 거북)를 밟고 서 있었다.

계연이 두 부의 그림을 보며 미간을 굳게 모은 채 생각에 잠기자, 두 ‘사람’이 그를 발견하고는 곧장 뒤로 한 발짝 물러나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문을 지키는 신인가? 문신(門神)은 또 처음이네…….’

계연이 이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축대 아래의 천기각 수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경외심이 담뿍 담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놀라움과 기쁨도 느껴졌고, 심지어는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이도 있었다.

‘왜 그러지? 설마 이 문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나? 아니면 이 계단이 몹시 오르기 어려운가? 저 문신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나?’

어쨌든 천기각 수사들이 자신을 해칠 리 없었기 때문에, 계연은 갖가지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는 두 문신을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가볍게 대문을 밀었다.

끼이이이……!

그러자 오래 열리지 않던 문이 열렸을 때처럼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계연은 살짝 힘만 주었을 뿐인데도 양쪽 대문이 저절로 열어젖혀졌다. 곧이어 대전 안을 감돌던 흑과 백의 기운이 흘러나오며 주위를 맴돌았다.

“열, 열렸습니다…….”

연백평이 말을 더듬으며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자, 일찍이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한 현기자는 오히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연백평과 현기자 같은 장수옹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다른 천기각 수사들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다. 그중에는 약하게 몸을 떠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계연은 계단 아래 천기각 수사들을 잊고, 대전 안의 흑과 백, 두 가지 기운이 흘러나와 서로 뒤섞이는 걸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천기각의 대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흑백의 두 기운이 시종일관 감돌던 내부의 기둥과 벽이 갖가지 색채의 빛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연의 법안에는 그것이 단순한 빛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대전 내부의 이 모든 광경이 특수한 정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내부의 변화는 규칙적인 동시에 혼란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여러 가지 색채가 함께 뒤섞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각각이 나타내는 정보도 복잡하게 섞여버렸다.

그건 마치 백지 위에 여러 사람이 그림을 한 부씩 그려, 수없이 많은 그림이 중첩된 것과 비슷해 보였다. 짙은 색깔만이 뒤섞여 더는 누가 무얼 그렸는지 알아볼 수가 없게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그림인지 알아보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것이 모두 그림이고, 아주 많은 그림이 뒤섞인 거라는 걸 아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 속에서 완성된 그림 한 부를 걸러내기만 하면, 그 안에 담긴 정보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계연은 대전의 문 앞에서 차를 반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동안 천기각 수사들은 감히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흑백의 두 가지 기운이 계연의 주위를 맴돌다 안으로 되돌아가고, 또 천기전 내부에서 여러 색채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걸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계연이 마침내 걸음을 떼어 천천히 대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계연이 움직이는 순간, 바깥의 천기각 수사들은 일시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저마다 초조하고 긴장된 얼굴로 눈빛을 교환했다.

“계 선생님께서 들어가셨소!”

“그럼 이제 우린 어찌하는 게 좋겠소?”

“현기자 사형, 우리도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들어가자고? 그랬다간 저 고약한 문신들께 얻어맞을 걸세! 저분들은 동천의 힘을 모을 수 있으니, 저 채찍 한 번에 최소한 현광(玄光) 한 겹이 깎여나가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네!”

“아…….”

“하지만 이제 문도 열렸는데…….”

“계 선생님께서도 이미 들어가신 마당에 저희는 여기서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사형 생각은 어떠십니까?”

“사형!”

“현기자 사형!”

현기자는 이때 미간을 찡그린 채 천기각의 대문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계연의 모습이 대전 안쪽으로 사라지자,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결정을 내렸다.

“내가 먼저 올라가 보겠다. 만약 내게 아무 일이 없으면, 벌떼처럼 몰려들지 말고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차례로 올라와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예, 사형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맞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사형!”

“조심하세요!”

만약 계연이 여기 있었다면, 수행계에서 널리 존경받는 천기각 노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느끼는 동시에 우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기각 수사들로서는 이번 일은 정말로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현기자는 의관을 한번 정돈한 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한 걸음 내디뎠다. 그는 다시 한발을 떼려다 우뚝 멈춰서고는 고개를 돌려 연백평에게 말했다.

“사제(師弟)야,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천기각의 사무는 네게 맡기마. 다른 사제들은 내 말을 명심하고 서로 돕도록 해라!”

“사형,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느 장수옹이 재빨리 대답했다.

“맞습니다! 안심하고 가셔도 됩니다, 사형!”

그 말에 현기자의 안색이 일순 나빠지자, 몇몇 장수옹이 방금 그렇게 말한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얼른 손사래를 치며 덧붙였다.

“정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록 제가 천기각의 일을 함부로 예측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괜찮을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또 계 선생님께서도 지금 대전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알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