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803화 (803/892)

803화.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

“곧 결과를 볼 수 있을 거예요. 가만히 두고 보세요.”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 계연은 주루의 주인장과 서생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는 무릎을 구부려 아이가 내내 품에 안고 있던 서책 몇 권을 바라보았다.

“네가 들고 있는 게 무슨 책인지 보여줄 수 있니?”

그러자 아이가 자신의 부친을 한번 보더니 품 안의 책을 하나씩 펼쳤다. 그중 서책 두 권은 어린아이를 위한 계몽 서적이었고, 다른 하나는 흰 종이를 엮어 묶기만 했을 뿐 장정을 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맨 앞장에 <오선경(悟禪經)>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불경은 네가 말했던 방장께서 주신 것이니?”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장께서는 제게 글을 가르쳐 주시고, 이 불경은 제가 쓴 거예요.”

“네가 썼다고?”

‘이렇게 어린아이가 불경을 썼다니?’

계연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네, 오늘 절에 있는 학당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쓰고 싶어져서 쓰게 되었어요.”

“그럼 내가 조금만 봐도 될까?”

계연이 이렇게 묻자 아이가 곧장 종이 묶음을 계연에게 건넸다. 계연이 천천히 읽어보니, 그 안의 내용은 결코 어린아이가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일반적인 승려조차 쓰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보다는 마운대사가 불법(佛法)을 닦으며 깨우친 바를 적은 것에 가까웠다.

심오한 내용도 있고 비교적 얕은 내용도 있었지만, 선(*禪: 마음을 가다듬어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깊이 생각해서 무아(無我)의 경지에 드는 일)에 관한 사고가 깊고 독특한 이치가 담겨 있어 대대로 전해질 만한 가치가 있는 불교 경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마운대사의 불법에 대한 이해가 계연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계연은 어쩐지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어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는 마운의 불리(*佛理: 불도의 이치)가 깊긴 하지만 잡다하고, 불법은 깨달았으나 불심(佛心)은 깨닫지 못했으며, 속세의 중생을 제도할 의지는 있으나 결심을 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계연은 마운 노승이 진마가 올 거라는 걸 듣기 전과 후의 반응을 떠올려 보고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계연은 눈앞의 아이를 한번 보고는, 종이 묶음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서 다시 붓을 들어 한 구절을 적었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我不入地獄 誰入地獄)?》

붓을 내려놓은 계연은 입김을 불어 먹물을 말린 뒤, 다시 아이에게 종이 묶음을 돌려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몇 번 종이를 뒤적이다가 다시 품에 껴안았다.

주루 밖의 하늘은 이미 먹구름으로 덮여 있었고, 간간이 천둥소리가 울렸다. 계연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속도가 더욱 빨라서 가볍게 미소 지었다.

해치는 신수로서 인간이 사는 속세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계연은 달랐다. 마운이 어릴 때는 그가 생활했던 도시가 바로 그의 세계의 전부였다.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이 이곳에 몰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진마가 어린 마운을 포함한 성 안팎의 모든 사람과 법률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 이 세계 전체는 그를 배척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이가 계연에게서 종이 묶음을 받아든 지 얼마 되지 않아 하늘에서는 빈번히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고, 천둥소리는 점점 더 크게 울렸다.

그렇게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지만, 천둥과 벼락만 내리칠 뿐 비는 내리지 않았다. 이때 계연은 세 명의 서생과 함께 주루의 주인장 부자(父子)와 점소이를 도와 엉망이 된 대청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진마를 추격할 생각이 없었다.

한편, 성 곳곳에서는 관아의 일꾼들이 여인으로 변한 진마의 모습을 포고문으로 붙이고 있었다. 그들은 계연이 말한 중요 지점은 물론이고, 관아의 화공에게 그림을 더욱 많이 모사하게 하여 더 넓은 범위에 퍼뜨렸다. 그러자 성안의 무림인들은 스스로 인원을 조직해 무림의 체면을 떨어뜨린 여인의 정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번쩍! 우르릉…….

그러다 누군가의 지붕이나 뜰 안에 벼락이 떨어졌는지, 멀리서 날카로운 비명이 계연의 귓가에 들렸다. 마침 정리와 청소를 마치고 주루에서 차를 마시던 계연이 그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르릉……!

계연이 주루 밖으로 나가보니, 하늘에서 벼락이 빛으로 궤적을 그리며 성안 어딘가로 떨어졌다.

그 순간, 성 동남쪽의 어느 원락 안에서는 소박한 옷을 입은 노인이 벼락에 맞아 바닥에 쓰러졌다.

“헉, 아버지!”

“영감!”

“아버지, 괜찮으세요?”

놀라 당황한 가족들이 곁으로 모여드는 순간, 또 다른 벼락 한 줄기가 노인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의 온몸이 새카맣게 타버렸다.

노인은 두 번이나 벼락을 맞으면서도 비명을 지르거나 놀라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고개를 들어 먹구름으로 뒤덮인 채 번개가 번쩍이는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째서? 왜 내가 벼락을 맞는 거지? 여기서는 계연도 어뢰술을 부리지 못할 텐데?”

경악한 남자의 눈빛에 더욱 많은 번개가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이내 남자는 즉시 몸을 움직여 질주하기 시작했다.

콰직- 우르릉……!

번쩍! 콰지직-!

쿠구궁…… 콰직!

옥상과 담장을 뛰어넘는 내내 벼락은 그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곧장 그의 몸에 떨어진 것도 있었고, 처마나 나무에 가로막힌 것도 있었다. 하지만 벼락은 그가 자신을 피하게 두지 않겠다는 듯, 처마를 부수고 나무를 갈라버렸다.

‘어째서 계연이 어뢰술을 쓸 수 있는 거지? 어째서?’

벼락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알아차린 진마는 계연이 벼락을 부리는 거라고 여기며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자신은 외양을 바꾸는 데만 해도 온 힘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계연은 천위(*天威: 하늘의 위세)를 부릴 수 있다니? 게다가 이곳의 제한적인 상황 때문에 진마는 현재 벼락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비록 그가 진마이고, 또 이 벼락에는 특별한 힘이 담겨 있지도 않았지만, 이 세계의 특수성 때문에 그는 이 순간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그는 더는 성안에 머무르지 못하고 벼락에 맞은 통증을 참아가며 서둘러 성을 빠져나왔다. 일단 잠시 이곳을 떠나있다가 묘책이 떠오르면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한편, 성안 곳곳에 붙은 탕부 ‘견맥’의 수배문은 백성들 사이에서 유명한 화제가 되었는데, 포고가 붙은 곳에는 백성들이 모여 서서 그 뱀과 독사 같은 심장을 지닌 여인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러자 진마는 더욱 불안에 떨며 계연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어 했다.

하지만 소위 36계 중 줄행랑이 상책이라는 말처럼, 일단 계연에게 사로잡힐 위험을 피할 수만 있다면 진마는 이 세계에서 언제까지나 인내심 있게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계연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곳의 시간이 유속처럼 빠르긴 했지만, 바깥 세계의 시간도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성벽이며 관졸들은 진마에게 있어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으므로, 그는 성문이 아니라 곧장 성벽을 뛰어넘어 먼 곳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강을 건너고, 언덕을 넘고, 마을을 지나고, 산을 넘었다…….

하루 뒤, 노인으로 변한 진마는 어느 산등성이에 올라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 곳의 풍경은 안개에 뒤덮인 듯 몽롱하게 보였고, 너무나 요원해 결코 닿지 못할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쿠구궁……!

머리 위에서 천둥소리가 들리자 놀란 진마가 얼른 위를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은 어느새 여기까지 그를 따라왔고, 구름 사이로 번개가 종횡무진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진마의 귓속에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노한 것 같기도 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중 그를 가장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괴이한 염불 소리였는데, 마치 수많은 승려가 그를 둘러싸고 각종 불경을 외는 듯했다.

“나면서부터 선(善)을 아는 것은 복이니라, 선재 대명왕불……!”

“악을 행하는 자는 삼재구난(*三災九難: 각종 불행·재난·질병·상해를 가리킴)을 면치 못하리라, 선재 대명왕불…….”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마귀는 주살해야 마땅하며, 세간을 어지럽히는 마귀는 물리쳐야 마땅하다, 선재 대명왕불!”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

“선재 대명왕불…….”

우르릉…… 쾅! 번쩍-!

콰앙! 번쩍-!

벼락이 연이어 진마의 몸 위로 떨어지면서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신체의 고통보다는 염불 외는 소리가 더욱 그를 못 견디게 했다. 곧이어 그의 몸에서는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게 벼락에 맞아서인지 다른 원인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아……! 그만, 그만해! 빌어먹을 중놈, 아악-!”

진마는 머리를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늘에서는 계속 벼락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전류가 아니라 염불 소리 그 자체가 뇌 속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그러더니 그의 주위 풍경이 찢기고 비틀리기 시작했다.

* * *

멀리 성안에서는 계연이 주루의 입구에 서서 진마가 있는 방향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대청의 계산대 위에서 책을 읽는 아이를 보고 말했다.

“마운, 나는 이만 가봐야겠구나.”

“선생님, 가시려고요? 하지만 그 단도를 아직 맡기지 않았는데요.”

그의 이름은 마운이 아니었으나, 계 선생님께서 계속 그를 그리 불렀고 자기도 어쩐지 별달리 거리낌이 없었으므로 그렇게 받아들인 상태였다.

아이가 계속 주루의 손해 배상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 계연은 약간 미안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일이 있어서 그러니, 단도는 네가 대신 전당포에 맡기렴.”

“아…….”

계연은 아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루를 나서 길을 따라 걸어갔다. 하늘에서는 천둥이 울렸고 주위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그가 고개를 돌리자 점점 어두워지는 주루 쪽에서 금빛 불광(佛光)이 솟구쳤다.

곧이어 이 세계가 형체를 잃고 사라지더니 다시 처음의 암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마기(魔氣)에 휩싸여 비틀대는 모호한 형체가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자의 허리춤에는 작고 가느다란 검의(劍意)가 남아, 그가 뿜어내는 마기를 가르고 있었다.

“허억…… 헉…… 헉……!”

진마는 마치 심한 외상을 입은 사람처럼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계연, 대체 무슨 술법을 부린 거지?”

계연은 이때 진마를 향해 흥미로운 눈길을 던지며 왜 그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공격을 받았는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불문(佛門)은 항마(*降魔: 마귀를 항복시킴)를 중히 여기는 곳이야. 외마를 물리칠 수 있다면, 심마도 물론 물리칠 수 있겠지. 당신은 방금 마운의 항마법에 당한 겁니다.”

물론 계연이 나서서 돕긴 했으나, 그가 말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마는 이때 생김새가 계속해서 비틀려 모습이 모호한 상태였다. 그는 계연의 말을 듣더니 휙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분노에 찬 두 눈이 자홍색으로 번졌다.

“네가 아니라고? 그 중놈이 한 짓이야? 죽여버릴 테다!”

진마는 이미 상황이 제 손에서 벗어났음을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이제 마운이라는 용기(容器)가 자기 대신 곤선승을 막아주든 말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렇게 되었으니, 그럼 최소한 마운이라도 죽여 이 분노를 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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