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0화. 부뚜막을 빌리다
육 산군이 보낸 소식은 당연히 북목이 알려준 것이었지만, 계연은 그가 아는 것을 모두 말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천계맹에서도 몇 가지 사실을 알고 있나 보군. 물론 천기각 쪽에서 아는 것만큼 완전한 내용은 아닐 테지만.”
계연은 깊은 생각에 잠겨, 얼마 전 천기전에서 보았던 각종 그림을 떠올렸다. 현재 천기각 수사들은 그 위에 담긴 의미에 관해 점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천계맹이 아는 것들은 천기전 내에 나타난 그림들보다 많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짹짹-!”
종이학은 계연의 주의력이 육 산군의 털에서 멀어진 것을 보고 소리를 내며 그의 손을 콕 쪼았다. 그러자 역사 부적 네 장이 그의 날개 아래에서 떨어져 계연의 손 위에 나타났다.
종이학은 다시 육 산군의 털을 콕 쪼고는, 학 꼬리를 바짝 들어 올리고서 한쪽 날개로 꼬리를 세 번 쳤다.
“짹, 짹!”
“음? 육 산군이 또 돌파를 이뤘구나? 이제 꼬리가 세 개가 됐다고?”
그 소식에 계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자가 수행에 진보를 이뤘으니 이는 마땅히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그때 종이학이 역사 부적 중 하나를 날개로 툭 치자, 금가루 같은 빛이 바닥에 떨어져 내리며 보통 사람의 크기 정도인 금갑으로 변했다.
“주인님!”
금갑은 깍듯하게 계연을 향해 인사한 뒤,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러자 종이학이 한쪽 발로 육 산군의 털을 쥔 채 금갑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그리고는 금갑의 투구를 부리로 쫀 다음, 양쪽 날개를 서로 부딪치며 싸우는 모양새를 따라 했다.
“저 둘이 싸웠다고?”
계연이 고개를 들어 금갑을 향해 물었다.
“금갑, 조금 전에 저 털의 주인과 싸웠느냐? 자세히 말해 보거라.”
금갑은 시선을 위로 올려 종이학이 떨어뜨린 털 한 가닥을 손으로 받았다. 그리고는 계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조금 전에, 어떤 자가, 법력을 펼쳐 저희를 소환하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금갑은 말하는 속도도 느리고 말을 끊는 부분도 부자연스러웠으나, 자세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에 계연도 그 흥미로운 대결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중간에 위험한 순간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그 결과는 그를 무척 흡족하게 했다.
금갑의 서술을 듣고 난 계연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오른손을 뒤집어 바둑돌 하나를 불러냈다. 그리고는 왼손으로 점괘를 치기 시작했다.
“육 산군이 겁을 견뎌내고 꼬리를 얻었구나. 잘 됐어.”
계연이 이렇게 중얼거리자, 곧이어 그의 소매 속에서 낮고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연, 어떠냐, 이제 그 마두 놈을 처리해야겠지? 따져보면 그놈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셈이니까, 내가 가서 그놈을 삼켜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동안 네가 날 잘 돌봐줬으니, 나도 보답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이참에 내가 그 마두 놈을 처리해주마.”
“잠깐만요.”
계연은 해치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를 진정시켰다.
“그 북마(北魔)는 일단 남겨두는 게 좋겠어요. 지금 그자도 저와의 약속 때문에 마음이 불안할 거예요. 게다가 육 산군도 이제는 북마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알고 있으니, 후에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어요.”
“뭐? 그놈을 놓아주자고?”
해치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동시에 명백한 불만이 담겨 있었다.
“놓아주는 게 아니라 잠시 그대로 놔두는 거죠. 그자는 현재 육 산군의 동료인 동시에 진마의 꼭두각시니, 천계맹에서의 지위도 자연히 낮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잠시 살려두는 게 곧바로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쓸모 있어요.”
“쓸모는 무슨 쓸모, 내 보기엔 전혀 쓸모가 없다! 내가 삼켜버리는 게 훨씬 쓸모 있지!”
해치가 이렇게 소리치자 계연은 소매 속이 살짝 뜨거워진 것을 느꼈다. 뒤이어 소매 틈 사이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계연이 눈썹을 찡그리며 왼손으로 오른쪽 소매를 툭 치자, 옅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소매 속의 연기와 열기가 뚝 멈췄다.
“계연, 이게 무슨 짓이냐?”
“어르신이야말로 뭘 하신 거예요? 어떻게 항상 그렇게 먹는 생각만 하시나요?”
계연이 이렇게 면박을 주자, 해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계연은 여전히 소매 속이 뜨끈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 계연이 떠보듯 말했다.
“지난번에 용족(龍族)들을 따라 황해를 수색했을 때, 기형인 듯한 호교(*虎蛟: <산해경>에 나오는 신화 속 존재로, 물고기의 몸에 뱀의 꼬리를 지녔다고 함)들을 잡은 게 있어요. 그중 두 마리는 연구용으로 쓰고, 남은 건 어르신께 드릴게요.”
그러자 해치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계연은 소매 속 온도가 확연히 낮아진 것을 느꼈다. 그래서 계연은 웃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예전에 연 도우가 주신 생선도 아직 두 마리 남았는데, 오늘 그걸 요리할게요. 드실래요?”
“하하, 좋지, 좋아! 그렇게 하자꾸나!”
해치는 신이 난 듯 확연히 높아진 목소리로, 계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이렇게 동의했다. 둔한 금갑조차 해치의 어조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었으니, 계연과 종이학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네, 그럼 지금 바로…….”
“잠깐!”
그러자 계연이 의아한 듯이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계연의 소매 속은 더는 뜨겁지 않았으므로, 그는 해치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해치가 조금 괴이쩍은 어조로 이렇게 물어왔다.
“계연, 여기서 요리하면, 연씨랑 거씨, 강씨, 그리고 천기각 장교와 장로 같은 놈들도 부를 테지?”
“어……. 그렇게 많이 부르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맛있는 요리를 홀로 먹을 순 없으니, 가까운 도우들은 초대해야 마땅하겠죠. 그들이 오든 안 오든 그건 상대의 사정이고, 어쨌든 제 쪽에서는 마땅한 예의를 차려야 하니까요.”
“음,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내 일단은 그 기형이 된 호교 놈들로 배를 채우마. 그 생선들은 여길 나간 후에 요리하자. 너 혼자 어디를 유람한다거나 집에 있을 때 말이다.”
계연은 즉시 해치의 뜻을 이해하고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이 상고 시대의 신수는 때때로 귀여울 때가 있었다.
“네, 네. 어르신 말씀대로 할게요, 해치 어르신.”
“하하하, 우리 둘 사이에 그리 깍듯할 필요 없다. 게다가 네게 ‘어르신’이란 소리를 듣는 것도 좀 이상하니, 앞으로는 편하게 부르거라.”
“네, 그렇게 할게요.”
계연은 가볍게 웃으며 해치와의 관계가 어느새 부쩍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 때때로 해치는 그의 물음을 못 들은 척하거나, 쉽게 대답해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어쩌면 앞으로는 그런 상황도 훨씬 나아질 것 같았다. 식사를 한번 얻어먹으면 남의 부탁을 쉽게 거절할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 * *
천기전에서의 일 이후로 천기각의 항렬 높은 수사들은 자주 모여 회의를 열곤 했다. 장수옹 중에서는 천기전에서 본 그림에 담긴 현기(*玄機: 깊고 묘한 이치)를 엿보려고 폐관 수행을 닦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간 연백평이나 현기자를 비롯한 이들은 자주 계연의 거처를 찾아왔지만, 갈수록 그 빈도가 낮아지고 있었다. 어떤 일들은 계연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고, 입 밖에 낼 수 없는 일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기각 수사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연은 천기를 함께 엿본 참여자에서 기다리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천기각 수사들이 천기전에서 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 후 위미종의 수선자 한 무리가 도착했고, 이번에는 천기각 수사들이 직접 동천 밖으로 마중을 나갔다. 새로 도착한 위미종 수선자들은 소삼이 겪을 변화를 위해 진법을 깔거나 상처를 치료하는 등 각종 준비를 도왔다.
그러자 계연과 거원자는 외려 할 일이 없어져 천기 동천 내를 한 바퀴 거닐었다. 공간이 넓긴 했으나, 수사들 빼고는 사는 이가 없어 마땅히 볼 것도 없고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종이학이 육 산군의 소식을 가져온 날로부터 한 달 뒤, 계연은 해치의 재촉에 못 이겨 잠시 천기동천을 나갔다 오기로 했다. 거원자는 사실 계연을 따라가고 싶어 했으나, 해치의 강력한 요구 때문에 계연은 완곡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 * *
남황주 중부의 서남쪽에는 녹양국(鹿良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때 녹양국 제2의 수도라 불리는 강구성(江口城) 밖 황량한 교외의 관도(官道)에는 푸른 장삼에 묵옥 비녀를 꽂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남자가 남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계연은 관도를 따라 걸으면서 둘러보니 주위에는 민가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걷다 보니 마침내 찻집 하나가 나타났다.
‘저기구나.’
유유자적한 걸음과 달리 계연은 무척 빨리 찻집 안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만 안에는 손님도 없고 주인장도 없었다. 이에 안팎을 살짝 둘러보니, 걸상이 쓰러져 있었고 부뚜막 주위도 어지러웠다.
몇몇 탁자 위에는 찻잔과 찻주전자가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어느 주전자에 뚜껑이 열려있어 살펴보니, 안쪽의 찻잎 찌꺼기에는 이미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아마 길을 지나던 행인이 찻집에 아무도 없는 걸 보고, 갈증을 풀기 위해 스스로 차를 우렸다가 정리도 하지 않고 떠난 듯했다. 물론 찻값을 남겼을 리도 없었다.
“보아하니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보네.”
계연은 쓰러진 걸상을 바로 세우고, 탁자의 위치를 바로잡은 다음, 탁자 위의 찻주전자와 찻잔을 정리해 부뚜막으로 가져갔다. 그 김에 주위도 깨끗하게 청소했다.
“좋구나, 여기가 딱이겠어. 계연, 여기는 부뚜막도 있고 주인도 없는 것 같으니 여기서 요리를 하면 될 것 같다.”
“네. 마침 아궁이가 두 개나 있으니, 한쪽에는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물을 끓이고, 다른 한쪽에는 솥을 걸어 생선 요리를 하면 되겠네요.”
계연이 이렇게 대답하자 소매 속에서 해치가 껄껄 웃었다.
부뚜막 근처의 물항아리 안에는 이미 물이 다 말라 있었고, 먼지와 낙엽만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이에 계연은 그 안의 물을 쓰지 않고, 푸른 죽통을 꺼내 들었다. 이왕 해치와 더욱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이니만큼 자신도 본전을 좀 투자해야 했다.
“오늘은 이걸로 물을 끓이고 요리를 하도록 하죠.”
“그 산신이 준 샘물이로구나? 좋다, 좋아! 벌써부터 침이 고이는구나. 어서 서두르거라!”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그는 소매를 한번 크게 휘둘러 솥을 깨끗하게 씻은 뒤, 죽통의 마개를 뽑아 솥 안에 물을 쏟아부었다.
“두 마리는 매운 양념으로 볶고, 다른 두 마리로는 맑은 탕을 끓이는 게 어떨까요?”
“하하, 이 몸은 아무거나 괜찮다! 계연 네가 알아서 하거라!”
계연은 요리를 위해 아궁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때, 조금 멀리 떨어진 관도 위에서는 종이학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학은 벌레를 잡아 둥지의 어린 새들에게 먹여주거나,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바삐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관도 근처로 돌아와 보니, 저 멀리 마차 두 대와 마차를 따르는 기수들로 구성된 대열이 천천히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마차 대열의 가장 앞에는 검은 경장 차림에 관으로 머리를 틀어 올린 사내가 말을 탄 채 대열을 이끌고 있었다. 관도 저 끝을 바라보던 그가 돌연 고개를 돌려 이렇게 말했다.
“앞에 연기가 보인다. 어쩌면 민가가 있는 곳에 이른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